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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계춘할망(윤여정) "가족이 뭐여? 정붙이고 살면 그게 가족이지"

 

계춘할망(윤여정) "가족이 뭐여? 정붙이고 살면 그게 가족이지"

 

 

네 살 때 제주도 주재원으로 간 아빠를 따라가서 살다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다시 서울로 돌아왔으니 꼬박 4년을 제주도에서 산 셈이다. 유아원, 유치원도 제주도 연동에서 다녔고, 태권도 학원이며 피아노, 미술학원도 그곳에서 다니며 현장학습이니 봄소풍, 가을소풍 때에는 제주도 명소를, 여름이면 바닷가를 찾았다. 아무 걱정 없이 즐겁게 놀기만 하면 되었던 어린시절이었기에 마냥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빠를 따라나선 낚시다. 낮에도 갔지만 밤낚시도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나서곤 했었다. 지명을 일일이 외우지는 못하지만, 오징어 낚시를 하던 서부두는 잊지 않았다. 부둣가에 짙은 어둠이 내리면 바다에 던져진 낚싯대에서 반짝이는 불빛만 비치는데, 오징어가 그 빛을 보고 미끼를 물러 오는 거라고 했다. 막 잡아올린 순간 오징어는 신기하게도 완전 투명한 색인데, 얼마 후부터 붉은 점들이 하나씩 둘씩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생겨나다가 나중엔 온통 불그스름한 빛으로 변해간다. 그때의 오징어 모습이 바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오징어다.

 

시내에서 더 차를 타고 들어간 작은 바닷가 마을에 있었던 초가집들도 생각난다. 그 집들은 굵은 밧줄로 칭칭 동여매어진 채 바닥에 단단하게 묶여 있었는데, 왜 집을 저렇게 칭칭 동여매놓았는지 의아해하는 내게 아빠는 바람 때문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바람 때문이라니, 처음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리 없었지만 얼마 안 가서 경험하기 시작한 제주도의 대단한 바람은 그 말뜻을 충분히 깨닫게 해주고도 남았다.

 

계춘할망(윤여정) "가족이 뭐여? 정붙이고 살면 그게 가족이지"

 

명품배우 윤여정과 한창 떠오르는 샛별인 김고은이 출연하는 영화 [계춘할망]은 어린시절을 보낸 제주도를 주무대로 촬영한 것이라고 해서 보러 갔다. 어쩌면 어렸을 때 보았던 제주도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제주도를 떠나온 후 몇 번 제주도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지만, 비록 외지인일망정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았던 때의 제주도와 관광을 위해 돌아보는 제주도는 묘하게 이질감이 느껴진 탓이었다.

 

또 가능하기만 하다면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은 외할머니 손을 잡고 제주도 구경을 했던 추억도 되살려보고 싶었다. 어쩌면 윤여정이 연기하는 [계춘할망]을 보면서 늘 따스한 눈길로 바라봐주던 외할머니의 훈기를 느끼는 순간을 맞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제주도의 수려한 풍광을 무대로 한 [계춘할망]의 스토리 자체는 단순하다. 아빠 엄마를 잃고 홀로 자라는 손녀 혜지(김고은)와 알콩달콩 정답게 살던 계춘할망은 어느 날 함께 시장을 보던 중에 손녀를 잃어버리고, 그 후 매일 시름없는 나날을 보내던 할망에게 12년이나 지난 뒤 손녀가 찾아온다. 그런데 손녀인 줄 알았던 혜지는 사실은 친손녀가 아니어서 실망을 하지만, 그 후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따뜻한 정에 목말라 있던 계춘할망은 계춘할망대로, 또 혜지는 혜지대로 잔잔하지만 진정어린 정을 주고받으며 도란도란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단순한 스토리 속에 흐르는 따스한 느낌은 결코 단순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 피붙이인 친손녀인들 어쩔 것이며 혈연이 아닌 짝퉁손녀인들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같이 밥먹고 같이 잠자고 같이 하루를 보내면서 아프면 걱정하고, 행여 배고플세라 맛난 반찬과 밥을 듬뿍 담은 숟가락을 손녀 입에 넣어주면 되는 거지. 

 

그뿐인가. 유산 때문에 부모가 죽기만을 바라는 패륜아들이 잊을 만하면 튀어나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 혹 부모가 치매라도 걸리면 앗 뜨거라 하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자식들도 심심찮게 나타나는 이 시대에, 무료한 제주도 생활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아 주리를 틀던 가짜손녀 혜지가 기어이 할망 집을 나가버리지만, 계춘할망이 치매에 걸렸다는 말을 듣자 더 멀리 도망가기는커녕 무한정 무조건적인 사랑을 쏟아주던 할망 곁으로 이번에야말로 진짜손녀가 되어 다시 돌아오면 되는 거지.

 

그렇기에 계춘할망도 "피붙이고 뭐고 그런 것 따지고 싶지 않어. 그냥 손지다, 그냥 혜지다 하고 살면 된다고 생각혀"라고 넋두리하듯 혼잣말을 한 것이리라.

