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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킬링 디어 더 랍스터 송곳니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킬링 디어 더 랍스터 송곳니

 

그리스의 영화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연출한 작품들의 특징은 인간 내면에 잠재된 온갖 탐욕을 정조준한다는 것이고, 또 그 탐욕을 표현하는 방법이 참으로 기괴하면서도 기발하다는 것이다. 

 

무시무시할 만큼 이기적인 가족(킬링 디어), 로맨스 판타지라고 하기엔 너무 기괴하고 살벌하기조차 한 커플(더 랍스터), 자식들의 자유를 숨쉴 틈조차 없이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독재적인 아버지(송곳니) 등 주인공들이 소위 말하는 '또라이'에 가깝다고나 할까, 아니면 소시오패스 혹은 싸이코패스 성향을 보인다고나 할까. 정상적인 시선으로 보아서는 도무지 불가해한 삶 위에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는 듯한 주인공들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킬링 디어 더 랍스터 송곳니

 

TV 광고, 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대표작은 [킬링 디어]와  [더 랍스터], [송곳니] 등이 다. 이 중 [송곳니]는 2009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대상을 수상했고, [알프스]라는 작품으로는 2012년 베네치아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킬링 디어]는 2017년 칸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다. 

 

창의적이면서도 기괴함이 가득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대표작 [킬링 디어]와 [더 랍스터], [송곳니]를 소개해 본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킬링 디어 더 랍스터 송곳니

 

킬링 디어(2017년) 콜린 파렐 니콜 키드먼 배리 케오건

 

성공한 외과의사 스티븐(콜린 파렐)에게 다가온 미스터리한 소년 마틴(배리 케오건)이 서로 친밀해지면서 스티븐과 그의 아내(니콜 키드만)의 이상적인 삶이 처절하게 무너져 가는 담은 미스터리 복수 스릴러다. 마틴은 스티븐이 술을 마신 채 자기 아버지의 수술을 감행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믿고, 스티븐에게 그의 가족 중 누구 한 사람은 죽어줘야 형평에 맞는 게 아니냐는 논리를 들이댄다. 자기 아버지가 죽은 것에 걸맞는 대가를 치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반드시 죽이라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문제를 스티븐에게 던진다. 

 

이어서 마틴은 스티븐을 제외한 아내와 딸, 아들 세 가족에게 주술을 걸어 사지마비가 오고, 거식증에 이르고, 나중에는 눈에서 피를 흘리도록 한다. 눈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30분 이내에 죽음에 이르니 어서 자신에 낸 문제에 답을 해야 할 거라고 너무나 무심한 표정으로 내뱉는 마틴의 모습이 두렵기 그지 없다. 

 

 

 

과연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인 마틴은 어떤 선택을 할까? 그리고 나머지 세 가족은 셋 중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누구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다른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쯤은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는 걸까? 이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가족들 저마다가 벌이는 기상천외한 행위는 가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기심의 극치인 인간, 죽음 앞에서는, 아니, 삶 앞에서는 엄마도 누나도 동생도 한치의 양보도 없다. 심지어 아빠조차도 사랑하는 가족 셋 중 하나를 죽여야만 나머지 가족들하고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러시안 룰렛을 연상케 하는 게임의 룰을 완벽하게 실행해 낸다.

 

 

자신만 죽지 않을 수 있으면 누가 죽든 상관없는(그것이 비록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인간의 극도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표출해 낸 감독이다. 그렇기에 살아가면서 인간의 그 섬뜩한 속성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일만 없어도 "그나마 운이 좋았구나!", "그런대로 잘 살아냈구나!"라는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올 듯한 심정이 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대 함무라비 법전의 개념을 꿰뚫는 이 영화의 괴기스러움은 온몸을 죄어드는 듯한 두려움과 인간 속성에 대한 새로운(?) 눈뜸으로 신선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더 랍스터(2015년) 콜린 파렐 레이첼 와이즈

 

전대미문의 커플 메이킹 호텔. 이곳에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은 자는 모두 유죄다. 게다가 유예기간 45일 안에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야만 한다. 저마다 혼자인 사람들은 45일 동안 커플 메이킹 호텔에 머무르며 완벽한 커플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는데, 그럼에도짝을 얻지 못한 사람은 동물로 변해 영원히 숲속에 버려지게 된다.
 
근시라는 이유로 아내에게 버림받고 호텔로 오게 된 데이비드(콜린 파렐)는 새로운 짝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숲으로 도망친다. 그 숲은 커플이기를 거부하고 혼자만의 삶을 선택한 솔로들이 모여 살고 있는 솔로의 숲이다. 

