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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옥자 그 많은 돼지들이 처절하게 죽어가는데 옥자만 구해내면 되나?

 

옥자 그 많은 돼지들이 처절하게 죽어가는데 옥자만 구해내면 되나?

 

 

갖가지 화제몰이를 하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를 보고 있노라니 지난해 여름 요즘처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토요일, 외부에 볼일이 있었음에도 거실에 누워 시원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몰입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채식주의자]는 맨부커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큰 주목을 받았었는데, 노벨문학상, 공쿠르문학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으로 손꼽히는 터여서 다들 들뜬 분위기였다. 

 

책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사료는 적게 먹고, 배설물은 적게 만들어내고, 고기는 더욱 맛난, 즉 효율성이 뛰어난 슈퍼돼지 생산 프로젝트의 희생양이 된 옥자를 둘러싼 스토리가 펼쳐지는 영화 [옥자]를 보고 후기를 쓰려다 보니 1년 전에 읽었던 [채식주의자]가 저절로 떠올랐다. 별다른 특징이라곤 하나도 없는 아내, 아내의 그런 무미건조함이 오히려 마음에 들어서 결혼했다는 남편이 화자로 등장하는 이 소설에는 어느 날 붉은 피가 뚝뚝 흐르는 살코기를 먹는 끔찍한 꿈을 꾼 후부터 고기 먹기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아내가 등장한다.

 

남편과 가족으로부터 고기 먹기를 강요당하자 스스로 손목을 긋는 자해까지 하는 아내의 모습이 어찌나 실감나게 다가왔던지, 그 책을 읽은 후 한동안 육식이 꺼려졌고, 실제로도 예전보다는 고기를 덜 먹게 된 것 같다. 아주 잠깐이지만(?)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혹은 맛있는 살코기를 먹기 위해 엄연한 생명체가 죽어야만 한다는 현실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고 말이다. 물론 나 한 사람이 고기를 덜 먹거나 안 먹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작가의 생생한 글에, 그러니까 주인공이 고기 먹기를 죽어라 싫어하는 마음을 깨알같이 적어나간 글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았던 듯하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고전적 명언이 새삼 힘을 발휘한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채식주의를 고수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옥자 그 많은 돼지들이 처절하게 죽어가는데 옥자만 구해내면 되나?

 

영화 [옥자]를 보고서도 잠시 육식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육된 동물들도 그럴지언대 하물며 가족처럼 동고동락해 온 동물이라면, 그것이 고기로 변해 사람들의 식탁에 오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일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런 일이 세계적 친환경 대기업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CEO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에 의해 조직적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희생양 중 하나인 슈퍼돼지 옥자와 10년여를 친구처럼 또 가족처럼 지내온 미자(안서현)는 프로젝트 완성을 위한 축제에 참여시키고자 뉴욕으로 데려간 옥자를 구출해 내기 위해 할아버지(변희봉)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무작정 위험천만한 여정에 나선다. 

 

여기에 동물해방전선이라는 비밀동물보호단체 ALF까지 합세하여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쟁투가 벌어진다. 미란다 기업도, 동물해방전선도, 외면적으로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일을 해내기 위해 다른 사람이나 동물을 이용하려 한다는 점은 다를 바가 없다. 그러기에 동물해방전선의 멤버들이라면 옥자를 구출해 내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함에도 옥자의 귀에 비디오를 장착해 고기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들여보낼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명분은 옥자를 통해 더 많은 동물학대의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결국은 옥자를 이용해 자신들의 신념을 만방에 알리고자 함이다. 흔히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말들을 하곤 하지만, 그 소 또한 엄연한 생명임을 생각한다면 아무리 의미가 큰 일이라도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될 텐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물해방전선의 맴버들 역시 미란도 기업의 루시 미란도와 닮음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란도의 CEO 루시 미란도다. 화학회사로 시작한 미란도를 환경친화적인 기업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마케팅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인물로 나온다. 카메라 앞에서는 오직 고객만을 위한다며 환한 미소를 짓지만 그 이면에는 기업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탐욕을 숨기고 있는 여인이다. 게다가 가혹하리만큼 비정한 아버지와 언니에 대한 트라우마까지 있어서 기필코 자신의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비정상적일 만큼 집착한다.

 

어느 분야에서든 리더의 이런 비정상적인 행태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곤 하는 법이다. 예를 들어 전쟁광인 리더가 뚜렷한 신념도 없이 그저 자신의 어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 희생양이 되어 고통받는 것은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다. 루시 미란도가 효율성을 극대화시킨 슈퍼돼지 생산의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도 결국은 언니에게 보란 듯이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는데, 그로 인해 죄없이 고통받는 것은 바로 옥자와 미자다.    

 

 

봉준호 감독이 [옥자]를 통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은 그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저토록 어수선하고 과장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갔어야 했나 하는 것이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어른 옷을 입히고 한바탕 연기를 해보라고 시킨 느낌이랄까. 특히 아무리 오랜 세월 미자와 친구나 가족과도 같은 감정을 나누고, 제 몸을 날려 미자의 목숨까지도 구해줄 만큼 영리한 옥자라 할지라도, 오직 옥자만 구하면 된다는 각오로 미자가 앞뒤 가리지 않고 강원도 산골에서 서울로, 심지어 뉴욕까지 달려간다는 설정은 꽤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옥자가 끌려간 공장에 들어가서도 옆에서 연신 돼지들이 처절하게 죽어나가는데도 옥자만 찾기에 바쁜 미자, 그리고 기어이 구출해 강원도로 데리고 와서도 아무 여념 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옥자를 바라보는 미자에게서 여느사람과 다를 바 없는 이기심이 느껴져 좀 씁쓸했다. 남을 이용해서든 혹은 희생시켜서든 오직 제 것만 챙기면 된다는 인간의 속성은 루시 미란도나 동물해방전선의 멤버들이나 미자나 전혀 다를 게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묘하게 삐딱한 시선으로 보게 된 [옥자]였다.  

 

이상, 옥자 그 많은 돼지들이 처절하게 죽어가는데 옥자만 구해내면 되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