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 성골 삼맥종(박형식)의 고뇌와 신라의 골품제도

 

화랑 성골 삼맥종(박형식)의 고뇌와 신라의 골품제도

 

드라마 화랑의 삼맥종(24대 진흥왕) 역을 맡은 박형식

 

신라에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도 같은 강력한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부모가 모두 왕족인 성골과 부모 중 한쪽이 왕족인 진골, 그리고 그 밑으로 귀족 신분을 여섯 단계로 나눈 6두품인 이른바 골품제도입니다. 교과서적인 지식으로 배울 때는 그런 신분제도에 대해 별다른 인식이 없었는데, 최근 시작한 드라마 [화랑]을 시청하다 보니 성골은 성골대로, 진골은 진골대로, 또 그 외 모든 사람들이 이 넘사벽인 골품제라는 신분제도의 희생양이 되어 힘겨운 삶을 살았음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하긴 우리나라도 요즘 <수저론>이라고 해서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심지어 무수저라는 말까지 나오면서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깡그리 무시하고 오직 부모나 권력 같은 뒷배경으로 현재와 미래가 결정되는 신분제 아닌 신분제가 횡행하고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내 편 네 편을 가르고, 상하계급을 가르는 인간의 못된 속성은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고 일부 사람들이 보이는 끔찍한 작태이지만 말입니다. 

 

화랑 성골 삼맥종(박형식)의 고뇌와 신라의 골품제도 삼맥종의 어머니인 지소 태후 역을 맡은 김지수

 

드라마 [화랑]에서 삼맥종(박형식)은 신라 김씨 왕계의 유일한 성골 왕위 계승자로, 4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7세에 불안한 왕권을 물려받습니다. 삼맥종이 사라지면 신라에서 성골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권을 가진 진골 귀족들의 표적이 되고는데, 그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궁에는 어린 삼맥종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이 들이닥칩니다. 그러자 어머니인 지소 태후는 어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숨기고, 이때부터 삼맥종은 떠돌이 은폐생활을 시작합니다. 어머니 뒤에 숨어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박형식의 고뇌가 아프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한편 불안한 신국(신라) 황실의 유일한 성골 왕비인 지소는 왕이 세상을 떠난 후 어린 아들만이 성골의 왕위 계승자인 가운데 왕위를 둘러싼 피바람 앞에 섭니다. 아들에게 단단한 왕좌를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한 그녀는 왕권을 강화하고 아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자들을 모을 목적으로 정적인 위화랑을 불러들여 화랑을 창설할 것을 지시합니다. 신라 골품제도의 최상위층인 성골이라면 아무 걱정 없이 살았을 것 같은데, 이들 역시 자신들의 왕권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고비고비를 넘겨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이 드라마에서는 성골이냐 진골이냐, 즉 부모가 모두 왕족이냐 아니면 한쪽만 왕족이냐에 따라 한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골품제도가 계속 언급되는데, 화랑이라는 제도도 결국은 이 강력한 신분제도를 파괴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분노와 억울함을 이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화랑 성골 삼맥종(박형식)의 고뇌와 신라의 골품제도]입니다. YTN의 [한국사 탐(探)]을 바탕으로 정리한 신라의 골품제도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 드라마를 시청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왕권 강화를 위한 신의 한 수 골품제도

 

신라는 본래 6개의 부족이 연맹하여 건설된 중앙집권적 연합국가였다. 박혁거세가 왕으로 등극할 당시 왕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아 귀족들의 입김에 국정이 좌지우지되던 상황이었다. 신라 초기에는 박, 석, 김씨 세 개의 성씨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이것은 계승이라기보다는 각 부족 간의 왕위 쟁탈전이라고도 볼 수 있어 왕위는 언제나 뺏길 수 있는 자리였다.

