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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 보는 세상/음악/문화/공연

뭉크 고통을 직시함으로써 얻은 치유와 회복

 

뭉크 고통을 직시함으로써 얻은 치유와 회 
 


노르웨이가 낳은 가장 위대한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는 자신은 요람에서부터 죽음을 안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하곤 했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누이의 죽음마저 지켜봐야 했다. 의사였으나 심한 이상성격자였던 아버지, 정신적으로 나약한 형제들, 그리고 그런 가정 속에서 겪은 어린시절의 어두운 기억들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주변에 늘 악의에 찬 위협이 존재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하여 공포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았고, 그로 인해 그는 일생 동안 신경쇠약에 시달려야 했다. 

 

뭉크 고통을 직시함으로써 얻은 치유와 회복

 

그 때문인지 뭉크의 작품에서는 하나같이 광기가 느껴진다. 그림을 통해 마음을 치유하는 [심리학 명화 속으로 떠나는 따뜻한 마음여행]의 저자 김선현 교수에 따르면, 예술가들은 모두 어느 정도 광기를 가지고 있다. 정신병, 간질, 신경쇠약, 우울증 ,강박증 등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미친사람과 그다지 차이점을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단순히 광인으로 치부되지 않고 위대한 예술가로 평가되는 이유는 그 누구와도 다른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예술작품을 창조해 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광기를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뭉크 또한 자신의 내면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 나아가 자신의 고통을 직시하고 갈등마저도 예술로써 승화시킨 화가였다.  


 절규 

 

뭉크는 <절규>와 같은 최고의 걸작을 통해 표현주의자들이 한 번도 회화적으로 표현해 본 적 없는 광범위한 인간적 절망감을 표현했다. 그림 속의 모든 것이 절망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형상은 실체를 갖지 않고 있으며 감정의 압력 아래에서 구부러지고 물결치고 있다. 하늘과 물의 꾸불꾸불한 모습과 강한 대각선을 이룬 다리 모두가 우리의 시선을 절규하고 있는 입으로 이끈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과 입을 크게 열고 있는 것은 절규하고 있는 상태로 느껴오기도 하지만, 사실은 자연을 통해 크게 부르짖는 소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다리를 건너는 도중의 상황과 뭉크의 유년기 경험이다. 서양에서 ‘다리’는 다중 의미를 지닌 상징으로 사용되는데, 그것은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것을 지칭할 수도 있고, 소중한 대상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상징일 수도 있으며, 남근의 대체물일 수도 있다. 뭉크는 다섯 살에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몇 년 뒤 그를 돌보던 이모와 누나마저 죽자 그 충격으로 평생 '여성'과 온전한 애정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불안

뭉크 고통을 직시함으로써 얻은 치유와 회복

 

붉은색 하늘은 울렁거리는 듯하고, 검은 수면은 무의식의 어두운 혼란을 표현하는 듯하다. 또 보통 흔한 수평적인 화면구성과는 전혀 수직적인 구성은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역동적인 느낌의 구도와 움직이고 있는 듯한 하늘의 모습이 정신분열증의 우울한 면이 나타나며, 이는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움직임처럼 느껴진다. 검은 모자를 쓴 어두운 얼굴의 사람들은 그의 분열증상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무리를 이루고 있고, 사람들의 표정에서 불안감을 읽을 수 있다.

 

공허한 듯하면서도 무엇의 의미를 찾으려는 기묘한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 옷의 군상의 표정은 뭉크의 자주 다루어진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면성에 대해 분열병 심리에서의 표현성, 친화성이고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뭉크의 근원적인 의문이나 불안이 이런 일련의 작품을 창작케 했다고 할 수 있다. 저녁놀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 산과들에서의 곡선적 효과는 불안한 감정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한다.

 

실제로 뭉크는 자기의 주변에는 악의에 찬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공포감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며 수차례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뭉크의 분열증 증세는 도라 라우젠과의 연애로 고민과 알콜에 의해 더욱 심해지면서 신경쇠약 상태가 한때 계속된다. 이런 환경에 처한 뭉크는 병약한 육체와 정신질환,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화필을 들었으며, 이런 공포에 승복하지 않았다.

 

  사춘기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의 특유한 감수성을 표현한 <사춘기>는 생의 중심요소인 두려움과 성적 관심을 보여준다. 뭉크의 특유의 인물의 정면 응시로 갓 피어오른 여성성을 감추려는 듯 두 손을 앞에 가지런히 놓은 자세와 커다란 눈에서는 아직 성숙되지 않은 소녀의 미지에 대한 동경과 불안이 뒤섞여서 갈등이 전달되는 것 같다.

