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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화랑 화랑도와 대표적 화랑 4인

 

화랑 화랑제도와 대표적 화랑 4인

 

 

그 동안 역사극이 주로 조선왕조 시대를 다루었는데, 얼마 전 새로 시작한 KBS 2TV 월화드라마 [화랑(花郞)](연출 윤성식)은 신라를 무대로 하고 있어서 새삼 흥미가 끌립니다. ''천 5백 년 전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누비던 화랑들의 열정과 사랑, 성장을 그린 청춘 드라마"를 표방하고 있는데, 과연 청춘 드라마답게 박서준, 박형식, 고아라 등 젊고 활력이 넘치는 등장인물들이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팩트와 픽션이 혼합된 팩션 드라마인 만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현대의 재미와 흥미를 한껏 고조시켜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 봅니다.

 

먼저 홈페이지에 소개된 내용을 바탕으로 주요 등장인물들을 간략히 알아보고 신라의 [화랑도와 대표적 화랑 4인]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습니다. 그 동안 알고 있었던 교과서적인 지식 정도이지만 되짚어보고 더 보완을 해나가다 보면 신라에 대해 좀더 깊이있게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화랑 화랑도와 대표적 화랑 4인

 

무명 박서준

 

“어떨 땐 개 같고, 어떨 땐 새 같다고 해서 일명 개.새.공으로 불린다. 비밀스러운 사연을 간직한 채 핏덩이 때부터 우륵의 손에 길러졌다. 심지어 이름도 무명인데, 이름이 아니라 이름을 짓지 않아 無名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대로 무명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무모한 에너지를 내뿜는 반면, 삶에 대한 어떤 미련도 기대도 없는 한 줄기 바람 같기도 하다. 천인의 신분으로 금지된 성문을 넘어 선우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천인 신분이면 목숨마저도 하찮게 여기는 골품제도를 깨부수기 위해 화랑이 되기로 결심한다.

 

 

아로 고아라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신국에서 귀족도 천인도 아닌 신분으로 누군가에겐 아가씨로, 누군가에겐 천한 것으로 불리며 살아간다. 집안이 몰락하고, 아버지마저 잃어버린 아들과 아내를 찾아 산천을 헤매며 의술을 펼치는 탓에 철이 들기도 전부터 생계와 살림을 책임져 왔다. 그런 아로 앞에 어느 날 10년 전 사라졌던 오라비 선우와 삼맥종이 나타난다. 선우와 삼맥종, 두 사람의 등장은 아로의 운명을 한치 앞도 모르는 상태로 바꿔놓는다. 

 

 

삼맥종  박형식

 

신라 김씨 왕계의 유일한 성골 왕위 계승자로 4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7세에 불안한 왕권을 물려받았다. 삼맥종이 사라지면 신라에서 성골도 사라진다. 그 때문에 밤마다 궁에는 왕위 계승권을 지닌 어린 삼맥종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이 들이닥친다. 어머니 지소 태후는 어린 왕을 보호하기 위해 왕을 철저히 숨겼고 이때부터 삼맥종의 떠돌이 은폐생활이 시작된다.

 

 

지소 김지수


진흥왕(삼맥종)의 모후이자 화랑의 창시자다. 연약한 소녀였던 시절 지소는 고립무원의 외로운 권력쟁탈전에서 악녀가 된다. 한번 쥔 권력의 맛에 사로잡힌 그녀는 지존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자신이 더 단단한 왕좌를 물려줘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급기야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정적(政績)인 위화랑을 불러들여 화랑 창설을 지시한다.

 

 

위화랑  성동일


1대 풍월주, 화랑의 스승이다. 범인들이 보기엔 실성과 정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괴인이다. 그런 그가 지소에게 끌려와 ‘화랑’ 창설이라는 대업을 맡게 된다. 하지만 왕권을 강화시키겠다는 지소의 목적과는 달리 위화랑은 아이들의 생각을 일깨워 권력의 쏠림을 경계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자유로운 신국의 인재를 만들 꿈을 꾼다. 화랑을 창설하는 대신 자기 방식대로 선발하고 자기 방식대로 가르치겠다는 전권을 위임받은 그는 신국의 족쇄인 골품제도를 깨고자 한다.

 

 

안지공 최원영


선우와 아로의 아버지. 자신도 넉넉한 살림이 아니지만 아픈 사람들을 찾아 전국을 오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가 이렇게 전국을 떠도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천인 출신의 아내와 아들을 찾기 위해서다. 어린시절 지소의 정혼자로 내정되어 함께 어울리며 자랐다. 하지만 지소의 오빠가 죽으면서 유일한 성골 왕계가 끝날 위기에 처하자 법흥왕은 딸 지소를 입종갈문왕과 혼인을 시킨다. 그 후 혼인한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지소는 안지에게 함께 신라를 떠나자고 부탁하지만 안지는 이미 천인 여인과 혼인한 상태였다.  

 

 

박영실 김창완


지소의 가장 강한 적이자 신국의 권력의 중심인물이다. 삼맥종이 없었다면 차기 왕권 승계의 방향을 결정했을 중요한 인물인데,  지소와 대치하며 화랑의 분열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음모를 꾸민다.