 

연맹왕국 시기의 왕족들은 모두 천신의 후예임을 내세워 왕위에 오를 수도 있는 정통성을 주장했지만 다른 집단을 압도할 현실적 세력은 부족했다. 그러니 당싱 왕권을 위협하는 집단으로서는 이 3성 집단이 상호 견제 및 왕위를 놓고 다투었고, 또 동일 성씨 내에서는 왕권이 미약했기 때문에 방계왕족이나 사위 가문 등이 왕위를 위협할 수 있었다.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화백회의 또한 귀족의 실리를 따라 결정되는 구조였기에 신라 왕권을 약화시키는 정치구조였다. 모든 의제는 귀족들의 만장일치가 이루어져야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흥망성쇠를 다른 골품제도의 명암

 

그리하여 제23대 왕인 법흥왕은 신라 왕경을 중심으로 신분제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바로 골품제도다. 신라 왕경의 중심에 있는 왕족들에게는 왕이 될 수 있는 성골, 그리고 최고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진골, 그 밑으로 일반 귀족부터 평민까지 여섯 가지로 나눈 폐쇄적인 신분제를 내놓은 것이다. 이 골품제도는 400년간 이어지는데, 이것은 신라를 유지했던 제도이기도 하고 또 골품제가 신라 말에 흐트러지면서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제도다.

 

골품제의 확립은 신라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일대사건이기도 했다. 즉 신라인들의 골품제도는 태어남과 동시에 결정되는 신분으로 결코 벗어날 길 없는 굴레와도 같았다. 한편 왕족들에게 골품제도는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최상의 제도였다. 현재 실권을 잡고 있는 왕의 친족들을 성골로 규정하고 성골만이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 중 하나라도 성골이 아니면 진골로 규정되어 왕위 계승조건이 부합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지배층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신분제라고 볼 수 있었다. 결국 그것이 지방사람들 또는 일반 평민들과 자신들을 차별짓는 중요한 경계선으로 작용했다. 물론 지배층 내에서도 왕족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지배층 몇 개의 신분은 정치적/경제적 특권의 차별을 두었다.  

 

 

 국가 확립을 도모하기 위한 철저한 신분제

 

골품제도 중 최상위층 신분인 성골은 부모가 모두 왕족인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신분이고 진골은 부모 중 한쪽만 왕족이거나 왕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는 신분이었다. 그리하여 성골 사이에서는 신분을 지키기 위한 근친혼이 성행했다. 진골이 성골과 결혼하면 진골이 성골로 상향되는 것이 아니고 성골이 진골로 하향되었기 때문에 권력과 부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같은 계층에서 결혼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7대 선덕여왕은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는 골품제도 덕분에 역사상 최초로 왕위에 오른 여왕이다. 26대 진평왕에게 아들과 남동생이 없어서 세 딸 중 가장 현명했던 선덕여왕이 왕이 된 것이다. 신라에는 모두 56명의 왕이 있었고 그 중 여왕은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세 명이다. 성골은 28대 진덕왕을 끝으로 소멸되었으며 29대 태종무열왕부터는 진골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 아래 6-4두품까지는 귀족신분이다. 경제적 수준과 교육 수준이 높은 6두품, 그 뒤로 5두품과 4두품은 관직에 오를 수는 있지만 그 한계가 명확했다. 아무리 학식과 재능이 높고 인정받는 인재라도 품계를 뛰어넘어 관직에 오를 수 없는 것이 신분제이자 곧 법이었다. 3두품 이하는 평민 계급으로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골품제의 엄격함은 의복과 주거지에 관한 규정만 보더라도 확연히 알 수 있다. 각 신분마다 의복의 색상과 갖춤, 그리고 집의 규격까지 정해진 법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급별 옷의 재질이나 수놓는 방식까지도 세밀히 정해져 있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법흥왕  때는 대아찬까지, 자색 옷을 입었고, 아찬부터 급찬까지는 비색 옷과 아홀, 대나마와 나마는 청색 옷, 대사부터 선저지까지는 황색 옷을 입었다.

 

계급별 여성들의 치장 역시 법으로 엄격히 제한을 두었다. 진골 여성의 겉옷엔 털로 수놓은 고급 비단을 금하고 목도리는 금은실과 공작꼬리 비취털 사용을 금하고 9색 중 자황색 사용을 금했다. 6두품은 겉옷에는 면주와 주포를 사용하고 화대에는 무소불과 철, 동을 사용했다. 5두품은 겉옷에는 무늬 없는 홑천만을 사용하고 내의는 잔무늬 능직만 사용해야 했다.     

