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로 보는 세상

난세의 영웅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투사 최운산

난세의 영웅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투사 최운산

 

독립투쟁 사상 최대 규모의 승리를 거둔 것은 청산리 대첩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몇 달 전 산골의 한 마을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역사적 전투가 있었는데, 바로 '봉오동 전투'입니다. 당시 이 전투에서 최명길과 최풍, 최만익, 최복, 최고려, 최문무, 최빈 등이 독립투사로 활동했는데, 놀랍게도 이들은  모두 동일인물로 그의 진짜 이름은 '최운산'이었습니다.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를 바탕으로 살펴본 [난세의 영웅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투사 최운산 ]입니다. 이번주 수요일(8월 7일)에는 영화도 개봉되는데, 유해진, 류준열 주연의  [봉오동 전투](원신연 감독)입니다. 봉오동 전투와 최운산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아두시면 영화를 보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난세의 영웅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투사 최운산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 등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독립투쟁 최대 규모의 승리를 거둔 청산리대첩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몇 달 전인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 산골의 한 마을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역사적인 전투가 있었으며, 그 뒤에는 역시 잘 알려지지 않은 8명의 영웅이 존재했다.

 

1920년 일본은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투사를 잡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그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이름의 8명. 먼저 갈 곳 없는 조선인들을 모아 신한촌을 건설한 최명길, 군사학교를 세워 사병을 양성한 최풍, 막대한 독립자금을 지원한 최만익, 첩보활동으로 일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최복, 외국과의 무역거래로 독립군을 무장시킨 최고려, 신출귀몰한 전술로 일본에 대한 무장투쟁에 앞장선 최문무, 최빈 등이었다. 

 

난세의 영웅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투사 최운산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모두 같은 사람이었으며, 그의 진짜 이름은 최운산이었다. 1885년 중국 자린성에서 3남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성인이 된 후 중국이 토지정리 사업을 시작하자 간도의 황무지를 헐값에 사들였다. 그리고 그 땅을 개간해 조선인들을 위한 신한촌을 세웠다.

 

그 후 생필품 기업을 운영하며 간도 제1의 거부로 거듭난 그는 그렇게 모은 재산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다. 뿐만 아니라 직접 중국권에 들어가 무술과 총술을 익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인들을 모아 사병을 양성했다. 심지어 외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땅을 팔아서 러시아나 체코군으로부터 구입한 신식무기를 조달하기까지 했다. 
 

 

당시 그가 구입한 무기는 대포 10대, 기관총, 수십 정, 수류탄 수천 개, 장총 천여 정, 권총 수백 정, 실탄 수만 발이었다. 그 밖에도 그는 첩보활동뿐 아니라 일본군 기습공격 등 수많은 활약을 했다. 그리고 일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그는 그때마다 다른 이름을 썼던 것이었다.

 

 

그러던 1920년, 우리 독립운동 역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다. 그 며칠 전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에 있는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했는데, 이에 분노한 일본군이 1개 대대를 보내 최운산의 독립기지가 있는 봉오산으로 진격해 온 것이었다.

 

당시 그곳은 최운산이 조직한 자위부대뿐 아니라 대한국민회군, 대한독립군 등 여러 부대가 합쳐 설립된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 (大韓北路督軍府)가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숫자에서도 열세일 뿐 아니라 일반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독립부대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정식 일본군을 상대하기란 무리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날의 전투는 독립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전투의 승리에서도 최운산의 역할이 컸는데, 누구보다도 봉오동 일대를 잘 알고 있던 그는 일본군을 봉오동 계곡으로 유인하자고 제안했다. 그곳은 ‘죽음의 골짜기’라고 불릴 정도로 산세가 복잡한 곳이었는데, 매복했다가 습격한다면 적은 수로도 일본군을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또한 최운산은 가지고 있던 신식무기를 독립군에게 나눠주었으며, 이에 완전무장한 독립군은 봉오동 지역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후 일본군을 봉오동 계곡 쪽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봉오동 계곡으로 들어서는 순간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공격을 퍼부었다.

 

 

당시 그들의 전투는 보리타작에 비유할 정도로 일방적인 공격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상하이 임시정부 군무부의 발표에 따르면 일본군 전사자는 157명, 중상자 200여 명, 경상자 100여 명인 반면, 우리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자 4명, 중상자 2명에 불과했다. 이는 청산리 대첩보다도 먼저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독립군 역사상 최초의 승리였다.

 

심지어 이 전투에 놀란 일본군이 퇴각하던 중 일본군 지원부대와 마주쳤는데, 아군을 독립군으로 착각해서 일본군끼리 총격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렇듯 뛰어난 지략과 전술로 대승을 거둔 봉오동 전투, 그리고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 중 한 사람인 최운산은 그 후로도 그는 우수리강 전투, 나자구 전투, 대황구 전투, 도문대 전투, 안산리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해 독립투쟁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6번이나 체포되고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결국 1945년 7월 5일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대한민국 독립을 40일 앞두고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광복 후 한참이 지난 1977년 뒤늦게야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청산리 대첩, 대전자령 전투와 함께 독립군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봉오동 전투는 중국 영토인 만주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대한북로독군부가 일본군 부대를 궤멸시킴으로써 사기가 크게 올랐고 독립군 부대 연합에 대한 열망과 기대도 높아졌다. 이는 그해 10월 항일투쟁 사상 최대의 승전보로 꼽히는 청산리 대첩으로 이어졌다.

  

독립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 봉오동 전투, 숨겨진 독립투사 최운산, 그 외에도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존재한다. 이렇듯 소리없이 죽어간 수많은 이들의 죽음으로 대한민국은 자주독립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 난세의 영웅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투사 최운산입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