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소리 아버지 이성민에게 일깨워준 진정한 사랑
이 비유가 적합한지 모르겠지만, 이호재 감독의 영화 [로봇, 소리]를 보면서 느낀 황당함은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했다. 10년 전 실종된 딸 유주(채수빈)를 찾아나선 아버지 김해관(이성민)의 가슴 절절한 부성애를 보여주기 위해 미 항공우주국 NASA가 동원되는 것도 모자라 우리나라 국정원에 인공지능 로봇까지 내세우다니! 평소 무채색의 현실을 무작정 아름다운 파스텔존으로 바꿔 보여주고자 하는 판타지물이나 공상 속에서나 가능한 스토리를 펼쳐 보여주는 SF류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터여서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 큰 내용에 더 적응이 안 되었던 것 같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영화에 관한 한, 그런 황당함이 불쾌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실종된 딸과 10년이 넘도록 생업도 내팽개친 채 딸을 찾아다니는 아버지의 가없는 사랑이라는 현실적인 소재에서 어떻게 그토록 전 우주를 아우르는 방대한 스케일의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는지 놀라웠다. 외계인과의 교감을 다뤄 전 세계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ET]도 생각났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결코 맺어질 리 없는 여러 인연의 끈들을 잘 여미고 다독여 따뜻한 감동이라는 보자기에 싼 선물을 건네받은 듯한 느낌도 들었다.
로봇, 소리 아버지 이성민에게 일깨워준 진정한 사랑
무엇보다도 영화의 황당무계한 전개를 잘 눅여준 가장 큰 공로는 믿고 보는 배우 이성민에게 있었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음이 안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음이 가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헬조선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애환을 그린 [미생]의 오과장 등 그 동안 드라마며 영화를 통해 깊은 신뢰의 이미지를 쌓아온 이성민은 바로 후자의 사람이다. 무조건적인 믿음을 보낼 수 있는 그이기에 사람들 눈에 확 띄는 꽃분홍색 옷을 입은 로봇을 태운 유모차를 끌고 함께 딸을 찾으러 다니는 것도, 또 단지 기계일 뿐인 로봇과 사람마냥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따뜻한 교감을 나누는 모습도 그럴 수 있겠다는 가능성 있는 스토리로 만들어준 것이다.
■ 때로는 사랑도 폭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영화 속 이성민이 역할을 맡은 아버지 김해관은 독불장군이다. 물론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선 탓이겠지만, 이토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아버지는 무조건 자신이 계획해 놓은 길로 나아가게 하려고 밀어붙인다. 어릴 때는 또 그렇다 쳐도, 대학생이 된 후에도 아버지는 딸이 아무리 자기 말을 좀 들어달라고 애원해도, 또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싶어하고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알아달라고 호소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저 너를 사랑하고, 너를 위한 일이라며 아버지 뜻을 강요할 뿐이다.
자식을 미워하고 무시하고 때리고 학대하는 것만이 폭력은 아니다. 자식의 생각과 마음을 아예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식의 삶을 부모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는 것 또한 심각한 폭력이다. 아무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한들 내 자식 내가 낳았으니 내 것이고 내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부모라면,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내 아이 내 마음대로 때리고 학대하는 것이니 상관하지 말라는 몹쓸 부모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 소통이 불가능해진 딸과 아버지
그리하여 결국 딸 유주와 아버지 김해관 사이에는 서로 가닿을 수 없는 넓고 깊은 간극이 생기고, 같은 언어를 쓰지만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통이 불가능한 부녀관계가 되어버리고 만다.
영화에서는 이 멀고 먼 간극을 로봇, 소리가 등장해서 메워준다. 우여곡절 끝에 로봇, 소리를 만나게 된 아버지는 함께 딸을 찾으러 나선다. 그리고 소리의 도움을 받아 놀랍게도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서야 딸에게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것, 또 음악에 재능이 있어서 데모 CD를 만들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리고 딸과 언쟁을 벌인 후 실종되었던 바로 그날 딸이 사고를 당하고, 아버지와 마지막 통화를 하고 싶어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화해의 말을 나눌 기회도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된다. 로봇, 소리 없이도 서로의 마음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소통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은 이미 뒤늦은 후회일 뿐이다.