 

골품제에 따른 집의 규모도 달랐다. 왕의 터전인 궁궐보다 화려한 가옥을 제한하기 위해 방의 크기가 규정되어 있었는데, 진골은 24척, 6두품은 21척, 5두품은 18척, 4두품은 15척을 최대 규모로 정하고 방의 개수와 돌담의 치장까지 다른 형태를 띠게 했다. 그 밖에 주방 도구, 교통수단까지 차등을 두었을 뿐 아니라 말의 안장까지도 세밀한 규정을 두어 한눈에 보아도 신분이 어떠한지를 뚜렷이 알 수 있는 상징이 되었다. 제아무리 돈이 많을지라도 이런 벽을 뛰어넘을 수 없어 신라 골품제도는 왕권 확립의 뼈대가 된 신분제로 평가받고 있다.

 

 

 골품제도 비운의 계층 6두품

 

골품제에세 가장 비운의 계층은 6두품이었다. 부유한 귀족계층인 6두품은 제아무리 학식이 높아도 주요관직에 오를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다. 진골들은 저마다 모든 관직을 독식할 수 있었지만 6두품은 항상 제외되기 일쑤였다. 골품제 사회에서 인재등용은 거의 희박했다. 당시 최치원은 자신의 신분을 득난(得難. 신라에서 왕족 다음가는 신분을 이르던 말)이라고 말했는데, 신분을 넘어 관직에 오를 수 없음을 뜻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다.

 

 

6두품
진골 바로 밑의 귀족 신분으로 신라 6부와 소국 출신의 지배자 씨족으로 구성되었다. 왕족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신분이었으며 진골이 독점한 최고위 관직에는 오를 수 없었지만 중앙정부 부서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높은 관직에 배치돼 신라사회의 지배층으로 활약했다. 신라 중기에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과 결합해서 친위세력으로 크게 성장했지만 출세에 제약이 있어 진골에 대한 불만이 컸다. 왕권이 약화되고 진골 세력간의 권력다툼이 극심해진 신라 말기에는 권력에서 소외되면서 반(反) 신라적인 계층이 되었다.

 

5두품
6두품 밑의 신분으로 주로 촌장 계층이 5두품으로 편재되었다. 지방의 진촌주(眞村主)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5두품 역시 관직의 상한선이 정해져 있었으며, 실무직이나 지방관부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관위를 맡았다.

 

4두품
5두품 밑의 신분이자 사실상 최하위 귀족계층이다. 5두품보다 세력이 약한 촌장이 편재되었으며, 지방의 차촌주(次村主)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원래는 4두품 아래에 3, 2, 1두품이 있었지만 사실상 소멸되어 평민과 같아졌다.  


 

 신라 말 골품제도에 반발한 세력들의 도발

 

신라 말기에 들어설수록 골품제도에 대한 사회적 불만은 점점 더 높아져 급기야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크게 번지기 시작한다. 골품제도가 성립된 이래 대를 이어 불이익을 받았던 6두품 이하 계층들의 본격적인 반항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지방귀족들에겐 자체 세력을 모으는 현상이 나타난다. 게다가 계속된 자연재해와 수취체계의 모순으로 농민생활이 극도로 불안정해짐에 따라 골품제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붕괴위기에 처한다.

 

가장 눈에 띄게 세력을 모은 사람은 천민 출신의 장수 해상왕 장보고였다. 당나라와 일본의 중계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그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는데, 신라 골품제를 뛰어넘은 유일무이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딸을 왕비로 추대하려다가 진골들에게 살해된 후 장보고의 해상왕국은 처참히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장보고의 난은 단순히 반란 차원이 아니라 왕경과 왕경인 중심의 골품제에 대한 지방인들의 본격적인 반발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상, 화랑 성골 삼맥종(박형식)의 고뇌와 신라의 골품제도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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