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 연산군(김지석)과 무오사화 갑자사화..조선의 4대 사화

 

역적 연산군(김지석)과 무오사화 갑자사화..조선의 4대 사화

 

 

드라마 [역적]에서 백성을 훔친 도적 홍길동(윤균상) 못지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인물이 연산군(김지석)이다.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출당해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난 것을 모르고 자란 세자 이융(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후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내면에 잠재돼 있던 광기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리하여 왕위에 올라 있던 12년 동안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 두 차례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했던 무리는 단 한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폭군으로 군림했다. 혹자는 소외빋는 어린시절을 보낸 상처가 너무나도 깊었기 때문이라는 동정론을 펴기도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한다 해도 연산군이 행한 폭정은 그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는 것이 후세의 평가다.

 

역적 연산군(김지석)과 무오사화 갑자사화..조선의 4대 사화

 

자신이 폐비의 아들이라는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연산군은 부왕을 위해 수륙재(불교에서 외로운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식)를 여는 문제로 대간(臺諫)들이 불효를 언급하면서까지 반대하고 나서자 “불효라니, 어찌 그런 독한 말로 과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가?”라며 언짢은 마음을 억누르며 대신들을 설득한다.

 

하지만 대간들은 불사(佛事)를 벌이는 것은 망국의 길이자 사도(邪道)라며 계속 반대하고 나서자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무기력한 표정으로 대간들을 지켜보기만 한다.

 

 

그 후 대간들이 상소까지 올리며 수륙재를 반대하자 연산군은 "저들이 구하는 것은 태평성세도 아니고 바른 정치도 아니다. 저들이 구하는 것은 공자와 맹자의 도도 아니다. 저들은 그저 남들보다 독한 말을 뱉어 저희들이 남들보다 더 군자임을 뽐내고 싶을 뿐이다. 저들은 이미 백성도 나라도  다 잊었다. 저들은 그저 명예를 낚으려는 것뿐이다"라며 통탄의 말을 내뱉는다.

 

그러자 내관 김자원(박수영)은 “전하는 하눌님의 아들이시니, 하시지 못할 말도, 하지 못할 행동도 없나이다. 헌데 어찌 침전에서 홀로 대간 따위를 겁내시나이까” 하며 연산군에게 강력하게 대신들과 맞서도록 힘을 불어넣어준다.  

 

 

김자원의 말에 용기를 얻은 대간들 앞에 나아가 그들의 마음을 잘 알겠다며 “선대 왕께선 불교를 지극히 미워하셨으니, 선대 왕을 위해 불사를 벌이는 것이 불충이라 할 만하겠소. 헌데 과인이 이미 수륙재를 허하겠노라 하였거늘 어찌하여 몇 달째 과인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이오? 선대 왕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  불충이라면, 과인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무엇이란 말이오? 과인은 이 나라의 임금이 아니란 것인가?”라고 단호하게 묻는다.

 

그리고 더욱 강력한 목소리로 “혹 궁 문 밖에 있는 유생들이 나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단 말이오? 또 그 유생들을 감사는 그대들도 나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인가? 내가 아무리 어린 왕이라고 하나, 검은 것과 하얀 것을 구분하고, 충과 불충을 나누며, 충신과 간신을 볼 줄 아나니, 난 오늘 불충한 자들을 가려내어 충성된 조정의 본을 삼으려 하오" 하고 말한다.

 

이어서 연산군은 “불손한 상소를 올린 유생 이공 등 3인을 외방부처하고 그들을 따른 무리들을 정거(停擧)하라. 또한 오늘이 지난 후에도 유생들을 감싸는 무리들이 있다면 그들은 나의 신하가 아니다”라고 위엄있게 명한다. 외방부처란 죄인을 외방으로 유배시키는 것을 말하며, 정거란 유생에게 일정기간 동안 과거를 못 보게 하던 벌을 말한다.

 

 

하지만 대간들이 물러서지 않고 합사(임금에게 극간할 때 사헌부와 사간원의 모든 벼슬아치가 나가던 일)하여 사직을 청하며 연산군에게 맞서자 연산군은 불이 꺼진 저승전에 앉아 김자원에게 "저들이 왜 나를 저리 업신여기는 줄 아느냐? 내가 폐비의 핏줄이기 때문이다"라며 눈물을 흘린다.

 

실제 역사에서도 연산군은 즉위 초기부터 대간들과 의견충돌이 잦았고, 이것은 연산군 시대의 중요한 사건인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네 번의 사화로까지 번지게 된다.

 

 사화(士禍) 무엇인가?

 

사화란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을 말한다. 사림파는 성종 때 영남 일대를 대표한 김종직 문하, 그리고 김종직의 제자 김광필 밑에서 수업한 중종 때 조광조 일파를 가리킨다. 현직 관리보다는 서원이나 서재를 통한 재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림파는 인재등용에서도 과거제보다는 천거제를 선호했다. 한편 기득권 세력인 훈구, 척신(戚臣) 세력은 인척과 벌족을 형성하고 정권을 독점하여 신진 사림의 정계 진출을 안팎으로 막았다.