연전에 세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은 인생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마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며, "사랑이라는 마음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무려 7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말한 바 있다. 언행일치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종교를 떠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김수환 추기경도 가슴으로 사랑을 하기까지 70년 넘게 걸렸다고 할 정도이니, 여느사람들이야 죽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라
하지만 인공 로봇, 소리조차 화나고 슬프고 고마운 감정을 알고, 또 그곳이 작열하는 사막의 나라 아프가니스탄일지라도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성인이 된 스무 살 딸을 예닐곱 살 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방법으로 지키고 보호하겠다면서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부모의 사랑일까. 부모자식 사이든, 연인 사이든, 또 그 외 어떤 관계에서든 참사랑은 내 마음을 받아들여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어떤 사랑이든, 사랑은 상대방이 존재해 있을 때 그 의미가 있는 법이다. 내 곁을 떠났을 때 혹은 세상을 등졌을 때 그 사랑은 이미 무용지물일 뿐이다. 로버트 해리의 다음 글도 떠나거나 죽고 나면 아무 소용 없는 사랑의 덧없음을 잘 알려주고 있다.
내일은 당신 것이 안 될지도 모르니.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라,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는 것은 아니니.
미소지어 주고 싶거든 지금 웃어주어라.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그러니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 그리고 <상대방이 원하는 사랑을 주는 것>이다. 상대가 떠나고 난 후 혹은 끔찍한 일을 당하고 난 후에야 왜 진작 더 사랑하지 못했을까, 왜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못했을까 후회하면서 펑펑 눈물을 쏟아봐야 부질없는 짓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있을 때 잘해"라는 재미난 노래제목은 가히 명언이라 할 만하다. 더불어 [로봇, 소리]를 계기로 앞으로는 우리 심장을 뛰게 해주는 것이 인공지능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기를,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다독여줄 소리가 로봇의 목소리가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이기를 바래본다.
■ [로봇, 소리]의 간략한 줄거리
누설의 염려가 있으니,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정도로 스토리를 소개해 보면, [로봇, 소리]는 2003년 2월. 대구 중앙로역에서 한 50대 남자가 휘발유를 담은 패트병을 던져 무려 192명이 죽고 148명이 부상을 당한 가공할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10년째 실종된 딸 유주를 찾아다니는 아버지는 2003년 바로 그 장소에서 딸과 마지막 통화를 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그는 딸이 죽지 않았으며 실종됐을 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 후 10년이라는 세월을 실종된 딸을 찾아다니던 아버지는 어느 날 딸과 닮은 사람을 봤다는 말을 듣고 어떤 외딴섬을 찾아간다. 하지만 역시 허탕을 치고 좌절에 빠져 바닷가에 앉아 있는 아버지 앞으로 위성이 떨어진다. 미 우주항공국이 전 세계를 감청하기 위해 몰래 만든 그 위성 속에는 인공지능 로봇이 탑재돼 있는데, 자신의 감청 때문에 가족을 잃은 아프가니스탄의 한 소녀를 찾으러 내려온 로봇이다.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기억하는 이 신기한 로봇이 목소리만으로 전화번호와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되고, 로봇에게 딸 유주를 찾아주면 아프가니스탄에 가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둘을 뒤쫓는 우리나라 국정원 요원 이희준과 항공우주연구소 엘리트 연구원 이하늬, 그리고 미 항공우주연구원들을 향해 "미친 소리 같겠지만, 이 녀석이 내 딸을 찾아줄 것 같습니다”라며 함께 딸 유주를 찾는 여행에 나선다.
■ 로봇, 소리가 탄생하기까지
이것이 배우 심은경의 목소리로 탄생한 로봇, 소리다. 억 단위의 제작비에 6개월이라는 제작기간을 거쳐 한국 영화 최초로 자유로운 감정 표현을 하는 로봇을 탄생시킨 것이라고 한다. ‘감성 로봇’이지만 표정이 없는 소리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제작진은 머리의 움직임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고민했고, 그 결과 머리 전체를 상하좌우로 자유롭게 움직이고 옆으로도 기울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 또 이 모든 동작을 동시에 가능하게 만들어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이성민과 호흡을 맞출 수 있도록 했고, 시선 처리를 디테일하게 구현하기 위해 머리에 실제로 카메라를 내장해 화면을 보면서 시선을 맞추는 등 큰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왜 영화 제목이 [로봇 소리]가 아니라 [로봇, 소리]인지는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되면 좋겠다.
이상, 로봇, 소리 아버지 이성민에게 일깨워준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