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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미 비포 유 보완과 상생의 삶, 그리고 존엄사

 

미 비포 유 보완과 상생의 삶, 그리고 존엄사

 

 

예전에 자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머리는 그닥 좋지 않지만 외모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 여인이 있었다. 누구할 것 없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가진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더 매력을 느끼는 법인지라, 이 여인도 외모는 별볼일없지만 머리는 기가 막히게 좋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혼까지 하고 싶어하는 그녀에게 그가 도무지 관심을 보이질 않자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와 <남자의 뛰어난 머리>를 합치면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머리를 가진 2세>가 태어나지 않겠느냐는 말로 은근한 청혼을 했다. 하지만 남자는 만일 <그녀의 똑똑하지 못한 머리와 자신의 못난 외모를 가진 2세>가 태어나면 어떡할 거냐며 딱잘라 거절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주변에 보면 신기하게도 자녀가 부모의 좋은 점만 닮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닮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만 닮아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키는 작지만 눈이 유난히 예쁜 엄마와 키는 크지만 눈이 유독 작은 아빠 사이에서 이왕이면 부모의 좋은 점만 빼닮아서 키도 크고 눈도 크게 태어나면 좋으련만, 반대로 키도 작고 눈도 작아서 실망시키는 경우다. (예를 들려다 보니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지 외모 지상주의를 부추기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는 역시 누군가의 부족한 점을 또 다른 누군가의 장점이나 강점으로 보완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 여느사람들의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적은 힘이라도 합치고 뭉치는 상생의 삶이 아니고서는 이 고달픈 인생을 살아내기가 참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서로 돕고 부족한 점은 채워가면서 살아가고 있다. 보완과 상생의 삶인 것이다. 

 

미 비포 유 보완과 상생의 삶, 그리고 존엄사

 

영국을 무대로 한 테아 샤록 감독의 영화 [미 비포 유](Me before You)의 두 주인공, 루이자(에밀리아 클라크)와 윌(샘 클라플린)도 그렇게 살면 좋을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누구보다도 건강한 몸과 정신을 가지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여인과 경제적으로는 자유롭지만 몸도 마음도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남자가 보완과 상생의 삶이 아닌 죽음으로 이별을 맞기 때문이다.

 

만능 스포츠맨으로 촉망받는 젊은 사업가였던 윌은 뜻하지 않은 오토바이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채 지난날 한없이 빛났던 자신의 삶만을 그리워하며 까칠하고 비틀린 마음으로 현재의 삶을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그는 슬퍼하는 부모를 설득해 존엄사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그에게로 6년 동안이나 일하던 카페가 문을 닫는 바람에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루이자가 6개월 계약으로 간병인으로 오게 되면서 일어나는 크고작은 일들이 잔잔하면서도 유쾌하게 펼쳐진다. 온 세상이 다 자기 것 같았던 충만한 삶을 누리다가 느닷없이 휠체어에 묶인 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해 가는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힘겨웠을까. 거기다 수시로 찾아드는 폐렴에 사소한 감기에도 목숨의 위협을 받는 삶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고 싶어질 만큼 윌을 깊은 절망에 빠뜨린다. 

 

 

까칠하고 비틀린 윌의 조롱을 견뎌내며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한 루이자다. 이 사진은 아주 예쁘게 나왔지만 처음 윌을 만나러 왔을 때의 루이자의 모습은 솔직히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런 자신을 바보 취급하면서 고약하게 구는 윌 때문에 힘겨운 루이자는 남자친구에게 그 고통을 호소하지만 남자친구는 오로지 달리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천진스러운 얼굴로 "난 누굴 싫어해본 적이 없어요"라며 자신을 정성껏 돌봐주는 루이자에게 윌은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윌에게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려고 루이자는 버킷 리스트를 만들고, 윌을 위해 빨간 드레스를 입고 음악회에도 같이 간다. 그리고 점차 가까워져 가는 윌을 자신의 생일파티에도 초대해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낙관론자는 장미나무에서 장미꽃만 보고 비관론자는 가시만 본다"는 칼릴 지브란의 말처럼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보는 초긍정마인드를 가진 루이자는 어쩐지 [응답하라 1988]의 덕선(혜리)을 떠올리게 만든다. 바둑밖에 모르는 택이를 쫓아 중국으로 가서 철딱서니없고 덜렁거리는 듯하면서도 하나하나 세심하게 보살펴주던 덕선의 모습과 흡사한 루이자다.

 

혹은 누구에게든 사랑을 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안톤 체홉의 <귀여운 여인> 올렌카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아무런 계산 없이 진정한 사랑을 주는 이런 타입은 일고여덟 개를 가지고도 열 개를 채우지 못해 불행한 사람들 곁에서 두세 개만 가지고도 충분히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단순계산을 하더라도 인생에서 엄청나게 남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다. (ㅎㅎ) 이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누구든 행복해질 것이다.  

 

 

윌의 옛 여자친구의 결혼식에도 함께 간 두 사람이다. 자신과 결혼하려고 했던 사이였지만 윌의 사고 후 멀어져 간 여친이다. 하지만 루이자의 초긍정마인드에 전염된 윌은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해 옛 여친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줄 만큼 여유로운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날 만나기 전에 무얼 결정했든,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요"라며 루이자는 진심으로 윌을 위한 계획을 세우지만, 윌은 자신의 결심을 철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사는 루이자에게 "대담하게 살아요. 끝까지 밀어붙여요. 안주하지 말아요"라며 경제적인 도움을 선사한다.

 

 

까칠하고 고약한 환자와 초긍정적이고 엉뚱발랄한 간병인으로 만난 두 남녀가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이 영화는 잔잔한 감동을 주는 로맨스/멜로를 표방하고 있지만, 본주제는 윌이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인 <존엄사>에 대한 것이다. 자신의 선택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듯 죽음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또 죽음만이라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종교적 차원에서 창조주가 만들어낸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은 불충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구걸이라도 하듯 목숨을 부지하려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일로 여겨져 견딜 수 없는 사람에게 존엄사는 마지막 숭고한 선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라면 누구보다도 당사자인 윌의 뜻이 가장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몸은 비록 온전치 못해도 정신만은 누구보다도 온전한 삶을 살면서 기쁨을 누리는 행복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으니 안타깝다. 

 

희귀난치병을 가진 자녀를 둔 부모로부터 만일 자기 아이가 이런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깨닫지 못했을 사랑이 자기 마음속에 그득한 것을 알게 되어 오히려 행복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행복의 아이러니는 이처럼 반드시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남들 보기에 불행해 보여도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들이 보기엔 더없이 행복해 보여도 불행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죽음이 두려운 이유 중 하나는 혹여 나중에 마음이 바뀐다 해도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러니 전래동화의 눈이 안 보이는 할아버지가 다리를 못 쓰는 할머니를 업고 할머니가 일러주는 대로 발걸음을 떼면서 길을 나아가는 것처럼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해 나가면서 사는 것도 어차피 태어난 세상을 잘 살아내는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이상, 미 비포 유 보완과 상생의 삶, 그리고 존엄사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