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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 보는 세상/일상다반사

용서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한 최고의 선물

 

용서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한 최고의 선물

 

용서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한 최고의 선물

 

용서 하면 맨 먼저 생각나는 것이 마크 트웨인이 남긴 "용서는 제비꽃이 자기를 밟아 뭉갠 발꿈치에 남기는 향기다"라는 아름다운 명언입니다. 또 칠레의 여성대통령 미첼 바첼레트의 "때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도저히 지울 수 없는 분한 일들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지우고 용서하라. 왜냐하면 그런 기억과 분노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질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용서를 하지 않으면 그 분노와 미움이 독이 되어 자신을 해치게 될 터이니, 그 미움의 독을 씻어낼 수 있는 길은 오직 용서뿐이라는 것이겠지요. 즉 용서는 타인을 위해서라기보다 자기 자신의 건강한 몸과 마음, 정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덕목인 셈입니다.

용서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한 최고의 선물..용서는 제비꽃이 자기를 밟아 뭉갠 발꿈치에 남기는 향기

 

하지만 제가 그 동안 트위터에 명언을 올리면서 느낀 것은, 많은 분들이 "용서하라"는 말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굉장히 언짢은 기분으로 "용서가 능사는 아니다"라는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용서가 안 될 만큼 큰 피해를 입고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느라 힘겨운 것도 억울한데 자꾸 용서를 해야 한다고 말하니 화가 날 수밖에요. 거기에다 용서를 못하는 것은 성품이 옹졸해서라느니, 그러고 살다가는 결국 자기 자신을 해치게 될 뿐이라느니 하는 말까지 듣게 된다면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새삼 새로운 분노가 치밀 것 같긴 합니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정작 가해자는 용서를 구할 생각조차 없이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희희낙락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런 모습까지 바라봐야 하는 이중 삼중의 괴로움은 무어라 형용할 길이 없을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하지 않으면 실제로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피해자 당사자이니 기필코 용서를 선택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포로'에게 자유를 준다. 용서를 하고 나면 자기가 풀어준 '포로'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말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 테구요.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절대로 용서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잊어버리고 또다시 반복적으로 수모를 당하는 일은 논외로 치고 말입니다.) 

 

 

JTBC 비정상회담 29회에서는 연극배우 박철민씨가 나와서 최근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가 나고 감정조절이 되지 않는 나, 비정상인가요?"라는 안건을 상정했습니다. 그리고 분노조절 방법에 관한 각 나라 패널들의 다양한 이야기기가 이어진 후 마지막으로 분노조절 방법의 최고난이도라고 할 수 있는 용서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저마다 용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함께 올려봅니다. 그 외에 용서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비정상회담의 사무총장 유세윤은 진심으로 용서를 하면 분노도 사라지게 마련이겠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면서 "나에게 씻을 수 없는 큰 피해를 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다 vs 없다"는 안건을 즉석표결에 부쳐보았습니다. 

 

 

그 결과 각국의 패널 12명 중 나에게 큰 피해를 준 가해자를 용서한다가 8명, 용서 못한다가 4표가 나왔습니다.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용서를 한다는 사람들의 표가 더 많아서 놀랐습니다. 흔히 인간의 본성이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 하며 따지곤 하는데, 이 투표결과를 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 쪽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새 패널로 참여하게 된 러시아 벨랴코프 일리야는 자신은 진정한 용서가 과연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용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저 말뿐인 용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용서한다에 표를 던진 가나의 샘 오취리는 이란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피해자의 어머니가 용서하겠다고 말한 후 직접 살인자의 올가미를 풀어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것은 분명 큰 범죄이지만 가해자가 교수형에 처해진다 한들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용서하지 않으면 내 고통이 가장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독일의 다니엘은 예전에는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용서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면서, 그 이유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행한 나쁜 짓을 내가 계속 참고 살면 그 사람이 자신의 범죄를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즉 합당한 처벌이 없다면 범죄가 반복될 것이니 용서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며, 개인적으로 복수하지는 않겠지만 법적으로 벌을 받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프랑스의 로빈은 용서한다는 데 손을 들었는데, 그 이유는 복수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단, 용서한다고 해서 상대의 죄를 잊어버린다는 뜻은 아니라고 덧붙였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용서하지도 잊지도 않는다. 순진한 자는 용서하고 잊는다. 현명한 자는 용서하지만 잊지는 않는다”라는 미국의 정신병리학자 토머스 사즈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로빈의 멘트였습니다. 

 

 

미국의 타일러는 911테러 때 아들을 잃은 엄마가 911테러범으로 종신형을 받은 테러범의 어머니를 만나 용서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식이 테러에 희생됐거나, 테러로 종신형을 받거나 어머니에겐 모두 마음이 짐"이라는 기사 속 글이 가슴아프게 다가옵니다. 

 

 

헤밍웨이의 [The Capital of a world]라는 단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페인의 한 아버지가 집을 나간 아들과 뒤늦게나마 화해를 하기로 마음먹고 신문광고를 냅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ㅇㅇ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라는 내용이 담긴 광고였습니다. (파코는 스페인에서 아주 흔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한 이름의 대명사인 철수쯤 되는 이름인가 봅니다.) 그리고 화요일이 되어 약속 장소에 나간 아버지는 뜻밖의 광경에 놀랍니다. 왜냐하면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이들이 무려 8백 명이나 그곳에 나와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어쩌면 우리 주변에도 이처럼 큰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용서를 구할 계기를 얻지 못해 애태우면서 기다리고 있는 파코들이 가득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잘못을 한 쪽이 먼저 용서를 구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만, 만일 스스로 용서를 구할 용기가 없어 머뭇거리고 있는 또 다른 파코들이 있다면 내 쪽에서 먼저 용서의 손길을 내밀어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용서를 바라는 것보다는 그래도 용서를 해주는 편이 한결 더 성숙한 삶을 살아나가는 최상의 방법일 수도 있으니까요. 용서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덮어두는 것이 용서가 아니다.

복수심,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 용서다.
진실을 밝히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때 마음속에 원한을 품지 않은 채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는 지혜가 필요하다.

용서하지 못하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 사람을 항상 마음속에 풍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용서는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해야 한다.

 

-정목스님 

 

이상, 용서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한 최고의 선물에 관한 포스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