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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조선의 아버지 정약용 박세당 이익

조선의 아버지 정약용 박세당 이익

 

산업화로 말미암아 사회구조가 크게 변동하면서 아버지의 위상도 눈에 띄게 흔들려오고 있습니다. 아버지한테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시대, 월급 때문에 아버지라는 이름이 유지되는 시대에 역사학자 백승종 교수는 조선시대 12명의 이야기를 담은 [조선의 아버지들]을 통해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진정한 아버지다움을 들려주고 있는데, 이 중 [조선의 아버지 정약용 박세당 이익]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자식을 크게 키울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자식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아버지로서 세상에 기여하는 길은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정약용

 

1 유배지의 아버지 정약용 - 벼슬길에 오른 사람처럼 당당하라

 

1808년(순조) 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정약용은 읍내를 떠나 더욱 한적한 시골로 들어갔다. 유배가 길어지는 안타까운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인 그는 고향 집에서 1천여 권의 장서를 옮겨다가 저술에 몰두했다. 10년 전, 이 먼 곳으로 유배를 떠나올 때만 해도 큰아들 정학연은 19세, 둘째아들 정학유는 16세였는데, 어느덧 그 아들들이 28세, 26세가 되어 있었다.

 

유배지의 아버지는 두 아들의 성장이 대견스러우면서도 걱정과 염려가 없을 수가 없었다. 아비가 날마다 부지런히 가르쳐도 부족한 점이 많을 텐데, 멸문의 화를 입어 가난과 한숨 속에서 긴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걱정이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주는 가계>를 보내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두 아들에게 권한 공부법

 

<두 아들에게 보내는 가계>에서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우선 효제(孝悌)에 힘쓸 것을 신신당부한다. '효'란 부모님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제'는 동기간의 사랑을 뜻하는데, 즉 가족공동체 구성원간의 사랑을 말한다. 정약용은 이 효제의 개념을 좀더 확장해서 멸문지경에 빠진 정씨 일가 전체를 효제의 대상으로 설정해 사촌과 육촌까지 포함하는 친족공동체의 해체를 막고 결속을 다질 것을 주문했다.

 

또한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언제나 명랑하고 밝은 마음을 가지라고 했다. 늘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태도야말로 뜻하지 않은 불운에 대처하는 자세이자 자신의 처지를 반전시키는 열쇠이니 폐족이 되었다 한들 어깨를 축 늘어뜨리지 말고 '벼슬길에 오른 사람들과 다름 없이 당당하라'고 말한 것이다.

 

 흙수저 아들의 재기

 

정약용은 독서에 대한 가르침도 빠뜨리지 않았다. 유교 경전을 토대로 삼되, 역사책을 두루 섭렵하고 실용적 사상에 눈떠야 한다고 자식들을 일깨웠으며, 특히 이 책의 선배 학자들이 남긴 지적 전통에 유념하라고 타일렀다. 그 결과 큰아들 정학연은 19세기 노론의 대학자 완당 김정희의 벗이 되었으며, 정약용의 장손 정대림도 학문에 힘써 정4품 호군 칭호를 얻었고 그 아들 정문섭도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그리고 둘째아들 정학유도 부친의 '실사구시' 정신을 이어 <농가월령가>를 지었다.

 

정학유의 큰아들 정대무는 북청현감이 되었고, 그를 포함한 정약용의 손자 삼형제는 고종 때 온건개화파의 영수였던 운양 김윤식과도 교제했다. 당시 정약용의 자식들은 이른바 '흙수저'를 물게 되었지만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슴에 깊이 새긴 덕분에 재기할 수 있었다. 가족이 위기상황에 빠질수록 더욱 더 서로 배려하고, 가족의 문화적 수준을 높이고 가풍을 잇기 위해 노력하며 당당한 태도를 잃지 말라는 아버지의 당부, 이것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가르침일 것이다.

 

박세당

 

2 세상에 저항한 가난한 아버지 박세당 - 독서와 글씨 연습으로 근심을 잊어라

 

박세당은 17세기 학계를 뒤흔든 풍운아였다. 송시열을 비롯한 정통 성리학자들의 세상이었던 노론은 일체의 학문적 우상을 부정한 박세당의 진치적인 학풍을 험하게 비판하면서 그를 유교의 가르침을 문란하게 만드는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자연히 박세당의 삶은 영욕이 교차했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도 심한 모욕이 뒤따랐다. 

 

'효성을 다하는가?'에만 집착했던 유교사회는 자식에 대한 무관심과 무책임 따위는 사회적 이유가 되지 못했다. 권위적이다 못해 폭력적인 가장이 많았고, 엄부가 넘쳐나는 대신 자부는 드물었다. 하지만 도교에도 이해가 깊었던 박세당은 결코 엄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대다수 성리학자들이 목숨보다 예법, 즉 크고 작은 예절을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시대였음에도 그는 예절보다 자식의 건강을 챙겼으며, 자식의 목숨을 성현의 가르침보다 단연 으뜸으로 여겼다. 17세기 후반의 지체높은 양반들이 박세당처럼 생각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예법보다 자식의 건강을 먼저 챙기다

 

박세당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아들들은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며 효성을 다했는데, 박세당은 아들들이 크게 상심한 나머지 건강을 해칠까봐 몹시 염려했다. 엄격한 상장의 예절을 지나치게 고집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던 시대였던 만큼 아들들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길까봐 '예법도 무시하라"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애틋하기 그지 없었다. 

