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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택시운전사 송강호를 통해 본 '때린 놈이 발 뻗고 사는 세상'

 

택시운전사 송강호를 통해 본 '때린 놈이 발 뻗고 사는 세상'

 

 

지난해 여름 [채식주의자]로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을 수상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던 작가 한강의 작품 중에는 [소년이 온다]라는 장편소설도 있는데, 사실은 이 책이 더 좋다는 말을 듣고 그때 함께 읽었었다. 덕분에 (이런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뜻하지 않은 피서를 하게 됐는데, 어떻게도 자제하기 어려울 것 같은 감정을 최대한 억누른 채 지극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담담하게 써나간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마치 납량특집이라도 보는 것처럼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소설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소년과 그 주변사람들의 고통을 통해 5.18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폭동을 일으킨 폭도로 몰려 몽둥이찜질에, 대검에, 심지어는 총질까지 당하는 광주 시민들. 그것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행위를 벌이는 상대가 바로 우리나라 군인들이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공할 일이었다.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었던 잔혹하기 그지 없는 혼란 속에서 병원이며 학교 건물로 피투성이가 되어 옮겨졌다가 생명이 다하면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가는 숱한 주검들. 트럭엔 켜켜이 쌓인 시체들이 가득했다는 것이 너무도 소름끼치고 끔찍해서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 [26년] 또한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어떤 장면이 펼쳐지리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엄두가 안 난다.

 

택시운전사 송강호를 통해 본 '때린 놈이 발 뻗고 사는 세상'

 

그에 비하면 10만원이라는 큰돈을 준다는 말에 혹해서 외국인 기자를 가로채 태우고 룰루랄라 광주로 향하는 택시운전사 만섭(송강호)이 그려내는 영화 [택시운전사](장훈 감독)는 일단은 그리 무겁지만은 않다. 여느 날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하루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소설가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에서나 느낄 법한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10만원을 벌 수 있게 된 행운이 오히려 크나큰 고통으로 이어지는 불행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영화 중간중간에 삽입된 끔찍한 장면들이 오히려 눈을 질끈 감고 싶도록 더 잔혹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고 그런 하루의 일상이 그 날의 광주 실상의 핏빛과 대조되어 더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이 오소소 돋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가공할 일은, 그 며칠 동안 광주 시민들이 직접 겪어야만 했던 실제 상황이 소설이나 영화가 그려낸 것보다 몇십 배, 몇백 배 더 잔인하고 가혹했으리라는 점이다.  

 

 

그 무시무시한 폭력 앞에서 "너 하나 변한다고 뭐가 달라져?", "네가 내려간다고 달라지는 게 뭐야?"라는 말로 그 상황을 회피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택시운전사 송강호를 비롯해서 다른 수많은 광주 시민들은 "나 한 사람의 힘이라도 합치려고" 그 상황에 기꺼이 동참한다. 

 

단지 기자라는 이유로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제발로 사지로 걸어들어온 독일인 외신기자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의 몸을 사리지 않는 기자정신도 참으로 놀랍다. 한 방울의 모여 바다를 이루듯, 세상은 그렇게 "나 하나쯤이야"가 아닌 "나 한 사람이라도"라는 마음자세를 가진 사람들의 힘으로 이어져 가는 것 같다.

 

 

사실 부당함에 대항하지 못하는 침묵은 나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 법이다. 히틀러의 나치가 유태인을 학살할 때도 독일 국민들이 유태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교류하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그렇게 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침묵을 선택하자 그들은 유태인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도 잡아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어서 노동운동가와 가톨릭 교도, 기독교인도 잡아갔고, 마침내는 가까운 이웃이 잡혀갔는데, 그럴수록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더욱 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때 반(反)나치운동가 마틴 니묄러 목사는 침묵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런 시를 썼다고 한다. [나는 침묵하였다]라는 제목의 시다.

 

어느 날부터 내 이웃들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다.
나는 그들이 뭔가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친구들이 잡혀갔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침묵했다.
나는 내 가족들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하지만 이미 내 주위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를 위해 이야기해 줄 단 한 사람이.

 

나만은 살아남아보겠다고 선택한 침묵은 결국 내게 위기가 닥쳤을 때 누구 한 사람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은 셈이다. 하지만 택시운전사 만섭은 침묵하지 않았고, 외신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도 침묵하지 않았으며, 광주 시민들도 침묵하지 않았다. 하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바로 나 자신이고 내 피붙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무조건 침묵할 수만은 없으리라. 

 

 

불행이 진정한 친구인지 아닌지는 가려준다는 말도 있듯이, 이 천재지변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난리 앞에서도 우리는 그가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가려낼 수 있을 것 같다.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내뺀 후 꼭꼭 숨어드는 사람, 처음엔 심드렁하다가 돌입하는 사람, 처음엔 열일하다가 숨어버리는 사람, 시종일관 참여하는 사람 등.. 어느 유형의 사람이 옳다 그르다..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분별해서는 안 되겠지만, 적어도 광주 시민들은 침묵하지 않고 힘을 합쳐 목숨을 걸고 그 끔찍한 상황을 이겨냈다. 물론 그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말이다.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 얼마나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뜨렸던가. 그리고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를 뿐이라며 자국의 시민들을 개패듯 두들겨패고 대검을 휘둘렀던 그 군인들. 그들은 이제까지 어떤 심정으로 살아왔을까? 그들도 피해자였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당시의 기억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고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다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게 잘 먹고 잘사는데 별걱정을 다하는 것일까?

 

아무튼 이래저래 국민들은 그저 피해자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대통령을 적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가슴아플 뿐이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기는커녕 뻔뻔스러운 얼굴을 잘도 쳐들고 다니는 가해자들을 보면,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발 뻗고 못 잔다"는 속담도 이젠 "맞은 놈은 발 못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발 뻗고 잔다"로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영화 속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 하나가 당시 군인들에 대한 미움을 잠시 접게 해준다. 광주의 처절한 실상을 카메라에 담은 위르겐 힌츠페터와 잘 알지도 못하는 산길을 택해 서울로 도망가는 송강호는 외국기자와 서울택시는 무조건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은 군인들의 마지막 검문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때 택시 트렁크에서 서울택시 번호판을 보고도 모르는 척 통과시켜 준 군인이 있었던 것이다. 영화를 볼 때는 장훈 감독이 만들어낸 픽션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진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그냥 통과시켜 줘"라고 말하면서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던 선한 눈망울. 그 군인이 영화 [밀정]에서 일본 경찰 하시모토 역을 맡았던 엄태구였다는 것은 영화를 보고 와서야 알았다. 엄태구는 [밀정]에서도 송강호와 대립각을 세웠는데, 이 [택시운전사]에서도 송강호와 강렬한 만남을 갖는다. 다만 [택시운전사]에서는 송강호를 극적으로 도와주는 역을 맡았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동일인물이 어떻게 이렇듯 달라보일 수 있을까? [밀정]의 엄태구는 독사 같아 보이는데 [택시운전사]의 엄태구는 사슴 같아 보이니 말이다.(ㅎㅎ) 흔히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들 하지만, 위 두 개의 사진 속 인물을 비교해 보면 40까지 가지 않아도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극명한 차이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상, 택시운전사 송강호를 통해 본 '때린 놈이 발 뻗고 사는 세상'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3년 제2회 송건호 언론상을 받은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는 “내 눈으로 진실을 보고 전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용감한 한국인 택시운전사 김사복 씨와 헌신적으로 도와준 광주의 젊은이들이 없었다면 다큐멘터리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