 

드라마 화랑의 인물관계도

 

 화랑도(花郞度) 

 

신라 진흥왕 때 청소년으로 조직된 심신수련 단체로 국가의 훌륭한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왕과 귀족의 자제로 이루어졌다. '화랑(花郞)'이란 '꽃처럼 아름다운 남성'이라는 뜻이며, 화랑도는 국선도(國仙徒), 풍월도(風月徒), 풍류도(風流徒), 낭가(郎家)라고도 불린다. 

 

화랑도는 처음에는 남모(南毛), 준정(俊貞) 두 미녀를 뽑아 이를 원화(源花)라 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3백여 명의 무리가 모였다. 그런데 이 두 여단장이 서로 시기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해 억지로 술을 권해서 취하게 한 뒤 강물에 던져 죽여버리는 일이 발생하자 준정을 사형에 처해지고 원화제도는 해산했다. 그 후 나라에서는 귀족 출신의 잘생기고 품행이 곧은 남자를 뽑아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받들게 하면서 화랑도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지도자인 국선(國仙) 1명과 그 밑에 3~4명에서 7~8명의 화랑을 두었고, 그 밑에 화랑을 따르는 낭도들이 있었다. 명승지를 돌아다니면서 국토에 대한 애착심을 기르는 한편 춤과 무예를 통해 심신을 단련하고 제천의식을 행했으며 사냥과 전쟁 관련 교육을 통해 협동과 단결정신을 키웠다. 계율로 원광법사가 만든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의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다. 삼국통일을 이루는 7세기 중엽까지의 신라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삼국통일 후 전쟁이 없는 안정기에 노래와 춤을 즐기는 귀족들의 집단으로 변질되어 갔다.

 

 

 대표적 화랑 4인

 

김유신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15세에 화랑이 되었다. 뛰어난 용맹과 지략으로 신라 통일전쟁에서 혁혁한 공적을 세워 당시 신라에 귀화한 가야왕족으로서는 불가능했던 신라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했다.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후 대각간, 상대등이 되었다.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 소정방과 연합해서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는 나당연합군의 사령관격인 대총관이 되었으나 병으로 출전하지 못하고 원정을 떠난 문무왕을 대신해 국내통치를 맡았다.

 

사다함(斯多含) 내물마립간의 7세손으로 진골 출신인 급찬(級飡) 구리지의 아들이다. 인물이 수려하고 성품이 곧아 15세에 화랑이 된 후 천여 명의 낭도를 거느릴 만큼 통솔력이 뛰어났다. 신라에 기울어 있던 대가야가 백제와 가까워지자 562년 진흥왕은 이찬 이사부에게 정벌을 명령했는데, 이때 사다함이 15세의 나이로 종군을 청했다. 왕이 처음에는 어리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 뜻이 확고함을 알고 마침내 허락했다. 

 

국경 근처에 이른 그는 장군의 허락을 받아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기습공격해서 대가야를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진흥왕은 큰 공을 세운 사다함에게 가야에서 사로잡은 포로 3백 명과 많은 땅을 상으로 주었지만 사다함은 가야국 포로를 모두 자유롭게 풀어주었고 땅도 부하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사다함에게는 생사를 함께하기로 한 무관랑(武官郞)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병으로 죽자 몹시 슬퍼하다가 7일 만에 친구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관창(官昌) 신라 중대의 화랑으로 ‘관장(官狀)’이라고도 불린다. 신라가 당나라와 더불어 백제를 치고자 출병할 때 좌장군인 아버지 밑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했는데, 황산벌 싸움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버지가 그를 불러 이 싸움에서 공과 명예를 세울 것을 독려했다. 관창은 곧 적진에 뛰어들어가 싸웠으나 적에게 사로잡혔는데, 계백장군은 그의 어리고 용맹함에 탄복해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적장을 죽이고 적기(敵旗)를 빼앗아오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긴 그는 다시 적진으로 돌진해 싸우다가 또다시 적군에게 사로잡혔다. 계백은 이번에는 목을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용감한 죽음에 자극된 신라군은 분연히 진격해 계백을 죽이고 백제군을 대파함으로써 백제를 평정할 수 있었다. 무열왕은 그 전공을 높이 기려 급찬을 추증하고 예를 갖춰 장사를 지내주었다. 그의 용맹과 충절은 후대인들에게 칭송되어 고려 말기에는 경주에서 관창의 가면검무(假面劍舞)가 공연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충효정신과 화랑정신이 투철한 인물로 귀감이 되고 있다.

 

반굴(盤屈)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신라의 화랑이다. 대신, 장군을 지낸 김흠춘(金欽春)의 아들이며 김유신 장군의 조카다. 아버지를 따라 백제 원정군에 종군하게 되었는데, 김유신 등의 군사가 황산벌에 이르니 백제의 계백장군이 이끄는 군사가 먼저 와서 험한 곳을 차지하고 있어서 신라에게 전세가 매우 불리했다. 백제군의 저항으로 신라군이 곤경에 처하자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으뜸이요,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가 으뜸이다. 위태로움을 당하여 목숨을 내놓은 것은 충과 효를 양전(兩全, 두 가지 다 온전함)함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곧바로 적진에 달려가 싸우다 전사했다.

 

이상, 화랑 화랑도와 대표적 화랑 4인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