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유시민님에 대한 소고(小鼓)
그가 돌아왔다.
어느 분의 표현대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같은 모습으로.
깊은 산 속 샘물에서 막 세수를 하고 난 듯 말간 민얼굴로.
언젠가는 분명 그렇게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고
애써 실망하기를 미루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서 기뻤고,
또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돌아와준 것도 고마웠다.
붓다는 사람들을 네 종류로 나누었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
빛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
이 중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으로 가는 사람과
빛에서 태어났음에도 어둠으로 가는 사람의 삶은 불행할 것이다.
반대로 어둠에서 태어났지만 빛으로 가는 사람과
빛에서 태어나 빛으로 가는 사람은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물론 누구도 어둠에서 태어날 것인지, 아니면 빛에서 태어날 것인지를 선택할 수는 없다.
다만 어둠에서 태어났더라도 빛으로 가는 삶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가능하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최근엔 이 속담도 점점 빛을 바래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반대로 빛에서 태어났음에도 어둠의 길만 걷는 사람은 말릴 길이 없다.
“굴러들어온 복을 제 발로 찬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어둠에서 태어나 빛으로 가려고 죽을 힘을 다해서 사는 사람들에겐
그들이 한심하리만큼 어리석어 보일 게 분명하다.
그렇긴 한데, 시절이 시절인지라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어둠에서 태어난 사람이
빛의 세계로 들어서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어둠의 자식들은 어둠의 자식들끼리 더 짙은 어둠 속을 헤매고,
빛의 자식들은 빛의 자식들끼리 어울려 더 밝은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정석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서로 도우면 너도 나도 다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할 때도 쉽게 외면해 버리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것도 요즘 빈번하게 나타나는 추세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아무리 시절이 이렇게 변했어도 오직 자신만의 노력으로
어둠을 뚫고 나오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는 것,
그리고 빛에서 태어난 사람임에도 어둠속에 있는 사람에게 빛의 세계로
나올 수 있도록 따뜻한 손을 내미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이 유시민님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생각한 적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별안간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 바람에 그 생각을 접은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젠 정치적 자기검열 없이 정직하게 말하고 싶다.
정치의 일상이 요구하는 비루함을 참고 견디는 삶에서 일상이 행복한 사람을 살고 싶다.
야수의 탐욕과 싸우면서 황폐해진 내면을 추스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아니라
내면의 의미와 기쁨으로 충만한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고.
즉 빛의 세계에 있던 그는 칠흑같은 어둠 속을 헤맸지만, 이제 다시 빛의 세계로
돌아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식물성의 느낌이 날 만큼 여리고 해사했던 그의 얼굴에
날카로움과 냉혹하리만큼 차가운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늘 따사로운 미소와 명민함이 감돌던 눈빛에는 적을 앞에 둔 듯 기어이 상대방을
제압하고야 말겠다는 표표함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둠의 사람들을 위해 잘못된 일을 명확하고 조리있게 짚어주던 또렷한 목소리는
빛의 사람들을 위해 강경발언을 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한없는 신뢰를 보냈던 그였기에 실망 또한 한없이 컸다.
그래서 TV를 보다가는 채널을 돌렸고,
누군가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대화 자체를 아예 거부했다.
실망 끝에 비난성의 말을 던지게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직은 실망할 때가 아니라고, 아직은 그에 대한 신뢰를 접어버리기에는
이르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러던 중 어느 해 겨울, 총동문회 행사가 있어서 광화문 파이낸스센터빌딩의
현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제법 속도있게 달려들어오던
자동차가 멈춰서는 듯하더니,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먼저 신속한 행동으로 차에서 내려
절도있는 자세를 딱 갖춰 서고, 뒤이어 역시 검은 외투차림을 한 사람이 내리자
에스코트해서 현관 쪽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큰 관심을 갖지는 않았는데,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가는 그 검은 외투차림의
사람에게서 전해져 오는 당당하다 못해 거만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기운이 예사롭질 않아
“누구지?” 하고 보니, 바로 유시민님, 그분이었다.
흔히들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거나 큰 지위에 오르면 목에 힘이 들어간다는 말을 하고,
또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조폭들이 나오는 모습을 볼 때면 깍두기 머리를 받치고 있는
그 목에 정말 힘이 잔뜩 들어가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곤 하게 되는데,
그때 유시민님의 모습이 말 그대로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간 듯한 모습이었다.
나로서는 마음속으로나마 겸손과 겸허의 상징인 간디의 모습으로까지 추앙하고 있던 분이었기에,
바로 그 순간 새삼 실망스러움을 느낀다는 절차조차 밟지 않고 단칼에 그를
마치 컴퓨터 자료라도 리셋하듯 내 머릿속에서 싹! 지워버렸다.
그 후 유시민님은 엄연히 이 세상에 존재하되 내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 이상 관심을 가졌다가는 내 머릿속에서나마 어떤 모독적인 말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고, 혹여라도 훗날 그런 생각과 말들을 되주워 담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 황망함과 부끄러움을 어찌 감당할까 싶은 생각도 슬며시
들었던 것을 보면, 아마도 머릿속 저 한 구석에서는 틀림없이
그가 돌아올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 그가 돌아왔다.
