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로 보는 세상

군함도 그리고 아베의 역사전쟁

 

군함도 그리고 아베의 역사전쟁

 

 

영화 [군함도]가 7월 말경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해 출간된 소설 [군함도]도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재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류승완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황정민, 송중기, 소지섭, 이정현 등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 [군함도]에 대한 기대가 무척이나 큽니다. 

 

[군함도] 개봉을 앞두고 MBC [PD수첩]에서 방영한 [군함도 그리고 아베의 역사전쟁]을 바탕으로 일본의 하시마 섬, 일명 지옥섬을 둘러싼 이야기들과 아베 총리를 선봉으로 한 일본의 부정적 과거 역사 지우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군함도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군함도 그리고 아베의 역사전쟁

 

일본 나카사키 한 현에 최근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일본 각지는 물론 그곳을 찾는 해외관광객들도 늘었다. 관광객이 갑작스럽게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약 2년 전부터였다. 나카사키 항에서 남서쪽으로 17.5킬로미터 떨어진 곳, 배로 30분쯤 달리면 망망대해에 떠 있는 낯선 섬.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시마, 또 다른 이름은 군함도다.

 

 

위에서 내려다본 섬의 모양이 일본 군함을 닮아 불려진 군함도. 콘크리트 옹벽과 회색빛 건물로 가득한 군함도는 바다 위에 세워진 거대 석탄도시였다. 군함도는 바위와 작은 풀 외에 생명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섬 곳곳은 독특하고도 기인한 풍경이 가득하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1916년, 이 섬에 일본 최초 콘크리트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바다 속에 매장된 다량의 석탄을 일본 미쓰비시사가 개발하면서 일본의 산업도 크게 발달했다. 관광해설사는 일본의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소개하고 있다. 미쓰비시 간부, 엘리트들의 아파트로 30세대나 있었습니다. 화장실, 목욕실이 딸려 있었다. 1955년 일본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당시 군함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채굴과정을 세세하게 소개했으며 학교는 물론 영화관, 당구장, 수영장 등 각종 편의시설까지 갖춘 섬으로, 메이지 시대 이후 가장 발달된 도시 중 하나이자 산업혁명의 유적이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일제강점기의 참상을 떠올리게 하는 섬이다.

 

 

1943년~45년에 군함도에서 살고 있던 조선인은 최대 8백 명, 군함도 관광코스에 포함되지 않은 출입금지구역 중 북동쪽 옹벽 근처에 당시 조선인 집단합숙소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본 식민지하에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의 숙소였다. 하지만 일본의 영광스러운 역사만 소개할 뿐, 그 어디에서도 강제징용이라는 말을 찾을 수도 없고 설명을 들을 수도 없다. 나카사키시에서 만든 군함도 소개책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부끄러운 역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가사키 시청 관계자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어디까지 게재할지는 국가의 판단과 검토가 있기 때문에 확실한 부분만 게재한 거라는 답변이었다. 

 

군함도 맞은편 바닷가 마을에는 난고시 해난자의 묘역이 있다. 해난자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군함도에서 도망치려고 바다를 헤엄쳐 오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모신 곳이라고 한다. 강제노역을 견디다 못해 군함도를 탈출하려던 조선인들은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죽어서 이곳으로 떠내려왔던 것이다.

 

 

역사는 감춘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이 저지른 강제징용의 역사, 그 증거는 바로 군함도에서 살아 돌아온 분들이다. 김형석 할아버지는 74년 전 그 날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1943년 음력으로는 10월 20일, 양력으로는 11월 17일, 미쓰비시 탄광에서 노무자를 인수하러 왔다. 당시에는 일본사람들한테 아무 소리도 못했다. 트럭엔 징용에 끌려가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김형석 할아버지의 일본식 이름은 가네모토 쿄구치, 번호는 4416번이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국가 총동원령법이 시행되면서 강제징용은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도착한 곳은 군함도 해저탄광이었다.

 

 

바다 밑 1000미터의 깊이, 허리조차 펴기 힘든 좁은 탄광, 주로 조선인들은 숨조차 쉬기 어려운 갱도 끝, 막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탄광 안이 어찌나 더운지 팬티 한 장에 런닝셔츠만 입고  입었는데, 김형석 할아버지는 땀이 흐르면 자꾸 탄가루 묻은 손으로 눈을 닦아서 눈이 못쓰게 되어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코앞에 있는 효자손도 찾지 못한다. 한번 들어가면 12시간을 내리 일한 바람에 한여름에도 두툼한 이불을 덮어야만 할 정도로 몸도 상했다. 

 

2년 동안 탄도에서 탄을 캐며 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해방 후 고향땅을 밟았지만 지옥섬 군함도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이따금 꿈에서 당시 하시마에서 겪은 일이 나타나곤 하기 때문이다.

 

 

군함도 하시마 탄광에서 6115번으로 불렸던 최장섭 할아버지다. 1943년 강제징용 당시 할아버지는 16세로 서당에 다니고 있었다. 삼시 세끼가 전부 깻묵밥이었는데, 깻묵밥이란 콩가루를 띄워 빻은 것이라고 한다. 쌀밥에다 고기 한 번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군함도에서 도망치다가 잡혀온 사람들은 살이 묻어나고 피가 묻어나는 채찍질을 당했다. 살인마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 군함도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몇 명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현재 살아 있는 강제징용 생존자는 6명뿐이다.

 

 

강제동원되어서 목숨을 잃고 신체 부상을 입은 그 비극적인 현장이 그러한 역사적 사실은 모두 묻어버린 채 관광지가 되어버린다는 것이 사실은 피해자들을 또 한 번 농락하는 것이다. 군함도뿐만 아니라 나가사키조선소, 야하타제철소 등 메이지시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으로 2015년 당시 유네스코에 등재된 곳은 모두 23곳이다. 그 중 7곳에서 조선인 5만 8천 명이 강제노역을 했다.