 

 

 조선의 4대 사화 -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성종 때부터 시작된 사림파와 훈구파 세력의 대립은 연산군의 거듭된 실정을 계기로 일어난 무오사화, 갑자사화에 이어 중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와 명종 때의 을사사화 등 네 차례의 사화로 발생한다.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년 연산군 4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사국을 열었는데, 사관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밝혀지면서 발생한 첫번째 사화다. 조의제문은 단종을 항우에게 죽임당한 의제에 비유하여 그 죽음을 슬퍼하고 세조의 찬탈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연산군이 즉위 후 어머니(성종의 비, 폐비 윤씨)가 대신들의 충돌로 사약을 받게 된 것을 알고 훈구파와 사림파를 모두 누름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런데 훈구파 대신들이 대부분 사망하면서 사림파의 세력이 더욱 커지자 그들의 분방한 언론(言論)활동이 왕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 많았다. 사림파에 의해 수세에 몰려 있던 훈구파의 잔류세력인 유자광 등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일손 등 수십 명의 사림을 죽이거나 유배보냈고, 김종직을 부관참시했다. 그 후 모든 중요한 관직은 훈구파가 차지하게 되었다.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 연산군 10년에 일어난 사화다. 사림파를 몰아낸 연산군은 훈구파마저 제거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으며, 심지어 어염집 아낙을 겁탈하거나 자신의 친족과 상간하는 등 폐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자행했다. 이렇듯 사치와 향락적인 생활로 재정이 고갈되자 연산군은 훈구파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려고 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훈구파는 국왕의 행동을 저지하려고 했다.

 

이때 연산군을 싸고 돌던 척신들이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약사건에 윤필상,  김굉필 등 훈구파가 관여했음을 폭로하자 연산군은 생모 폐비에 관련된 성종의 두 후궁을 죽이고 그들의 소생인 왕자들마저 없앴다. 그리고 이 사건에 관련된 훈구대신과 아직 남아 있던 사림까지 몰아냈으며, 가족과 제자들도 처벌했다. 특히 이미 죽은 한명회, 정여창 등은 무덤을 파헤치는 부관참시를 행하는 등 끔찍한 사건을 일으켰다. 

 

연산군

 

기묘사화(己卯士禍)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 두 차례의 사화로 쓸 만한 인재들을 모두 처단하고 나자 연산군의 음탕과 사치는 더욱 심해졌다. 관리들에게 ‘신언패'(愼言牌)라는 패쪽을 차고 다니게 하여 말조심을 하도록 억눌렀고,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글이 국문으로 쓰였다고 해서 국문학습을 탄압하고 국문서적을 불사르기도 했다. 연산군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박원종 등의 훈구 대신들은 군대를 동원해 연산군을 추방하고 그의 이복동생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것이 ‘중종반정'이다.

 

백성과 사림의 여망 속에 왕이 된 중종은 사림을 재등용하고 도학(道學)을 숭상하여 무너진 유교정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특히 젊고 깨끗한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그를 추종하는 젊고 기개있는 사림이 현량과(賢良科)라는 추천제도에 의해 대거 등용되었다. 중종은 처음에는 사림을 신임했지만 지나친 이상국가의 실현 의지로 왕을 압박하자 싫증을 느꼈고, 이 분위기를 이용해 중종 14년 남곤, 심정 등 훈구 대신들은 조광조 일파에게 반역죄의 누명을 씌워 무참하게 죽이거나 유배보냈는데, 이것이 기묘사화다.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간 후 죽였고 김정, 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되거나 자결했다. 이 사건으로 사림의 개혁정치는 4년 만에 끝나고, 그들이 추진했던 정책도 대부분 폐지되었다. 하지만 이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높은 추앙을 받아 16세기 후반 사림시대를 여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 명종 원년에 모후 문정왕후와 명종의 외척인 윤임과 윤원형 간에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일어난 사화다. 기묘사화가 있은 지 10년 뒤 중종은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다시 사림을 등용했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면서 일어난 을사사화에 다시 밀려난다. 

 

중종이 승하하자 첫째 계비 장순왕후의 소생인 인종이 즉위하고 왕비의 동생인 윤임이 세력을 떨쳤으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타계하자 둘째 계비인 문정왕후의 소생인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명종 역시 나이가 어려 왕후가 수렴청정하고 동생 윤원형 일파가 실권을 장악했는데, 집권하자마자 전왕의 외척인 윤임 일파를 몰아낸 것이다.

 

이로 인해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은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죽이고 계림군도 음모에 관련되었다는 경기감사 김명윤의 밀고로 죽였다. 그 외에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억울하게 죽거나 귀양을 간 선비들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

 

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이상, 역적 연산군(김지석)과 무오사화 갑자사화..조선의 4대 사화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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