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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 보는 세상/일상다반사

안동여행..동화작가 권정생 생가와 권정생 동화나라 방문

 

안동여행..동화작가 권정생 생가와 권정생 동화나라 방문

 

 권정생 생가 

안동여행 권정생 생가..경북 안동시 일직면에 있는 권정생선생 살던 집 

 

 

안동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고택을 재현해서 만든 한옥호텔 구름에리조트에 묵으면서

[몽실언니], [강아지똥] 등으로 널리 알려진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님의 생가, 

권정생님의 삶과 문학정신을 기리고 아이들을 위한 문학체험 학습장으로 마련한 권정생 동화나라,

그리고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과 군자마을, 의성김씨 집성촌, 안동포 마을 등을 방문했습니다.

 

아직 추수가 안 끝난 황금빛 들판이 한껏 마음을 여유롭게 해주었고, 발길 닿는 곳마다

깨끗하게 잘 단장된 고택이며 건물, 길들이 반가(班家)의 도시 안동임을 실감케 해주었습니다.

그 유명한 안동찜닭도 안동구시장에서 맛있고 푸짐하게 먹었고, 안동한우와 안동간고등어,

또 사람들이 빵을 사려고 줄서서 기다린다는 맘모스제과의 유자케익도 먹어봤습니다.

1박2일의 짧은 여정이 많이 아쉬워 언제든 꼭 다시 오리라고 마음속으로나마 다짐을 했습니다. 

 

오늘 포스팅은 먼저 권정생 생가와 권정생 동화나라를 둘러보면서 권정생님이 살아온

고단한 삶, 그리고 그 고단한 삶 속에서 남기고 떠난 유언 등을 살펴본 것입니다. 

 

 

권정생 생가

 

 

이 쓰러져 갈 듯 몸을 지탱하고 있는 초라한 집이 돌아가시기 전 권정생님이 살던 오막살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도쿄의 빈민가 궁핍하기 짝이 없는 집에서 태어났다.

광복 후에는 외가가 있는 경북 청송으로 귀국했지만 가난과 6·25전쟁으로 곧 다시 가족들과 헤어진

그는 대구며 김천, 상주 등 객지를 떠돌면서 나무장수며 담배장수, 고구마장수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가난하고 병든 몸으로 혼자 외롭게 살던 그는 저 오막살이에 정착하기 전까지 교회 문간방에서

종지기 일을 했다. 하지만 떠돌이생활 중에도 책을 많이 읽고 글도 열심히 썼던 그는 건강이

호전되자 작품을 발표했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뒤에도 저 작은 흙집을 떠나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그가 동화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강아지똥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는 존재인 '강아지똥'도 알고 보면 정말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러주는 책이고,

장편 몽실언니는 6·25전쟁을 배경으로 어른보다 더 큰 고난을 온몸으로 이겨내며 살아가는

몽실이의 이야기이자 모진 고난을 헤쳐나온 우리 민족의 이야기다.

 

 

 

 

딱 한 칸뿐인 방의 여닫이문 위에는 손으로 '권정생'이라고 쓴 글이 보인다.

베스트셀러작가가 된 후 그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인터뷰도 피했다.

평생을 결핵과 싸운 그는 신장 하나를 들어냈고 방광도 없어서 죽는 날까지 오줌을 호스로 빼냈는데,

“너무 아파서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사람을 맞을 자신이 없어서” 누군가 찾아와 방문 앞에서

자신을 불러도 아예 문조차 열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마당에 뺑덕이가 살았던 개집이 있고 저쪽에 변소라고 불려야 마땅할 재래식 화장실이 보인다.

이런 열악한 삶 속에서 그는 몽실언니, 강아지똥에서 나오는 인세 수입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는 20억원의 유산과 이 돈을 북쪽의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달라는 유서를 남겼다.

 

 

 

 

마을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전국에서 많은 조문객들이 줄이어 방문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가엾게 살다 간 외로운 노인인 줄만 알았는데 한 달에 수천만 원이 넘는

인세를 받는 유명한 작가라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살던 오막살이 앞으로는 하염없이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비라도 많이 내리는 날이면

냇물이 넘쳐 집을 휘덮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 교회가 교회 문간방에 머물면서 그가 종지기로 일했던 일직교회다. 

