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있게 산다는 것] 그 존재만으로 빛났던 빅터 프랭클의 이야기
“존재 자체만으로 세상을 정당화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찬사를 듣는 빅터 프랭클. 9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전 세계를 세 바퀴나 돌면서 강의와 창작열을 불태울 만큼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빅터 프랭클에 관한 포스팅입니다.
[의미있게 산다는 것] 그 존재만으로 빛났던 빅터 프랭클의 이야기
늘 먹는 것이 문제다. 매끼 뭘 먹어야 하는지 궁리해야 하는 것도 귀찮지만, 초를 다툴 만큼 바쁘거나 전혀 식욕이 없을 때도 꼭 끼니를 챙겨야만 되는 것이 참 따분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해도, 먹는 즐거움을 빼놓는다면 삶이 또 얼마나 무미건조할까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먹고 싶을 때만 먹을 수 있거나, 아니면 필요에 따라 알약이나 캡슐 하나 꿀꺽 삼키는 것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가도 탈이 나거나, 다른 어떤 이유로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할 때를 생각하면 배부른 소리 그만둬야지....하고 반성도 해본다.
실제로 몇 년 전, 위에 문제가 생겨 거의 한 달 동안을 우유 한 모금만 마셔도 뱃속이 뒤틀리고, 부드러운 바나나를 더 부드럽게 만들려고 입속에서 살살 녹여 삼켰는데도 곧바로 토하고 했을 때는 옆엣사람들이 그 맛난 밥을 정말 맛있게도 먹는 것을 보고 눈물이 찔끔 나왔던 적도 있다.
그러고 보니 아주 하찮은 이유로 강제수용소에 끌려와 10년 가까이 매일 강도높은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운좋게 다른 날보다 한 그릇 더 얻은 귀리죽을 마치 경건한 의식이라도 치르듯 먹는 모습을 세세하게 묘사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주인공 슈호프가 떠오른다.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일 수 있는 한 끼니 한 끼니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의 절대적인 의미이자 조건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 그저 주어진 복을 감사하게 여길 일이다.
결국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어떤 자세로 삶을 맞느냐에 따라 남들이 보기엔 죽지 못해 사는 삶 같을지언정 당사자에게는 의미있는 삶이 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전혀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라 한들 본인은 죽지 못해 사는 무의미한 삶이 될 수도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더더욱 무의미한 삶이 아닌 '의미있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가 아닐까 싶다.
알렉스 파타코스의 [의미있게 산다는 것]은 스스로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로고테라피의 선구자이며 현대사상과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이자 세계적인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철학과 사상을 바탕으로 ‘어떻게 일하고 의미있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는 책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프로이트와 서신을 주고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19세에 <국제정신분석학회지>에 첫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던 빅터 프랭클은 기본적인 두 가지 사상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 중 하나는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그 의미를 묻는 질문에 스스로 답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존재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궁극적인 의미는 우리의 이해 너머에 있으며,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그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1942년 9월 나치스에게 체포돼 3년간 강제수용소에서 살면서 아내와 부모, 형제를 모두 잃은 빅터 프랭클은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매면서도 수용소에서 훔친 종이에 원고를 정리하는 것으로 삶을 지탱해 나갔다. 상상도 하기 어려운 참혹한 환경 속에서도 공포를 극복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보여준 빅터 프랭클을 통해 일과 생활, 의미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이 책은 지금 일상생활과 일터에서 불행한 일만 계속되는 것 같고 삶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져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삶과 일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고 행복을 이루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빅터 프랭클이 제시하는 <의미있는 삶을 사는 7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
1. 우리에겐 삶의 자세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2.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하라.
3. 삶의 순간순간 의미를 깨달아라.
4. 자신에게 불리한 일을 하지 마라.
5. 거리를 두고 자신을 바라보자.
6. 관심의 초점을 다른 곳으로 돌려라.
7. 자신을 넘어서라.
..........................................................................................................