 

그 자신은 현실정치에서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아들들에게는 과거시험을 보라고 권유했다. 과거에 합격하려면 글솜씨가 뛰어나야 했으므로 박세당은 둘째아들 박태보에게 보낸 편지에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글씨 연습을 할 것을 거듭 당부했다. 아버지의 정성스러운 지도는 헛되지 않아 큰아들과 둘째아들은 모두 대소과에 급제했다.

 

 뜻을 굽히지 않은 학자의 용기

 

그들 형제는 소론의 기대주였다. 하지만 당쟁에 휘말려 차례로 화를 입었다. 노론의 핵심인 김익훈과 정면충돌한 장남 박태유는 조정에 기댈 곳이 없어지자 결국 병을 구실삼아 영영 벼슬을 버렸고, 차남 박태보는 인현왕후의 폐위는 잘못된 일이라고 반대하는 상소를 주도했다가 심한 매질을 당했지만 끝까지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는데, 그 후 늙은 아버지의 정성스러운 간호에도 불구하고 매맞은 상처가 덧나 죽고 말았다.

 

오늘날 박세당의 독창적인 학문적 업적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학문적 성찰에 따라 주견을 세웠고, 성리학자들이 이단으로 여겨 금기시하던 도가사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던 그의 학문적 용기를 후세는 높이 평가한다. 그에 더하여 넘치는 정성과 사랑으로 자식들을 용기있는 선비로 키운 의로운 아버지였다.

 

이익

 

3 알뜰한 살림꾼 이익 - 신에겐 엄격하고 남에게 너그러웠던 아버지

 

16세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을 평생의 스승으로 여겼던 이익의 언행은 이황을 그대로 닮아 조그만 빈틈도 없었다. 한눈에 대학자의 기상이 절로 드러나는 큰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이익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했는데, 당쟁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 이하진은 숙종 때 사헌부 대사헌까지 지낸 유명한 선비였으나 서인 김석주와 날카롭게 대립하다가 결국 평안도 운산군으로 유배되었다.

 

1681년 이익은 그 유배지에서 출생했는데, 안타깝게도 이듬해에 부친은 병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익이 25세 되던 해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의 보호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던 둘째형 이잠도 역적으로 몰려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죽고 말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릴때부터 철석같이 믿고 의지하던 형마저 잃어버리자 절망한 이익은 온종일 집안에 머물며 근신하고 은거할 뿐,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았다.

 

멸문지화를 입었지만 삶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익은 집안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책무를 느꼈다. 늘그막에 얻은 아들 이맹휴는 아버지 이익에게 큰 보람이었다. 문과에 장원급제한 그는 30대에 벼슬이 예조정랑에 이르렀다. 학문에도 출중해서 이익의 후계자로 부족함이 없었지만, 명이 짧았던지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애쓴 남다른 선비

 

젊은시절부터 이익은 유달리 살림살이에 마음을 썼다.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가난해도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들은 살림사이를 돌보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마저 있었고, 그래서 한번 빈곤의 늪에 빠지면 영영 헤어나지를 못했다. 그러나 이런 세태를 수긍하지 못한 이익은 우선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의 책무라고 여겼다.

 

그는 오직 자신의 땅에서 농사지어 얻은 수확량을 헤아려, 많든 적든 그것을 안배하여 자급자족했다. 논밭일은 농사일에 익한 노복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살림밑천인 노복을 함부로 학대하지 않았고, 정해둔 규칙대로 그들을 대우했다. 그러자 노복들도 힘을 다해 부지런히 일한 결과 이익의 살림살이는 만년에 이르러 상당히 넉넉해졌다. 가난을 극복하고 생계의 안정을 회복한 것이다. 그는 농사 외에도 뽕나무를 심어 기르고 목화농사를 지어 옷감을 자급했으며, 과일나무를 심어 제사의 용도에 충당했다.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일체의 살림살이에서 사치는 극도로 배제되었다. 평소 밥상에 올리는 반찬의 가짓수도 규칙을 정해 최소로 줄였으며, 제아무리 귀한 손님이 찾아와도 반찬을 더 내놓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도 엇이 닭이나 개를 잡는 일도 없었다. 한마디로 그는 깨끗하고 정갈한 의복에 만족하는 삶을 살았다.

 

 삶 자체로 모범이 되고자 했던 진정한 아버지 

 

아들 이맹휴가 살아 생전에 남쪽 고을의 수령이 되어 갔을 때 그곳에서 음식물을 보내오자 그는 돌려보내면서 편지를 보내 꾸짖었다. 편지에는 "백성에게 물건을 거두는 것은 열에 아홉이 그릇된 것이다. 이것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다니, 안 될 말이다. 나는 고향 집에 남아서 제철에 내 밭을 경박해서 굶주림과 취위를 면할 수 있다"고 씌어 있었다. 그는 아들 덕분에 호사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익은 팔순의 고령에 이르기까지 많은 책을 써서 후학들에게 등불을 환히 밝혀주었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보다 앞서간 아들 이맹휴만 아들이 아니다. 이익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 아들이 아닐까. 아버지란 결코 입으로만 가르치는 이도 아니고, 핏줄이 직접 통해야만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삶 자체로 모범이 되어야 진정한 아버지다.

 

이상, 조선의 아버지 정약용 박세당 이익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