교회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그는 꽁꽁 언 손으로도 새벽마다 종을 쳤는데, 

종탑 아래에는 '새벽 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도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권정생 동화나라

안동시 일직면 옛 일직남부초등학교에 마련한 권정생 동화나라(출처 권정생 동화나라) 

 

 

지난 8월 29일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옛 일직남부초등학교에 마련한 권정생 동화나라다.

권정생 동화나라는 강아지똥, 몽실언니 등 불멸의 작품을 남긴 그의 삶과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문학체험 학습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사업비 37억원을 들여

옛 일직남부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서 지상 2층, 연면적 1,689㎡ 규모로 꾸몄다. 
 

 

 

 

1층으로 들어가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강아지똥 캐릭터다. 

1층은 그의 유품을 모아둔 전시실과 체험관, 도서를 전시판매하는 도서관으로 활용되고 있고,

2층은 2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다목적실과 작가들의 창작공간인 수련실로 활용된다.

 

 

 

 

동화나라 운동장 풍경이다. 여기에도 귀여운 강아지똥 캐릭터가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1층 전시실에 보관된 몽실언니의 여러 버전이다.  

 

 

 

 

역시 1층에 전시된 책들이다.

 

 

 

 

권정생 동화나라 내부에 소개해 놓은  그의 이력이다.

 

 

 

 

생가에서 보았던 오막살이 집의 내부를 재현해 놓은 것이다. 생가의 집 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창호지문이 여기저기 뚫려 있어서 그 구멍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방안을 찍어보았지만 잘 나오지를 않아서 올리지 않았는데, 바로 이 모습이었다. 

 

 

 

 

"좋은 동화 한 편은 백 번 설교보다 낫다" 라는 글귀가 가슴에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등단시절에 대한 소개가 씌어 있다.

 

 

 

 

강아지똥에서 발췌한 글을 적은 전시물.

 

"강아지똥아, 난 그만 죽는다. 부디 너는 나쁜 짓 하지 마고 착하게 살아라."

"나같이 더러운 게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니?"

"아니야,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너도 꼭 무엇엔가 귀하게 쓰일 거야."

 

단편동화 [강아지똥] 중에서

 

 

 

 

권정생님이 책을 읽을 때 쓰던 확대경

 

 

 

 

일기장과 시계, 안경 등도 보인다.

 

 

 

 

그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언장이다.

 

유언장 1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 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 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

   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번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

 

위 세 사람은 내가 쓴 모든 저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은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것이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 저기 뿌려 주기 바란다.

유언장 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 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 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 10일

쓴 사람 권정생

 

 

 

 

유언장 2

 

정호경 신부님.
마지막 글입니다. 제가 숨이 지거든 각각 적어놓은 대로 부탁드립니다.
제 시체는 아랫마을 이태희 군에게 맡겨주십시오. 화장해서 해찬이와 함께

뒷산에 뿌려 달라고 해 주십시오. 지금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3월 12일부터 갑자기 콩팥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뭉퉁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계속되었습니다. 지난 날에도 가끔 피고물이 쏟아지고

늘 고통스러웠지만 이번에는 아주 다릅니다.
1초도 참기 힘들어 끝이 났으면 싶은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

재작년 어린이날 몇 자 적어 놓은 글이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 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벳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 주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2007년 3월 31일 오후

6시 10분
권정생

 

 

 

 

그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비디오화면. 권정생 동화나라에서는 방문객이 오면

그때그때 틀어주고 있었다. 

 

 

 

 

권정생 동화나라에 그려저 있는 생가 모습인데, 너무 아름답게 그려져 있어서 왠지 가슴이 아팠다..

실제로 본 생가는 거의 폐가 분위기였는데 말이다.

 


 

“동화가 왜 그렇게 어둡냐고요?

그게 진실이기에.

아이들에게 감추는 것만이 대수는 아니지요.

좋은 글은 읽고 나면 불편한 느낌이 드는 글입니다." 

 

-권정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