누구든, 어디서나 실천할 수 있는 이 원칙들은 의미를 찾고 자유를 느끼게 해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주변사람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과 연결시켜 준다. 빅터 프랭클이 몸소 보여준 삶을 통해 우리가 짚어봐야 할 점들은 그 외에도 참으로 많지만, 특별히 새해를 맞아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되새겨본다.
<일과 일 사이의 의미 찾기>
저자는 일터에서 적극적으로 의미를 찾고 싶다면 맨 먼저 ‘불평을 멈추라’고 말한다. 불평은 순간적인 즐거움을 줄지는 몰라도 자신이 하는 일, 그리고 일과의 관계에서 의미를 앗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불평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언제, 왜 불평을 하는지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순간적인 자기위안을 위해 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슨 일이든 부정적으로 보는 습관 때문에 불평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평이 습관이 되면 풍요로운 삶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놓치게 된다. 또 불평은 불행을 자초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 사이에 장막을 치고, 왠지 희생자가 된 듯한 기분에 빠지게 하고 무기력함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그러나 불평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 현실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더 깊고 진실되게 연결될 수 있다.
빅터 프랭클은 절망의 어둠을 뚫고 의미를 발견했다. 그 의미는 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의미를 찾기 위해 마음을 열 때, 그리고 시간을 가지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의미있는 방식으로 이해할 때 자신뿐 아니라 주변사람들의 삶의 질까지 향상된다.
<역경을 이기는 자세>
삶의 자세를 선택하는 것에 대한 책임은 오직 자신에게 있으며, 그 책임은 다른 누구에게도 떠넘길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뿐, 해결책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불평을 늘어놓는다고 해서 해결책이 알아서 나타날 리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나서야 한다. 만일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에 있을 때 이런 대처자세를 취하지 않았다면 그는 살아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과 열정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의미는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니다.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의미는 찾지 않으면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집세를 내기 위해 해야 한다면, 그 일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또 직장상사가 까다롭고 오만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불평만 하고 있기보다는 그 곤경에서 인생 교훈을 발견하거나, 혹은 그 기회를 이용해 까다로운 사람 앞에서 처신하는 능력을 기르는 방법도 있다.
<감정적 거리감이 주는 효과>
우리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실수에 초연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유익한 기술이다. 실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웃을 수 있다면 주변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 실수는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더 나아가 의미를 가르친다. 그리고 실수는 삶과 함께한다. 단, 실수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실수를 했습니다”라고 인정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그럽게 받아들여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수를 곱씹으며 지나치게 연연해한다.
실수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어려운 상황에서 떼어내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자기이탈이 필요하다. 자기이탈은 자기부정과 다르다. 자기이탈은 의도적이고 행동지향적이다.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알며,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안다. 반면에 부정은 경험과 경험이 줄 수 있는 장점을 우리에게서 앗아간다. 부정은 연결을 끊어놓지만 자기이탈은 학습과 성장으로 이어진다.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 종종 이 자기이탈 기법을 이용해서 스스로를 포로가 아니라 ‘관찰자’로 생각하곤 했다. 다음 글을 읽어보면 그가 자신이 생존을 위해 자기이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되풀이해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불행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 어느 날 아침 수용소의 작업 현장으로 줄을 서서 가는데 배고프고 춥고, 동상과 부종으로 신발 속에서 퉁퉁 부어오른 발이 아파서 걷기가 힘들었다. 상황은 암울하고 너무나도 절망적으로 보였다.
그때 나는 아름답고 따뜻하고 밝은 강당의 연단에 서 있는 상상을 했다. 나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청중에게 ‘수용소에서의 심리치료 경험’에 대해 강연을 할 참이었다. (그는 나중에 실제로 이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그 상상의 강연에서 나는 지금 견디고 있는 일들을 이야기했다. “신사숙녀 여러분, 당시에 나는 언젠가 이런 강연을 하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도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자유는 앗아갈 수 없다.
이상, [의미있게 산다는 것] 그 존재만으로 빛났던 빅터 프랭클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