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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나폴레옹을 닮은 현대인물 5인..칭기즈칸 히틀러 모택동 처칠 오바마

 

나폴레옹을 닮은 현대인물 5인..칭기즈칸 히틀러 모택동 처칠 오바마

 

 

역사상 최고의 장군으로 일컬어지는 나폴레옹은 평생이 위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치열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린시절부터  그의 삶은 투쟁과도 같았습니다. 그를 가로막는 것은 언어, 문화, 공부, 전쟁 등 다양했고, 그는 끊임없이 이런 시련들과 맞서싸워 마침내 화려한 비상을 합니다.

 

[화려한 비상을 꿈꾸어라]의 저자 조희전은 나폴레옹과 클레오파트라의 삶에서 현대인들이 취해야 할 지혜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있는데, 이 중 나폴레옹만큼이나 치열한 삶을 살았던 점에서 유사한 면이 있는 [나폴레옹 닮은 현대인물 5인..칭기즈칸 히틀러 모택동 처칠 오바마]의 생애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후세에도 여전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도 있지만, 화려한 비상을 위해 누구보다도 치열한 삶을 살았던 5인을 통해 그 비상의 비결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칭기즈칸

나폴레옹을 닮은 현대인물 5인..칭기즈칸 히틀러 모택동 처칠 오바마

 
12~13세기 테무진, 즉 칭기즈칸의 삶은 유라시아의 광활한 초원에서 시작됐다. 그가 속한 부족은 나무도 없는 황무지를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이었다. 그래서 그는 글을 몰랐다. 쉽게 말해 야만인이었다. 기약할 수 없는 이동과 끊임없는 전쟁, 잔인한 약탈이 그가 배울 수 있는 세상 일의 전부였다. 절망조차 허락하지 않는 그 현실을 칭기즈칸은 극복해 냈다.


테무진은 의형제 자무카 무리와 함께 생활하며 안정을 찾았지만 1181년 자무카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2세 때 옹 칸의 승인 아래 전통적인 씨족, 부족회의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칸의 칭호를 차지했다. 칸이 된 테무진은 부족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원칙을 정했다. 그것은 자신의 친척이건 아니건 능력있는 사람을 높은 자리에 앉힌다는 원칙이었다. 당시 초원에서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옹 칸과 함께 타타르 원정에 나선 테무진은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테무진은 자무카와 옹칸을 모두 물리치고 초원에 살던 부족을 하나로 통일했다. 이때 그의 나이 43세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여러 부족 대표자들의 회의인 쿠릴타이를 열었는데, 초원 역사상 가장 크고 중요한 쿠릴타이였다. 여기서 테무친은 정식으로 초원에 사는 모든 백성을 다스리는 몽골제국의 지배자가 되었고 '위대한 왕'이라는 뜻인 '칭기즈칸'으로 불리게 되었다. 칭기즈칸은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도록 새로 법을 만들어 널리 알렸다.

 

칭기즈칸은 몽골제국에 저항하지 않은 민족은 지금까지 살던 대로 살게 해주고 종교도 그대로 믿게 했다. 대신 중요한 길목마다 역을 만들어 기병이 말을 갈아타며 칸의 명령을 나라 구석구석으로 전하게 했다. 이 길을 통해 문명이 전파되기도 했다. 몽고의 초원에서 태어나 칭기즈칸처럼 큰 나라를 만든 영웅은 일찍이 없었다. 아직까지도 칭기즈칸은 몽골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 히틀러

 

1921년 7월 히틀러는 군중을 선동하는 비범한 능력으로 나치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1933년 1월 30일 제 1당인 나치당의 당수로서 총리에 임명됐다. 이 날을 가리켜 '비극의 탄생'이라고 해도 될까? 히틀러의 나치 독일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총리가 된 지 수년 만에 독일 국민은 히틀러에게 열광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분명한 목표를 정해두고 총리가 되었는데,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고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잃어버린 조국 땅을 되찾고, 유럽을 포함한 러시아까지 무력으로 합병하는 것 등이었다. 거기에다 어려서부터 체질화된 광적인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현실화되었다.

 

히틀러는 획일화 정책을 통해 독일 국민을 광장에 모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패닉상태를 헤매던 독일 경제는 호전되고 있었고, 600만 명의 실업자들은 거리를 헤매다가 대부분 군대와 직장으로 돌아갔다. 국가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아우토반이 건설되었고, 비틀 자동차가 생산되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 결과 자국을 옥죄던 베르사유 조약을 능멸하면서 군비를 증강해 나갔다. 하지만 그가 전쟁을 도발하면서 세웠던 목표는 거의 다 실패로 돌아갔다. 폐허가 된 독일. 세계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대신 전 영토와 경제적 기반, 국력, 독립, 도덕성마저 잃어버렸다. 

