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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소통과 포용, 협치의 달인 링컨

 

소통과 포용, 협치의 달인 링컨

 

 

“지도자의 진면목을 보려면 그가 곤경을 어떻게 이겨냈는가보다 그 후에 그렇게 해서 얻은 권력을 어떻게 행사했는가에 더 주목해야 한다." -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의 대통령 중 가장 훌륭한 대통령을 꼽으라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에이브러햄 링컨을 꼽을 것입니다. 오늘날 또 하나의 훌륭한 대통령으로 손꼽히는 버락 오바마뿐 아니라 현재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위태위태하게 미국을 이끌어가고 있는 트럼프 또한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링컨을 꼽을 정도이니 링컨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노예문제로 남부와 북부가 갈라서면서 시작된 남북전쟁과 그 와중에서도 강/온파로 나뉘어 대립을 일삼는 북부 조야(朝野), 민주당과 일부 민심, 흑인들을 위한 전쟁이라는 생각으로 반대하는 일부 병사들의 저항에 맞서 노예해방선언을 밀어붙임으로써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든 링컨의 삶은 일국의 대통령으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인류 역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함 그 자체였습니다.

 

소통과 포용, 협치의 달인 링컨

 

우연한 기회에 ‘링컨’이라는 인물에 주목하게 되면서 그의 전기를 읽기 시작했다가 링컨을 둘러싼 주변인물들 이야기뿐 아니라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늪으로까지 빠져들게 된 [링컨과 남북전쟁 그리고 노예해방선언]의 저자 김종선은 “그러나 그 거대한 늪은 빠져나와야겠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게 만들 만큼 흥미진진한 늪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늪은 삼국지의 영웅들을 연상케 하는 남북전쟁의 수많은 장군들과 미국 정치를 이끈 많은 정치가 등 실존인물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관찰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참으로 흥미로운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소통과 포용, 협치의 달인 링컨]입니다. 최근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협치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내보인 링컨의 리더십을 통해 국가든 그 외 어떤 분야에서든 올바른 지도자의 힘이 얼마나 소중하고 위대한가를 새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전국무대로 간 시골변호사 링컨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서부 변경의 일리노이주 정가에서 무명 정치인으로 대권의 꿈을 키워왔던 링컨은 정치적 기반이 열악하기 그지 없는 상황에서도 당시의 쟁쟁한 인물들을 제치고 16대와 17대 대통령을 연임하는 큰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지역에서 쌓아온 기반, 늘 대의를 앞세우며 얻어둔 공정하다는 평판, 정적(政敵)까지도 친구로 만들어버리는 특유의 친화력, 또 무엇보다 정국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는 정치적 감각,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나타난 결과였기 때문이다.

 

 

 친절하고 유머러스한 성품과 온화한 화법

 

링컨의 고향인 일리노이주 주민들이 그에게 보낸 열렬한 지지를 보낸 것은 오랜 세월 이들과 동고동락하다시피해 온 데 따른 결과였다. 매년 봄과 가을에 있는 8주간의 순회재판 기간 중 링컨은 일리노이주 일대를 돌며 변호사 일을 했는데, 연중 기껏 두 차례 정도 있는 이 순회재판은 당시 서쪽 변경에 있었던 일리노이주 주민들에게는 바깥세상 일을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그래서 재판이 끝난 늦은 오후엔 마을사람들이 회관 앞으로 모여들어 술잔을 기울이며 판사와 변호사들과 어울려 이야기꽃을 피우기 일쑤였는데, 이 자리에서 얘기를 주도하는 것은 늘 링컨이었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그의 이야기에 사람들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게다가 그는 사람들을 늘 웃는 낯으로 친절하게 대했으며, 언제나 먼저 인사했다. 심지어는 길에서 마주치는 말이나 가축들한테도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고 한다.

 

 

 뛰어난 소통의 기술

 

정치적으로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링컨을 일약 전국적인 명사로 떠오르게 한 것은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1858년에 있었던 연방상원의원 선거였다. 상대는 거물 정치인 더글러스 상원의원이었다. 그런 그를 유세에서 계속 압박하면서 처음으로 전국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바로 링컨의 쉬운 대중연설 덕분이었다.

 

링컨은 “내 자녀들이 흑인들과 같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는 없고, 또 당신들 역시 흑인들과 함께 줄을 서서 투표하러 갈 수는 없지 않느냐”는 더글러스의 선동적인 연설에 맞서 ‘목수 얘기’로 노예제 확산 문제의 본질을 알기 쉽게 얘기했다. 독립전쟁 후 건국의 아버지들이 연방설립을 위해 불가피하게 헌법에서 노예제를 제한적으로 수용하기로 했던 미연방이라는 가옥을 더글러스를 포함한 세 목수가 주인의 눈을 피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집으로 마음대로 개축하려 들고 있다는 비유였다.

 

링컨이 말하는 세 목수란 바로 노예제를 후원하는 대통령 뷰캐넌, 대법원장 태니, 그리고 당시 유세장에 함께 서 있던 상원의원 더글러스였다. 노예제 폐지의 당위성에 대한 공감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 숨어 있던 흑백공존의 불편함을 애써 일깨워주어 노예제 반대여론을 잠재우려 했던 더글러스의 선동적 연설을 압도했던 것이다. 당대 꼴찌의 학력으로 당대 최고 학력의 정적들을 꺾은 링컨의 비법은 언제나 낮은 곳을 보고 쉽게 얘기하는 바로 이 ‘소통의 기술’에 있었다.

 

 

 사사로운 이해관계보다 대의를 앞세운 지도자  

 

링컨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인물 개개인이 자기 입맛에 맞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대통령의 당연한 책무라고 여겼다. 하지만 링컨의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취임 후 초대 내각에 참여하는 인사들 개개인이 링컨을 압도하는 경력과 지명도를 가지고 있어서 자칫 링컨의 리더십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도 많았다.

 

그러나 취임 직후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신임 각료들과 미처 호흡을 맞춰볼 틈도 없이 즉시 전시 내각체제를 운영해야 했지만, 그는 특유의 포용력과 친화력으로 정치적 개성이 강한 이들을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이며 미국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비상한 국정난제들을 함께 풀어나갔다.

 

행동은 굼뜬 것 같지만 일단 기회만 포착하면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 어떤 문제든 단숨에 해결해 버리는 링컨은 이처럼 경기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적재적소에 공을 찔러넣어주는 미드필더 역할뿐 아니라 때로는 킬러본능을 가진 최전방 공격수 역할까지 직접 멋지게 해치웠다.

 

이상, 통과 포용, 협치의 달인 링컨입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