 

2015년 7월 5일, 유네스코는 일본의 산업혁명의 등재조건으로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하고 2017년 12월 1일까지 그 진행과정을 보고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일본측은 자신에게 불리한 역사를 외면했다. 유네스코 등재 직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forced to work’라는 표현은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며 입장을 뒤집은 것이다.

 

 

아베 총리도 직접 나서서 "공장 같은 데서 일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고 어차피 그런 게 아니더라도 징용당하니까요"라며 강제노역 사실을 부인했다.

 

 

군함도를 비롯한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민간이 아닌 아베 총리실에서  직접 나선 일로 알려져 있다. 강제동원과 같은 부정적인 역사를 숨기면서까지 오랫동안 철저하게 준비하고 관철시킨 진짜 이유는 아베의 정치적 고향이자 지역구인 야마구치현 쇼카손주쿠에 있다. 아베 총이가 가장 존경한다는 1850년대 일본의 사상사 요시다 쇼인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사설 학당인 쇼카손주쿠는 2015년 군함도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산업시설도 아닌 이곳이 등재된 것은 아베 정부의 결정이었다. 

 

 

요시다 쇼인은 19세기 중엽 일본 개혁의 선봉이었다. 그는 야마구치 지역의 젊은 인재들을 불러모아 부국강병의 사상을 가르쳤다. 마침내 그의 제자들이 일본을 통치해 온 에도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켰다. 제자들 가운데 네 사람이나 초일 자리에 오르며 일본을 아시아의 강국으로 이끌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며 아시아의 강국으로 떠오르던 그때는  우리 조선이 끝모를 나락으로 치닫던 구한말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일본의 대륙전쟁 야욕에 첫 희생양은 조선이었다. 일본을 선진국으로 이끌었던 인물들은 우리로서는 망국의 원흉들이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바로 조선 침략의 장본인 이토 히로부미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의 부국강병을 위해 일본에 가장 가까이 있는 나라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주장했다.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을 이어받아 조선 침략에 성공한 제자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인 것이다.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 일본으로서는 근대화의 영웅이지만 나라를 잃은 우리 조선으로서는 민족의 적이었다. 아베 총리는 공공연하게 그를 칭송했다. 일본 초대 총리이고, 저와 같은 야마구치 현 출신이고, 상당히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라면 그를 칭송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 이노우에 가오루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개항시킨 인물이자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실질적 배후로 알려져 있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의 장본인인 가쓰라 타로는 1905년 미국 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맺은 밀약으로 미국은 필리핀 지배권을,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인정받고 곧바로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초대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910년 이완용을 앞세워 한일합병을 완성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처절한 무단통치를 시작한 인물이다.

 

 

2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3.1만세운동 당시 일제애 항거한 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인물이다. 일본 군국주의의 시발점이자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이들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을 기리는 쇼카손주쿠가 군함도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김승은 책임연구원은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킨 이 메이지 산업시설들이 단순히 한 사건이 아니라 아베 정권 이후 더 노골화되고 있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전쟁, 아시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들을 지워내는 과정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더 강한 일본 그리고 자국의 평화뿐 아니라 동아시아를 지배할 수 있는 일본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되기 위해 지금 이 모든 것들이 잘 짜여져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지난 2013년 아베 총리가 야마구치 현을 방문했을 당시 요시다 쇼인의 묘를 찾아와 참배를 하고 존경의 뜻을 밝혔다. 사실 요시다 쇼인의 가문은 아베 총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아베 총리의 고조부인 오오시마 요시마사는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다. 그리고 56대, 57대 일본 총리를 지낸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태평양 전쟁 당시 내각 장관이었다. 전쟁에 패한 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지만 곧 풀려났고 일본 수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일본이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도록 막는 평화헌법에 반감을 표한 지도자였다. 기시 노부스케의 정치적 이념을 아베 총리가 오늘날까지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변국의 항의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베 총리는 여전히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하고 망언을 쏟아낸다. "침략이란 건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며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자신을 '우익 군국주의자'로 불러달라고 한다. 전범국가의 과거를 지운 세계문화유산 등재. 헌법을 개정해서라도 강한 일본을 만들겠다는 아베 총리는 자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 그의 계획이 완성됐을 때 일본은 과연 어떤 나라가 돼 있을까?

 

일본의 보수정권은 최강의 군사대국으로서 아시아를 지배했던  지난 역사를 비호하고 동경하고 있다.  그때를 다시 재현하기 위한 정교한 계획을 그려나가고 있다. 외교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나라와의 외교문제도 임기응변이 아닌 장기적인 틀 위에서 일관되고 치밀하게 대응해 나가고 있다. 

 

 

군함도의 생존자며 위안부 등 가혹한 역사의 피해자들은 일본으로부터 진심어린 사과를 받지 못했다. 이들의 상처를 감싸주어야 할 우리 정부 역시 그 동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평화와 공존을 위해 지금 우리는 피해 당사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확고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

 

과오를 인정하기보다는 무조건 덮고 가려는 일본 정부. 그들이 숨기려는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 노력은 민간, 그리고 문화예술 쪽에서 앞장서고 있다. 류승완 감독은 "많은 창작자들이 이 시대를 다루려고 하는 것은 과거를 이야기하기보다 오히려 미래를 이야기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보다 나은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이 시절을 더 이야기해야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는 것이다. [군함도] 개봉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이상, 군함도 그리고 아베의 역사전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