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정원..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친 선물
기원전 6세기 바빌론은 페르시아 만에서 지중해 연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습니다. 둘레만 20킬로미터에 달했고, 18만명이 살았으며 거리엔 인도, 중국, 지중해 연안 등의 국가로부터 온 상품들이 넘쳐났던 이 놀라운 도시는 가히 오늘날의 맨해튼이라 할 만했습니다.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이 세계의 중심임을 입증하기 위해 바벨탑을 건설했는데, 순전히 흙으로만 건설된 이 탑은 오늘날의 30층 높이와 맞먹습니다.
그런데 이 바벨탑보다 후세에 더 유명해진 건축물이 있습니다. 바로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건설한 것으로 전해지는 공중정원입니다. EBE 다큐프라임 [공중정원 위대한 바빌론]을 바탕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정원에 관한 내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바벨탑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공중정원..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친 선물
2600년 전 바빌론의 신전 에사길에서는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주인공은 바빌론의 젊은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와 메디아 왕국의 아미티스 공주였다. 이 결혼식은 사실 엄청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있는 서아시아는 당시 바빌론과 아시리아, 메디아 왕국이 팽팽한 세력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와 메디아 국왕 키악사레스가 결혼동맹을 맺음으로써 세력균형이 깨진 것이다. 바빌론과 메디아 연합군은 아시리아로 쳐들어갔고, 결국 아시리아는 기원전 612년 수도 니네베가 함락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아미티스는 사랑스러운 아내이자 메디아 왕국과 연합의 끈을 이어준 아내이자 은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누구도 가질 수 없고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운 선물을 아내에게 주기로 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공중정원이다. 훗날 그리스인들은 공중정원의 아름다움이 인간의 영역 밖이라고 생각했기에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등대, 올림피아 제우스상, 할리카르나소스 마우솔로스 능묘, 이집트 쿠푸왕의 피라미드,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로도스 크로이소소 거상과 함께 공중정원을 세계 7 대 불가사의로 꼽았다.
그리스인들이 공중정원이 있었다고 말하는 바빌론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약 백 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한때는 서아시아 최대의 도시였던 바빌론이지만 지금은 무너진 집과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는 도로, 성채들뿐이다. 더욱이 이 모든 유물들조차 불과 백 년 전까지만 해도 땅속에 묻혀 있었던 것들이다.
잠들어 있던 바빌론을 다시 깨운 사람은 독일의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였다. 그는 어느 날 우연히 돌로 된 14개의 아치형 방을 발견하고는 1899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초기까지 바빌론시 북동쪽에 있는 남쪽 왕궁에 공중정원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콜데바이의 주장은 한동안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훗날 학자들은 이곳이 식량저장고이거나 지하감옥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 이유는 콜데바이가 최초로 주장한 공중정원의 위치가 물을 끌어올 수 있는 유프라테스 강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학자들은 유프라테스 강과 인접한 성벽 안쪽에 공중정원이 있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공중정원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한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스테파니 달리 교수에 따르면 공중정원은 바빌론이 아니라 티그리스 강변의 니네베에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 오리엔트에 최초로 세계 제국을 세운 아시리아의 니네베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것은 기원전 700년경 세나케립이 왕위에 있었을 때인데 당시 세나케립은 방이 80개나 되는 왕궁을 건설했으며 도시의 영역은 700헥타르에 달하는 웅대한 도시였다. 그 때문에 학자들은 훗날 그리스 사람들이 이 니네베를 바빌론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니네베에서 발굴한 수많은 점토판들은 당시 아시리아인들이 정원을 어떻게 건설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이 수도교 끝에 이르러 언덕을 따라 흘러내리며 두 갈래로 나뉘는 모습이다. 실제로 이 부조를 보면 정원 전체에 어떻게 수로를 배치했으며 또 어떤 방법으로 물을 끌어들여 공급했는지를 알 수 있다. 심지어 그들은 물을 공급받기 위해 산에 터널을 뚫기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변 산에서부터 니네베까지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5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수로시설이 있었다. 여러 하천들로부터 물을 끌어들이고 정원의 높이에 맞게 물을 공급한 대단한 시설이었다.