 

솔로의 숲에서 삶을 유지해 나가기 위한 그들의 절대규칙은 바로 절대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데이비드는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 바로 그곳에서 데이비드는 자신처럼 근시인 완벽한 짝(레이첼 와이즈)을 만나지만, 그로 인해 너무나도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얼마나 사랑해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눈이 멀어버린 짝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도 장님이 되고자 스스로 자기 눈을 찔러 멀게 할 정도쯤은 되어야 할까?

 

커플을 이룰 수 있고 또 커플을 이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에서는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다가 반대로 절대로 커플을 이루어서도 안 되고 사랑해서도 안 되는 솔로의 숲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죽음을 불사하고 도망치는 인간의 아이러니라니..

 

 

근시라는 공통점=공감. 공감하는 마음 없이는 갈등이 끊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래도록 함께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걸까, 감독은? 그래서 상대가 눈이 멀면 너도 눈이 멀어야 한다는 것일까? 그 정도 각오 없이는 커플이 되어 세상을 함께 살아나갈 자격이 없다는 것일까?

 

커플지옥에 이어 솔로천국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쟁취한 사랑, 이 사랑처럼 오묘한 것이 있을까? 잔혹동화처럼 괴기스러운 스토리에 끊임없이 흐르는 부드러운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그 상반된 분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송곳니(2012년) 크리스토스 스테르기오글루 아게리키 파루리아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이고 넒은 정원과 수영장이 딸린 도시 근교 한 저택에 아이들 셋을 세상과 완전히 단절시킨 채 양육하는 부모가 있다. 그들은 바깥세상과 철저히 단절돼 있으며, 단 한 사람 아버지(크리스토스 스테르기오글루)만이 외부로 나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아들의 성적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가끔 회사 경비인 크리스티나를 들이고, 마당에 나타난 고양이를 무서운 침입자로 교육시킨다. 하지만 순종적이기만 했던 큰딸(아게리키 파루리아)은 크리스티나로 인해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고, 송곳니가 빠져야만 어른이 되어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에 충격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기괴한 가족주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억압적이고 독재적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는 동안에 철저하게 길들여진 아내와 아들, 그리고 두 딸. 신체적인 폭력과 학대에 못지않은 것이 정신적 폭력과 학대이지만, 이 가족들은 두 가지 다 겪으며 학습된 무기력의 세계로 빠져들어간다.

 

세상과의 약속인 언어조차 왜곡시키는 아버지는 <바다>를 <의자로>로, <작고 노란 꽃>을 <좀비>로, <전화>를 <소금>으로 가르친다. 그리하여 가족들은 식탁 <의자>에 앉는다는 것을 <바다>에 앉는다고 하고, 작고 노란 꽃이 피어 있다는 <좀비>기 피었다고 하며, <전화>를 달라는 말에 <소금>을 건넨다. 이런 언어체계로는 이들이 설혹 외부로 나간다 해도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아버지도 바로 그 점을 노린 것일 테고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따라서 타인과의 교류 없이는 이 세상에서 살아나갈 수가 없는 존재다. 말을 배우고 잘 소통하는 법을 습득하는 것도 사회적 동물로서 더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함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묵살하고 폐쇄된 곳에 가둘 때, 그 종착역은 주전자의 물이 끓으면 뚜껑이 들썩거리다가 기어이 폭발하듯 날아가버리는 것 같은 현상에 이르게 될 게 불보듯 뻔하다. 동물의 세계에서처럼 송곳니가 빠져야 독립할 수 있다는 룰에 따라 스스로 아령으로 얼굴을 몇 번이고 내리쳐 송곳니를 부러뜨리고는 자동차 트렁크에 숨어들어 죽음을 불사하고 자유에의 탈출을 감행한 큰딸이 그것을 온몸으로 증명해 준다.

 

 

독재자는 누가 됐든 언제나 위험인물이다. 사람들의 정신을 핍박하고 세상보는 눈을 왜곡시켜 버린다. 영화에서 보듯 아들이 대문 앞에 서 있으면서도 그 문지방을 단 한 발자국도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무지막지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사육 가능한 동물이 아니다. 일시적으로는 그 독재적인 막강한 힘에 잠시 동안은 순응케 할지라도 영원히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잔혹한 피바람이 불기 전에 그 어리석은 생각일랑은 기어코 접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딸에 이어 아들, 그리고 작은딸도 언젠가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 집이라는 감옥을 탈출하고야 말 테니 말이다. 

 

극도로 폐쇄적이고 독재적인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자유에의 욕망과 갈망을 더 선명하게 펼쳐 보여준 역시 괴기스러움이 가득한 요르고스 란티모스표 [송곳니]다.

 

이상,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킬링 디어 더 랍스터 송곳니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