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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역적 희대의 폭군 연산군(김지석)과 폐비 윤씨

 

역적 희대의 폭군 연산군(김지석)과 폐비 윤씨

 

 

드라마 [역적]에서는 점점 더 잔혹하기 짝이 없는 폭군이 되어가는 연산군(김지석)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후세에 <희대의 폭군>이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명칭으로 일컬어지게 된 연산군에 대해서는 어머니 윤씨가 아버지 성종에 의해 죽임을 당한 어린시절을 보낸 트라우마로 인한 폭정이었다는 동정론도 한편으로는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이 처한 가혹한 상황에 잘 대처해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본디 성정 자체가 음험하고 잔인해서 성군이 되기를 바라기는 어려웠을 거라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학문이 깊고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간 성군이었지만, 주연과 여색을 즐겨 비난을 사기도 했다. 후궁이 10여 명이나 됐고, 후궁의 처소에 드나드느라 왕비 윤씨에게 소홀했다. 그 때문에 본디 투기심이 강했던 윤씨는 성종과 자주 다투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 성종의 명에 의해 폐비가 되고 사약까지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일은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피바람을 불러오는 불행의 씨앗이 된다. 

 

역적 희대의 폭군 연산군(김지석)과 폐비 윤씨

 

성종은 세상을 떠나기 전 세자 융(연산군)을 불러 "조선은 공자와 맹자의 나라임을 알고 대간들의 말에 잘 따르라"는 마지막 당부를 한다. 하지만 세자는 "저들이 공자를 앞세워 발이 세 개 달린 닭이 나온 것이 임금의 탓이라 우겨도 들어줘야 합니까? 저들이 맹자를 앞세워 고작 궁에 구리수통 하나 임금의 마음대로 바꾸지 못한다 해도 따라줘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하고 울먹이며 되묻는다.

 

 

그 말에 성종이 "아직도 모르겠느냐? 이 아비인들 공자와 맹자를 의심한 적이 없었겠느냐?" 하고 말하자 연산군은 "허면 투기한 부인을 내쫓고 죽인 것도 그 공자의 뜻이란 말씀이십니까?" 하고 분노를 억누른 표정으로 말한다. 이어서 연산군은 "아바마마, 제가 모르는 줄 아셨습니까? 내 아비가 내 어미를 죽인 것을.. 참으로 모르는 줄 아셨습니까? 저는 폐비 윤씨의 아들입니다"라고 폭탄선언을 하듯 내뱉는다.

 

죽음을 앞둔 성종은 큰 충격을 받고 피를 토한다. 그 동안 세자에게 그 사실을 숨기려고 그토록 애써왔건만, 아들 융이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비  윤씨이며, 아버지의 손에 죽어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것이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는 성종의 계비이자 둘째부인이다.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로 있다가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가 된 윤씨는 성종이 많은 후궁을 두고 찾는 것에 투기심을 느끼고 후궁을 독살한 혐의로 성종과 대비들의 진노를 사서 후궁으로 강등될 뻔한 일도 있었지만 궁인의 죄로 덮어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윤씨는 투기심을 이기지 못해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내고 폐비가 되어 친정으로 쫓겨간 뒤 바깥세상과 접촉을  금지당했다. 그 후 조정에서는 장차 왕위에 오를 세자의 친모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상소가 이어졌지만, 한편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무리들의 비방이 이어졌다. 폐비 윤씨를 옹호하는 자들은 윤씨에게 조정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해 주고 생활비를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반대하는 측의 태도도 완강했다. 특히 성종의 모후 인수대비와 계비 정현왕후의 반발이 커서 성종도 쉽게 폐비 윤씨의 거처를 마련해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성종은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내시와 궁녀들에게 윤씨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오라고 했다.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지시에 따라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는다고 거짓보고를 했고, 이에 분노한 성종은 대신들과 논의하여 사약을 내린다. 당시 윤씨는 사약을 받고 피를 토하고 죽어가면서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세자가 자라 왕이 되거든 자신이 피를 토한 금삼을 넘겨달라고 유언했고, 이는 훗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발생하는 도화선이 된다.

  

성종은 폐비 윤씨를 사사한 후 그 묘에 묘비도 세우지 않았지만, 나중에 세자의 앞날을 고려해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내렸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이 죽은 뒤 100년까지는 폐비 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폐비 윤씨는 아들 연산군이 즉위한 후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됐지만 중종반정 후 삭탈되면서 다시 폐서인 신분으로 돌아갔다.

 

 

 희대의 폭군 연산군

어머니가 폐출당해 사사됐을 때 겨우 4세였던 융은 윤씨 대신 왕비로 책봉된 정현왕후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그러나 천륜은 속일 수 없었던지 세자 융은 정현왕후를 별로 따르지 않았다. 게다가 인수대비는 정현왕후의 아들 전성대군을 대하는 태도와는 달리 융에게 지나칠 만큼 혹독했다. 이런 성장배경 탓인지 세자 융은 성품이 그리 양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음험하고 괴팍하고 변덕스러웠다. 게다가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집스럽고 독단적이 성향도 있었다.

 

성종은 이런 성품을 가진 융을 그리 탐탁하지 않게 여겼지만, 1483년 융을 세자로 책봉한다. 인수대비는 폐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면 후에 화를 부를 것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때는 진성대군도 태어나지 않았던 때여서 왕비 소생의 왕자는 융뿐이었기에 성종도 융을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19세에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군은 즉위 초에는 그래도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이어갔고, 인재가 많았기에 나름대로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포한 성정을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12년 집권기 중 무오사화, 갑자사화 두 번의 사화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자신을 비판했던 무리는 단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희대의 폭군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상, 역적 희대의 폭군 연산군(김지석)과 폐비 윤씨였습니다.  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