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미 그린 달빛 조선시대 내시의 역할과 신분
구르미 그린 달빛 조선시대 내시의 역할과 신분
효명세자 이영(박보검)과 남장내시 홍삼놈(김유정)의 팩션사극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지난회에서 홍삼놈이 바로 홍경래의 딸인 홍라온이라는 것이 밝혀져 긴장감을 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내시부의 관원 전체를 감독, 통솔하는 내시부사 한상익(장광)이 홍경래를 돕는 백운회 수장이라는 정체가 드러나 앞으로 어떤 전개가 펼쳐질지 흥미를 돋구고 있습니다.
[구르미 그린 달빛]에는 상선 장광 외에도 막강한 내시 군단이 등장하는데, 동궁전 최장 근무 기록을 보유한 장내관(이준혁), 중궁전의 성내관(조희봉), 원칙주의 내시교육관 마종자(최대철)을 비롯해 홍삼놈의 동기 도기(태항호) 등이 그들입니다. 드라마 초반에서는 그 동안 역사극에서 빠짐없이 등장하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내시들의 활약이 꽤나 흥미있게 전개될 것으로 보였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크게 돋보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구르미 그린 달빛] 홈피에 올라 있는 내시들을 소개하면서 [조선시대 내시의 역할과 신분]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았습니다.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한상익(장광) 내시부의 카리스마 넘치는 수장. 관원 전체를 감독·통솔하는 내시부사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 조선시대 내시의 역할
조선시대의 내시(內侍)는 고려시대의 내시와 그 역할과 신분이 달랐다. 고려때의 내시는 가문과 학식, 재능과 용모를 갖춘 엘리트 집단으로 과거급제나 음서(蔭敍)로 벼슬에 오른 문벌집안의 자제, 전쟁에 나가 군공(軍功)을 세웠거나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이 주로 발탁됐다. 이들은 왕에게 경서를 강의하거나 국가의 기밀 관장 및 국정 전반에 걸친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고려 후기에 들어서면서 천민 출신자들이 대거 진출하는 바람에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조선시대의 내시는 궁궐 내 잡무를 맡아보던 내시부의 관직을 일컫는다. 내시부의 임무는 궁중 내 음식 전반에 대한 감독, 왕명 전달, 궁중 문 지키기, 궁궐 내 청소 등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궁중의 제사부터 왕실의 재산 관리. 궁실의 각종 공사, 궁녀의 감독에 이르기까지 궁중 내 모든 대소사를 맡아했다.
■ 내시의 품계와 규모
내시부(內侍府)의 정원은 16개 관직에 140명이었다. 국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권신의 위치를 확보한 경우가 많았고, 특히 고려말 원(元)을 배경으로 왕의 측근에서 권력을 잡아 정치에 간섭하거나 대토지를 소유하는 등 정치적·경제적 질서를 문란케 한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내시가 득세하지 못하도록 억제해서 정치에도 관여하지 못했으며 주어진 소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법전에 의하면, 내시는 종2품의 품계까지만 올라갈 수 있었고 4품 이하는 문·무관의 근무일수에 따라 품계를 올려주되 3품 이상은 왕의 특별한 명령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종2품이 되어도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없었으며, 종4품 이하는 체아직(遞兒職)이라고 하여 돌려가면서 관직을 제수받았다. 즉 조선시대 내시의 역할은 품계의 고하를 막론하고 궐내 음식물 감독, 왕명 전달, 궐문 수직, 청소 등의 잡무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렇게 지위가 하락하고 실세가 축소된 반면 의무 규정은 더욱 강화되었는데, 내시들은 관리로서의 자질 향상을 위해 <사서(四書)>와 <소학>, <삼강행실> 등을 주요 교과목으로 교육받아야 했고, 매달 시험을 치러야 했다. 이렇게 교육을 철저히 한 것은 자질 향상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내시는 왕의 측근으로서 궐내에 상주해야 하는 특수성 때문에 거세자만이 임명될 자격이 있었다. 본래 선천적인 거세자가 주된 충원 집단이었으나 스스로 거세해 내시로 임명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려의 내시는 성격이나 신분이 완전히 달랐다. 고려 때는 내시와 환관이 별도로 나뉘었고, 고려 내시는 거세하지도 않았다.)
■ 내시와 환관의 차이
내시를 환관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내시는 성 상실과는 관련 없는 관직을 이르는 데 비해 환관은 거세된 채 관직에 있는 사람을 이른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환관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궁중 잡역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고려 말기부터 국왕 측근에서 시종하는 문관인 내시(內侍)에 속하는 이들도 생겨남에 따라 환관과 내시가 동일시되었다. 본래 고려시대에는 숙위 혹은 근시(近侍) 관원이었으나, 고려 말 환관들이 내시직에 많이 진출하여 환관을 의미하는 용어가 된 것이다.
이러한 환관은 종종 군주의 최측근으로 총애를 받으며 권력을 잡고 정세를 어지럽혔다. 조선시대에는 연산군 때 환관 김자원이 전횡을 일삼으며 왕명의 출납을 악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제지술을 개발한 채륜이나 연산군의 폭정에 굴복하지 않았던 김처선처럼 의로운 환관들도 있었다.
흔히 내시들이 주로 궁궐에서 생활하다가 생을 마쳤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들도 일반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궁궐 밖에서 일반 사대부나 평민과 마찬가지로 아내와 자녀를 두고 결혼생활을 했으며 양자를 두어 대를 이을 수 있었고, 족보도 만들었다. 내시의 아내는 평민뿐 아니라 왕실과 줄을 대려는 양반 사대부 가문의 규수도 많았다.
이러한 내시제도는 갑오개혁을 계기로 폐지되었다. 그리고 내시가 공식적으로 이 땅에서 사라진 것은 한일합방 전인 1908년이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모든 관부를 없애면서 내시부도 폐지된 것이다.
이상, 구르미 그린 달빛 조선시대 내시의 역할과 신분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