정치인에서 자유인으로 돌아와 내놓았다는 첫 책 <<어떻게 살 것인가?>>와 함께.
하지만 사실 그가 전격적으로 정치에서 손을 떼겠다는 말로 은퇴를 선언했을 때도,
또 이 책이 출간됐을 때도 전혀 관심을 갖고 싶지 않았다.
행여 또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실망에 절망마저 얹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그런데 누군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처럼 새초롬히 앉아 있는 유시민님>
이라고 표현한 것을 듣고는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은 결과는...읽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고 애써 그를 외면하고 있었더라면 내 삶에서 소중하게 생각했던 한 분을
영영 잃어버리고 사는 꼴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왜 그가, 여러 부분에서 남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그가,
(비록 그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손사래를 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빛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가
빛의 세계에 사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외면하고 있을 때
어둠의 사람들에게 왜 자꾸만 따사로운 눈길과 따뜻한 손을 내밀었는지
명확하게 알게 되는 크나큰 행복을 누렸다.
그게 늘 궁금했었다.
현재 우리 사회의 기득권자들, 그래서 자신이 소유한 많은 것을 누리느라 바쁘고,
그것도 모자라 아흔아홉 마리 양을 가지고도 양 한 마리밖에 없는 사람의 것까지
빼앗아 보태려고 혈안이 된 그들처럼 그냥 편안하게 살기만 해도 되는데,
왜 그 중 누군가는 그 풍요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는지..
워낙에 착한 성품이라느니, 너무나 양심적이어서 그렇다느니,
휴머니스트여서 그렇다느니 하는 말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런 것쯤 아랑곳하지 않고도
보란 듯이 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책에서 기적을 일으키는 ‘거울뉴런’이라는 이론을 통해 빛의 세계에 사는
사람임에도 어둠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맹자는 측은지심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했다. 측은지심이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면 누구나 깜짝 놀라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
이는 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기 위해서도 아니고, 주변사람들한테서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며, 또 이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듣기 싫어서도 아니다.
사람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 연민, 동정심, 또는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공감하고 반응하는 능력이 있는 것은 그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준 본능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똑같이 서울 강남에 살면서 특목고를 나와 명문대에 간
젊은이들 중에서 ‘우파’와 ‘좌파’가 나오는 이유에 명확한 답을 준 것은
정치학자나 사회학자도 아니고, 뇌과학자들이었다.
인간의 대뇌피질에는 특별한 기능을 하는 뇌세포가 있는데,
바로 이것이 타인의 고통이나 기쁨에 감응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자기 생존과 번식을 위해 살아가는 이기적인 동물임에도
이타적인 행동을 하며, 혈연이 아닌 타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열등한 개인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다윈의 ‘본능적 동정심’과
맹자의 측은지심은 같은 것이며, 이것이 이타행동과 복지제도를 만들어냈다.
거울뉴런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신경생리학적 장치다.
거울뉴런 덕분에 갓 태어난 아기는 부모의 표정을 모방할 수 있고,
이것이 있기에 아기는 사람들과의 감정적 접촉을 통해 상호이해와 연대의 감정을 획득하며.
말을 배우기도 전에 벌써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가까운 사람들의 태도를 바꿀 수 있다.
개인이 생존하는 데에는 사회적 결속과 유대, 상호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경쟁에서 이겨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을 이기는 능력뿐만 아니라
타인과 쉽게 공감을 이루어 협력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타인의 기쁨뿐만 아니라 아픔에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그대가 타인의 고통과 죽음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고 눈물이 나려 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임을 입증하는 생물학적 증거가 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왜 별안간 진흙탕 속 같은 정치무대에 뛰어들어
한바탕 굿풀이라도 하는 것 같은시기를 보냈는지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정치인 노무현을 좋아했고, 그가 너무 외로워보여서 정치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한 말들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소란스러운 싸움을 벌인 끝에 장관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결국 정치의 변두리로 걸어나왔고, 나가는 선거마다 떨어졌고,
그 과정에서 이성과 감정이 모두 소모되면서 인간성이 마모되고
인격이 파괴되고 있음을 매일 절감했다고 한다.
직접 만나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TV나 신문을 통해
그의 변화돼 가는 모습을 보며 전해져 왔던 느낌이 모두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는 정치의 일상을 즐기지 못했다고 한다.
“정치는 국가권력을 다루는 사업이고, 국가권력의 본질은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폭력이다. 하지만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폭력이라 할지라도 폭력으로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거나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합법적이고 정단한 폭력을 선용함으로써 사람들이 저마다
원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지만,
권력이 걸려 있기 때문에 거의 언제나 살벌한 대결과 가시 돋힌 공격, 경쟁심,
질투, 굴욕과 같은 감정의 격동을 동반한다.”
그래서 그는 글쓰기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