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홍길동 부패한 권력에 맞선 무수저
몇 년 전 강원도 여행 중 강릉에 있는 허난설헌 생가를 찾은 적이 있다. 허균과 허난설헌이 오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허난설헌의 생가터에는 허난설헌보다 허균에 관한 자료가 더 많이 전시돼 있었다. 그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작가로만 알고 있었던 허균의 생애를 그곳에서 접하고 잔잔한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먼저 놀라웠던 것은 허균의 가문이 그 부근에서는 대단한 권세와 부, 그리고 지식을 갖추었다는 점이었고, 그보다 더 놀랐던 것은 이른바 대가집 자제인 허균이 마을 무지랭이 청년들이나 머슴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음으로 양으로 돕는 역할을 했었다는 점이었다. 아무것도 남부러울 게 없는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본인만 곁눈질을 하지 않는다면 한평생 평온한 삶은 보장됐던 셈인데, 그는 그 기득권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못 살고 못 배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인간미가 넘치는 관심과 배려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했던 허균이었기에 그가 꿈꾼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홍길동이라는 의적을 내세운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겠다 싶었다. 이 소설에는 당시 사회제도의 모순, 특히 적서(嫡庶)의 신분차별 타파와 정치개혁을 주제로 한 영웅소설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홍길동 부패한 권력에 맞선 무수저
개혁사상가 허균의 소설의 주인공 홍길동의 생애를 그린 팩션 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홍길동]이 시작된다고 해서 기대를 해본다.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홍길동]을 소개하는 서막에서 역사강사 설민석은 <부패한 권력에 맞선 흙수저가 바로 홍길동>이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홍길동은 흙수저도 못 되는 무수저였다는 생각이 든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 부, 지위 등의 계급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절대로 고칠 수 없는 인간들의 속성일까. 사람들만 바뀔 뿐, 그 사람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추태는 세상이 바뀌어도 전혀 변하질 않는 것 같으니 말이다.
황진영 작가는 이 드라마를 통해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 속 의적 홍길동이 아닌, 연산군 시대에 실존했던 인물 홍길동의 삶을 재조명하면서 폭력의 시대를 살아낸 인간 홍길동의 삶과 사랑, 투쟁의 역사를 밀도있게 그려낼 예정이라고 한다. 임금임에도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한 연산군(김지석)과 씨종의 자식임에도 민심을 얻는 데 성공한 홍길동(윤균상)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도 짚어내겠다고 한다. 씨종이란 대대로 종노릇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런 대물림에 의해 태어나면서부터 평생의 삶이 정해진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울분에 찬 세월을 보내야 할까.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홍길동]이 시작되기 전에 주요 등장인물인 홍길동과 홍길동의 아버지, 그리고 당시 왕으로 군림했던 광기의 연산군에 관한 소개를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것과 김상중과 설민석의 <두 남자의 역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정리해 보았다. 다른 등장인물들도 차차 알아볼 기회가 있겠지만, 홍길동은 윤균상, 홍길동 아버지는 김상중, 연산군은 김지석이 맡았는데, 캐스팅만으로도 흥미를 돋구기에 충분한 듯하다.
■ 김상중 홍길동의 아버지 아모개
씨종의 신분으로 주인집에서 종살이를 하는 아모개. 씨종으로 나고 자라 이름도 아무렇게나 지으라고 해서 얻은 이름이 바로 아모개다. 아모개는 우연한 기회에 아들 길동이 범상치 않은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전설로만 내려오는 아기장수라는 인물이 바로 길동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 아기장수가 양반들에게서 나오면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지만, 천한 노비들에게서 나오면 말 그대로 재앙을 일으키는 인물이라고 해서 가차없이 죽여버린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아모개는 아들 길동의 비범한 능력을 숨기기로 한다.
천한 신분 때문에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아모개. 주인집에서 모진 핍박을 받는 가족들을 그저 바라봐야만 하는 그에게 변화의 순간이 찾아온다. 아들 때문에 어떻게든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자식을 지키려고 하는 처절한 아비가 되어 강한 아버지로의 변화를 시작한 것이다.
■ 윤균상 홍길동
홍길동은 조선 건국 백 년 만에 나타난 역사(力士)다.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홍길동의 비범한 능력에 관한 이야기를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연산군 일기 중 “듣건대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라는 글이 실려 있는데, 연산군 6년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삼정승이 도적 홍길동을 잡은 것을 전하며 기쁨을 금할 길 없다는 표현이랄지, 중종실록 중 “길동의 예를 따라 금부에서 추국하라”는 글귀에서 보듯이 홍길동은 의금부 감옥에 따로 격리하여 취조된 것을 보면 그의 존재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의금부란 오늘날의 국가정보원 특수 취조실 정도 되는 곳인데, 홍길동을 의금부에서 다루었다는 것은 국가를 뒤흔든 도적이자 대단한 인물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왕의 입장에서는 역적이지만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영웅이었던 것이다.
길동은 평생 자신을 압도했던 아모개의 아들이라는 족쇄를 넘어 굶주린 자들의 형제, 힘없는 자들의 동아줄이자 구원자, 조선 최초의 혁명가이자 반체제 운동가, 500년을 살아남을 불멸의 이름이 된다.
■ 김지석 연산군
조선 10대 임금. 빼어난 시인이자 무희, 정치인. 성악설을 신봉했던 희대의 살인마다. 23세라는 어린 나이에 무오사화를 통해 왕권을 강화시키며 정치적 역량을 증명해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연산은 자신이 실패의 길로 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왜 연산은 불통의 군주, 잔인한 독재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까?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는 연산이 6세 되던 해에 아버지 성종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어머니의 정도 느끼지 못하고 자란 외로운 연산이었다. 기댈 곳 없는 궁궐 안의 외톨이가 연산은 왕이 되면서 잔인한 폭정과 독재의 시대를 연다.
그 후 연산은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려 몸부림치고, ‘능상'(凌上.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김)을 가장 두려워하는 인간이 되어간다. 결국 연산은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자신에게 속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여기는 자들을 ‘능상’이란 죄목을 붙여 처벌함으로써 장차 조선에 ‘능상’이라는 이름의 피바람을 불러오고. 결국 ‘능상 척결’이 불러온 광풍은 길동을 깨우게 된다.
이상,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홍길동 부패한 권력에 맞선 무수저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