이라크 북부 자르완 수로 유적에는 지금도 세나케립 왕 때 건설한 수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세나케립은 이런 수로를 18개나 건설했는데 그 먼 거리를 방수와 수평을 유지하며 물을 끌어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아시리아 왕들이 정원 꾸미기에 쏟아부은 이런 엄청난 노력은 공중정원이 니네베에 있었다는 주장을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스나 로마인들이 모두 바빌론의 공중정원이라고 했지 니네베의 공중정원이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그리스의 고고학자이자 아테네대학 교수인 콘스탄티노스 코파니아스 박사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이 정원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한다. 메디아 왕국에서 온 아내 아미티스가 고향의 산들을 그리워하자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이 정원을 지었다는 것이다. 왕비의 향수병을 치유해 주어야 했으므로 당연히 왕비의 고향에 있는 꽃과 나무를 옮겨왔을 것이다. 그곳은 바빌론에서 동북쪽으로 500킬로미터 떨어진 엑바타나였다. 오늘날 이란 하마단주의 주도인 이곳은 과거 엑바타나로 불렸으며, 고대 메디아 왕국의 수도였다. 해발 4000미터에 달하는 자그로스산맥 중 1800미터 고원에 위치하고 있어서 서늘하고 강수량도 많다.
주로 농경과 목축을 통해 살고 있었던 메디아인들은 점차 북방을 잇는 무역로를 장악해 가면서 부를 축적했으며 이곳에 거대한 궁전과 정원을 건설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54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100여 년 간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런 메디아 왕국에서 태어난 아미티스는 사막과 달리 뚜렷한 계절의 변화가 있는 기후와 늘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 싱그러운 나무와 꽃들 속에서 성장했을 것이다.
그런 아미티스를 위해 짐꾼들은 야자나무며 석류 등 2백여 종의 수목과 함께 온갖 진귀한 꽃들을 바빌론으로 옮겼다. 마차의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엄청난 수량의 물을 어떻게 공급하느냐는 것이었다. 바빌론의 기술자들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기록한 그리스의 학자 스트라보에 따르면, 수차는 정원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왔고 계단과 평행하게 뻗어 있다. 수로였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아무도 그 내부를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이것은 스크류 펌프를 통한 물 공급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보통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가 발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바빌론에서는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디오도로스는 공중정원이 7개층으로 이루어졌으며 꼭대기층이 바빌론의 내부 성벽보다 약 20미터가 더 높다고 기록했다. 맨 위층에는 위에서 아래까지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을 통해 여러 도구를 이용하여 물을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중정원은 단지 하나의 정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비 아미티스에 대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지극한 사랑과 방수 문제, 나무 운반, 수로의 배치, 물을 끌어올리는 방법 등 바빌론인들이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래 쌓아온 모든 지적 역량이 총결집된 예술작품이었던 것이다. 누구라도 이곳을 방문하면 울창한 삼림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었다. 공중정원 내부에는 백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방들이 있었고, 그 방들의 중앙에는 너른 광장이 있었다. 그리고 천창을 통해 은은한 빛이 들어오는 광장 가운데에는 더위를 식혀줄 목욕탕도 있었다. 즉 공중정원은 기원전 6세기 바빌론이라는 사막 한가운데에 세워진 가장 완벽한 파라다이스였다. 아미티스 공주가 꿈꾸고 바빌론인들이 완성해 낸 지상 최고의 낙원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불렀던 공중정원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와 아미티스 공주의 사랑으로 건설됐다.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마천루의 도시 바빌론의 영광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네부카드네자르2세가 죽은 후 권력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기원전 539년 바빌론은 페르시아의 침략을 받는다. 모든 것이 불타버렸다. 바빌론의 상징인 바벨탑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 후 바빌론시는 페르시아 제국의 한 지방도시로 전락하고 만다. 불길과 함께 바빌론의 영광도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상, 공중정원..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친 선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지극한 마음은 높이 살 만하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 공중정원을 건설하느라 상상도 못할 고생을 감수해야 했을 사람들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