 

등 뒤에 소녀보다 더 크게 묘사된 불안한 그림자는 화면의 마찰로 거칠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효과는 단순한 묘사가 아닌 그의 불안한 심리가 투사된 듯하다. 그의 불안과 사춘기 소녀의 기대와 불안이 겹쳐져 한층 더 화면에서 부각된다. 초경을 경험한 당황스러운 소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침대 시트와 손가락은 피가 묻어 있으며 결국 이것은 두려움과 불안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병든 아이

   
뭉크가 여섯 살의 나이로 겪은 어머니의 죽음은 그의 최초의 크나 큰 상처였다. 이후 이 상처를 다루는 것이 그의 예술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된다. 항상 그의 내면에는 생의 초반인 어린시절에 겪은 기억이 생생히 살아 있었음에 틀림없다. 과도하리만큼 예민한 아이가 죽음과 대면한 상황이었으니 그러했을 것이다. 죽음이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 즉 어머니를 빼앗아간 것이다. 

 

뭉크는 <병든 아이>라는 대작에서 마음의 짐이 되는 자신의 체험을 그리려고 처음으로 시도했다. 그래서 이 주제를 형식적으로 제어하고 내용을 그리는 일이 그에게는 해방인 동시에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된다. 그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기를 지탱해 주는 힘이었고, 자아개념을 유지하고 발전하게 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벗어나고 싶지 않은 병이며 그의 약점의 일부였다. 그의 신경쇠약과 정신병은 그의 작품 활동을 계속하게 하는 촉매제와 같은 것이었다.


 마돈나

  
뭉크가 어머니를 잃은 5세경은 남근기의 시기로 이 시기의 남자아이들은 어머니를 사랑의 대상으로 느끼고 아버지를 연적으로 보게 되어 심리적 갈등이 생기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는 시기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머니에게, 누이에게, 그리고 이모에게 계속해서 일종의 배신을 당했던 그는 여성들을 신비로우면서도 위험한 창조물들로 그려냈다. 그에게 여자는 성모와 같은 존재이지만 그를 버리고 떠난 존재이기도 하다. 무기력한 희생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여자 뱀파이어들로 우아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여성들일지라도 실상은 위험한 짐승들이라고 뭉크는 말했다.

 

이러한 여성관은 <마돈나>에서도 드러난다. 작품에서 보여지듯 마돈나상을 둘러싸고 정충을 그렸으며, 왼쪽 아랫부분에는 뼈만 앙상한 태아가 웅크리고 있다. 풍만한 육체에 자유분방한 검은 머리카락의 곡선은 위협적인 공포감을 조성하고, 오른쪽에 늘어뜨려진 정자의 움직임도 어딘지 모를 불안한 느낌을 이어준다. 사랑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을 때마저 죽음에 대해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사랑과 죽음은 서로 공존하며 동시에 나타나고 여자는 남자뿐만이 아니라 자신까지도 위험하게 하는 죽음에 지배되는 동물로서 표현되고 있다.  

 

 흡혈귀

 

원래 <사랑과 고통>으로 불렸던 이 작품은 사랑과 고통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남자에게 있어 여자의 이중성을 보이고 있으며 남자를 끌어안은 여자는 남자의 개성을 파괴하는 이중성을 가진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 젊은시절 프랑스 유학 전에 깊이 사랑했지만 자유분방한 기질로 뭉크에게 상처를 준 여인에 대한 기억이 이 작품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그림 속 남자는 목덜미를 흡혈귀에게 물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고, 여인의 붉은 머리카락이 위에서부터 아래도 흘러 남자를 감싸고 있다. 그리고 배경의 검은색과 남자의 자켓의 색상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둘 다 어둡다. 보통 여성의 이미지가 미화되어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로 나타나는 데 반해 뭉크의 작품에서는 그것이 위험, 죽음 등으로 연결된다. 

 

뭉크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래서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에서 여자를 혐오하기까지 했다. 여성을 거머리 같으며 섹스는 죽음과 교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뭉크가 가지고 있는 ‘여자에 대한 혐오’는 심리적인 이유도 있지만 학습이론적 접근에서 설명하면 여자와 어떤 자극이 연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 뭉크 고통을 직시함으로써 얻은 치유와 회복에 관한 포스팅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