 

히틀러는 연설할 때 강력한 웅변술을 구사하고 단순한 사상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청중을 거의 최면상태에 빠뜨렸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했다. 그는 애국심에 호소했고 독일 국민이 나아갈 길은 아리안이라는 하나의 민족을 독일에 되돌려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 불행의 원인을 유대인에서 찾았다. 유대인은 마르크스주의자와 볼셰비즘을 전개했으며, 교활한 자본주의 힘까지 더해 지구상의 민족들을 정복하고 파멸시키려고 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이 믿음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까지 내달린 결과 오늘날까지도 히틀러는 상처로 남아 있다.

 

 모택동

 

모택동은 중국 현대사를 연 인물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의 삶이 화려한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모택동의 아버지는 아들을 농사꾼으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모택동은 수호지나 삼국지 같은 영웅들 이야기가 담긴 책만 읽었다.

 

이렇듯 환경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지만 그는 새로운 시대를 꿈꾸고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그는 학교를 다니기보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지냈다. 떡을 하나 싸가지고 가면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모택동의 사상은 여기에서 싹튼 것이다. 그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다. 덕분에 정치학 , 경제학, 세계사 등 여러 분야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그는 철학 공부에도 힘썼는데, 철학을 두루 읽고 연구회에 나가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모택동은 국민당과 합작해 일제를 물리쳤고 국민당을 내쫓고 중국대륙을 통일했다. 모택동의 리더십은 대장정에서 빛을 발하는데, 국민당과의 전투에서 12000킬로미터를 이동한 것이다. 그는 공산당 혁명을 통해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마침내 대륙의 붉은 별로 거듭난 것이다.

 

 윈스턴 처칠

 

BBC에서 시청자 백만 명을 조사한 결과 가장 위대한 영국인 1위에 꼽힌 윈스턴 처칠이 위대한 것은 그의 리더십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그렇게 잘나간 것은 아니었다. 처칠은 어렸을 때는 저능아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독서교육을 시켰다. 하루 5시간은 공부하고 2시간은 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독서를 시작했고, 각종 어려운 책들을 한 권씩 독파해 가기 시작한다. 그는 머리와 몸의 균형을 이루었고, 두뇌가 트이면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된다.

 

처칠은 두 번이나 떨어진 끝에 사관학교에 가는데, 들어갈 때는 꼴찌였지만 졸업할 때는 8등이었다고 한다. 군사학이 그의 성격에 꼭 맞았던 덕분이다. 처칠은 군인으로서 능력을 발휘했으며, 여러 전투에 참여해 값진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그는 종군기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가 참전했던 보어 전쟁에서는 포로가 되기도 했는데 탈출하면서 일약 영국의 영웅이 된다.

 

한편 그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터라 글을 써서 돈을 벌었는데 나중에 2차 세계대전의 회고록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틈틈이 그림을 그리던 아마추어 화가였다. 그는 절대 포기를 몰랐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연설이 유명하기도 했다. 그의 연설은 직설적이고 간결했으며 유머를 사용하고 많은 연습을 했기에 뛰어났다. 그는 수상이 되어 성공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끌었으며 히틀러와 맞서 싸워 값진 승리를 거두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하와이주의 호놀룰루에서 케냐 출신의 하와이대학 유학생인 흑인 아버지와 미국인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버락 오바마는 부모의 이혼과 재혼, 그리고 다인종·다민족·다문화 가정에서 자라면서 술과 담배와 마약에도 손을 대는 등 불우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관용과 화합을 배우게 되었다.

 

대학시절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되어 마약을 끊고 학업에 정진한 그는 대학 졸업 후 잠시 컨설팅회사에서 일하다가 사회운동에 투신하여 시카고 빈민가에서 주민들의 주거와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데 헌신했다.

 

1996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후 상원의원에 세 번 당선되었다.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진보와 보수, 인종 차별이 없는 하나의 미국을 지향하여 불안 속에서도 담대한 희망을 갖자고 역설하여 전국적 명성을 얻었고, 그해 흑인으로는 유일하게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2007년 2월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 투쟁을 선언한 장소인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는 집권 후 16개월 안에 상원의원 시절부터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반대해 온 이라크 전쟁에서 철군할 것과 전국민 건강보험 혜택을 비롯하여 대학 교육비 절감,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세제 개편 등 사회복지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대 북한 정책에서도 전임 부시 정부와 달리 직접 협상 등 적극적 개입으로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킬 것 등을 제시했다.

 

유권자들에게 '변화)'와 '우리는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다가서면서 흑인뿐 아니라 백인들에게도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2008년 11월 4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존 매케인 후보의 2배가 넘는 선거인단을 확보해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2009년 1월 20일에 제44대 미국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즉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 된 것이다.

 

취임 후 이전 부시 정권의 일방주의 외교정책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중동평화회담을 재개하는 데 힘쓰고 핵무기 감축, 대화와 타협을 통한 국제분쟁 해결, 기후변화 대응 등에 노력한 그는 연임에 도전, 재선에도 성공한다. 얼마 전 많은 국민들의 아쉬움 속에 퇴임을 한 그에게 노벨문학상 수상자 토니 모리슨은 “오바마는 지성, 청렴성, 진정성 등을 두루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상, 나폴레옹을 닮은 현대인물 5인..칭기즈칸 히틀러 모택동 처칠 오바마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