 

 

흔히 가족, 특히 혈연의 끈끈한 정을 말할 때 "팔이 안으로 굽는다"거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을 많이 인용하곤 한다. 하지만 그런 속담이 말 그대로 팔이 안으로 굽어도 얼마든지 괜찮다거나 피는 물보다 진하니 자기 가족들만 챙기는 게 당연하다거나 하는 의미를 굳히는 데 사용돼도 좋다는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니 바깥쪽으로도 구부려볼 수 있어야 한다거나,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니 일부러라도 물 쪽에도 관심을 좀 기울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게 더 옳은 해석일 게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혈연과 비혈연인 사람들에게 이중잣대를 들이대 제 가족이라면 잘못한 것도 무조건 감싸고 돌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잘한 일도 손가락질하기가 일쑤다. 그리고 더 묘한 것은 그토록 지나칠 만큼 혈연에 연연하면서도 정작 혈연간 다툼은 물론 패륜적인 범죄가 끊이질 않는 것 또한 우리나라라는 것이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 돈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게 된 점, 또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 한들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너무 깊이 관여하는 데서 오는 싫증 등이 갖가지 형태로 드러나는 것일 테지만 말이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계춘할망]의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조카 내외 석호(김희원)와 명옥(신은정)이다. 특히 주로 악역을 맡아왔던 김희원의 변신이 반갑다. 악역을 맡긴 했어도 카리스마 넘치는 악인이라기보다는 좀 비열하고 꼼수에 능한, 때로는 찌질해 보이기까지 악당 역을 해서 그닥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지 못했던 김희원이지만, 이번에 [계춘할망]에서 보여준 세상에서 가장 착한 남자 역할로 그 동안 영화나 드라마에서 저질렀던 나쁜 짓도 다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을 착하게 먹으니까 매서워보이던 실눈도 다정한 눈빛으로 변하는 것 또한 신기하고 말이다. (ㅎㅎ)   

 

김희원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1930년대에서 1970년대, 아니, 조금 더 길게 잡아서 1980년대까지의 시대상을 그린 우리나라 문학작품에서 많이 보아온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다. 그 글들 속에는 몸을 움직여 돈을 벌 생각은 않고 허구헌날 세상만 한탄하면서 잔뜩 술을 퍼마시고는 애꿎은 아내만 쥐듯 잡아대는 남편도 하늘로 여기고 뜨뜻한 밥을 해다 바치는 아내들이 나오고, 공부를 잘하라고 독려하기보다는 "책 들여다보고 있다고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며 밥상을 걷어차는 아버지도 단지 부모라는 이유로 공경하던 그런 가족들도 있지만, 그런 와중에도 자신은 못 먹고 못 입어도 자식들 배곯을까봐 걱정하는 부모, 가난한 부모 대신 동생들을 떠맡아 먹이고 입히는 장남, 오빠 혹은 동생들 공부시키려고 자신은 밤샘 일을 마다않는 누이 등 피를 나눈 형제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끈끈한 가족애가 있다.

 

 

또 친부모가 아니라 이모 고모 외삼촌이어도 친부모 못지않은 대접을 해주고, 친자식이 아닌 조카라 해도 자기 자식처럼 챙기던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류의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쓰다 달다 말할 것 없이 계춘할망 곁을 지키는 조카 김희원이다. 심지어 그는 혜지가 친조카가 아닌 것이 밝혀졌어도 이모가 화가 나서 던지는 걸레짝을 맞아가면서 실망스러워할 이모가 안쓰러워 가슴아파하고, 알고 보니 불량학생이었던 혜지도 결국은 친조카처럼 따뜻하게 맞아준다. 더 압권인 것은, 이미 팔려나간 계춘할망의 집을 부동산 사랑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예전 모습으로 꾸민 후 계춘할망의 여생을 그곳에서 보내게 해준 일이다.

 

요즘 드라마 각본대로라면 과연 그런 결말을 맺을 수 있을까? 아마 김희원은 친조카도 아닌 주제에 할망 곁을 얼쩡거리는 혜지를 죽어라고 미워하면서 갖은 패악을 부려댈 테고, 한편으로는 치매에 걸린 할망이 하루빨리 세상을 떠나 피붙이라고는 조카 하나뿐인 자신에게 어서 유산이 넘어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죽을 고비도 넘겨야 하는 힘겨운 물질을 해서 모아온 할망의 소중한 돈을 날로 먹으려는 못된 심보로를 보란 듯이 드러내면서 말이다. 

 

 

하지만 계춘할망이 말하는 진정한 가족이란 좋은 일 궂은 일 함께 나누고 미운정 고운정 주고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같은 부모의 피를 가지고 태어난 혈연이라 한들 정을 나누지 못한다면 서류상 가족일 뿐이지만, 조카든 남이든 정을 붙이고 살면 그것이 바로 가족인 것이다.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사랑이다. 정이다. 서로 진정한 마음으로 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사실 굳이 가족이냐 아니냐를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또 영원한 내 편이 꼭 가족이어야만 한다는 법도 없다. 영화 속 윤여정과 김고은처럼 친할머니 친손녀가 아니어도 영원한 한 편이 되어줄 수 있다면 말이다. 

 

가족의 개념이 점차 흐려져 가는 요즘, "가족이 뭐여? 정붙이고 살면 그게 가족이지"라는 계춘할망의 말을 통해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영화의 시작은 창 감독의 어머니에 대한 각별한 사연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2007년, 러브홀릭의 [너는] 뮤직비디오로 시골에서 살고 계시는 부모님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담아내며 감성적인 영상미를 보여준 창 감독은 연세가 많으신 어머니에 대해 할머니와 사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어린시절에 대한 죄의식과 함께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더 늦기 전에 [계춘할망] 속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이 아니면 말하기 힘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어서 진심을 다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고 한다.

 
최근 범죄, 스릴러 등 자극적인 영화를 주로 보다가 끝없이 펼쳐진 제주도의 넓고 넓은 바다와 하늘, 눈닿는 데까지 펼쳐져 나간 유채꽃밭, 푸른 숲길 등 제주도 특유의 아름다운 영상이 가득한 [계춘할망]을 만나니 눈도 마음도 맑게 정화되는 느낌은 더불어 얻은 또 하나의 행복이었다.
 

이상, 계춘할망(윤여정) "가족이 뭐여? 정붙이고 살면 그게 가족이지"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