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의 필승법 세상은 약자들이 바꿔왔다
알렉산더 대왕은 "내가 두려워하는 적은 사슴이 있드는 사자들의 무리가 아니라 사자가 이끄는 사슴들의 무리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도 사슴 정도의 인력들이 모여 있다 해도 사자처럼 강한 리더만 있다면 강한 군대가 될 수 있다고 설파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풍요롭고 넓은 국토를 갖고 있지 못해도, 빠른 속도로 달리는 말 위에서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는 기병전사가 부족해도 평범한 전사들로 구성된 보병들을 잘 훈련시켜 기병을 이길 수 있는 최강군대로 만들었습니다.
대기업의 경험과 벤처창업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삼아 자신의 강점을 살린 1인기업가의 길을 걷고 있는 안계환의 [인문병법]에는 척계광의 변칙전술, 마윈과 알리바바의 조직력, 을지문덕의 청야전술 등 약자의 위치에서도 이기는 전술을 구사하여 세상을 바꿔온 사람들과 기업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이 중 [약자의 필승법 세상은 약자들이 바꿔왔다]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변화는 약자들이 먼저 추진하게 마련입니다. 어차피 기존 방법으로 이길 수 없다면 전혀 새로운 방식을 찾고 개발하고 혁신해서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약자가 생존하는 길이며, 약자들이 세상을 바꿔올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인문병법의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의 필승법에 대해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약자의 필승법 세상은 약자들이 바꿔왔다
고려 말과 조선에 걸쳐 왜가 극심한 피해를 준 것처럼 동시대 명나라에도 골칫거리였다. 수십에서 수만까지 다양한 그룹으로 구성된 왜구는 해안지역 뿐만 아니라 도시 깊숙이 쳐들어와 장터, 부잣집, 관공서를 습격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했다. 왜구에게 당하는 피해가 극심해지자 지역유지들은 명나라 정부에 호소하여 유능한 장소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산동성 출신 장수 척계광이 부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부친의 지위를 이어받을 정도로 전형적인 무장가문 출신인 그도 처음에는 무능한 군사들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고전적인 방식으로는 강력한 사무라이들을 이길 수 없음을 알게 된 척계광은 먼저 기존 군대를 해산하고 병사들을 시골 출신들로 새로 모집했다. 그들은 기존 진법을 몰랐기에 새로 도입하는 전술훈련에 잘 따랐다. 두번째는 사무라이들을 이길 수 있는 ‘원앙진’이라고 진법을 찾아냈다. 수컷이 죽으면 암컷도 따라 죽는다는 원앙에서 따온 것이었다. 대장 한명과 취사병, 그리고 전투원 열 명인 분대는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왜구들을 막기에 최적이었다. 개개인의 전투력으로는 사무라이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지만 한 팀의 일원이 되어 싸울 때에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 것이다.
또한 척계광은 병사들에게 끊임없이 창의적 행동을 요구했고 부하장수들에게는 병사들을 치열하게 교육시키도록 명을 내렸다. 그 결과 명나라군은 절강성 지역을 괴롭히던 왜구와 싸워 5년간 80여 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으며 왜구에게 피해를 입던 인근 광동성과 복건성 지역에도 파견되어 큰 공을 세웠다. 이기는 전술을 개발한 척계광의 탁월한 노력의 결과였다.
세계 최고 온라인 상거래기업 하면 흔히 아마존과 이베이를 떠올리지만 실제로 가장 큰 회사는 중국 온라인 전자상거래 그룹 알리바바다. 알리바바 산하의 쇼핑몰 ‘타오바오’와 ‘톈마오’의 거래액은 연간 250조원에 이른다. 이런 대단한 회사를 세운 마윈은 지금은 중국 비즈니스계의 나폴레옹이라 불리지만 그의 별명은 원래 ‘못난이 윙’이었다. 1964년 중국 항저우에서 태어난 마윈은 삼수 끝에 항저우 사범학원에 입학해 영어를 배웠고 미국 하버드대학에 10번 지원했다가 떨어졌으며 취업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1995년 미국에 갔다가 인터넷을 처음 접하게 되고 이메일도 제대로 보내지 못할 정도로 컴맹이었다. 처음 세운 홈페이지 제작회사는 금세 망하고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전형적 약자의 처지였다.
그런 그가 대단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약자의 첫번째 전략은 우연인 것 같은 필연 덕분이었다. 1998년 첫 사업에 실패한 후 관광가이드와 영어교사를 병행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던 그는 천운인지 야후 창업자 제리 양의 만리장성 가이드를 맡게 된다. 이때 그의 설득력과 영어실력이 발휘되는데 자신의 사업구상에 제리 양이 긍정적 반응을 얻었고 2년 후 손정의 회장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마윈은 손정의 회장을 만나 무려 2천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투자받았는데, 놀랍게도 투자결정은 겨우 6분간의 사업설명으로 이뤄졌다. 결국 마윈이 가지고 있던 사업에 대한 열정, 영어실력, 대인관계 설득력이 우연과 합쳐져 이룬 큰 성과였다.
마윈의 성공전략 두번째는 비즈니스의 본질인 고객을 생각하는 수준이 남달랐다는 것이다. 알리바바는 고객에 대한 헌신이 남다르다. 마윈의 기업 운영방침이 회사의 주주보다 고객을 우선시하는 마인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가져다주는 고객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마윈의 기업운영 방침은 덩치 늘리기에 급급한 많은 기업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 마윈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성공요인은 평범한 진리 속에서 성공으로 이끌어내는 강력한 실천력이었다.
수양제가 우문술, 우중문 등의 장수로 하여금 30만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했을 때 군사들은 1인당 100일치 양식을 지급받았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무거워 행군하는 도중 많은 병사들이 양식을 땅에 묻기까지 했다. 처음부터 장기적 보급계획이 없었던 셈이다. 적이 숫자는 많지만 식량보급이라는 약점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을지문덕 장군은 후퇴를 하면서 청야전술을 폈다. 적군이 지나갈 길목에 있는 백성들을 산 위에 있는 요새로 옮기고 가축이나 식량을 감추었으며, 우물을 메워 적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농가와 마초들을 불태우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 했다. 또 멀리서 간간이 가벼운 공격을 할 뿐 대적해 싸우지 않았다. 그렇게 수나라군이 고구려에 깊숙이 쳐들어온 즈음이 되자 수군은 식량이 떨어져 곤란한 지경이 되었다. 적정을 살피던 을지문덕은 적장 우중문에게 "그대가 이룬 전승의 공은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았으면 그치는 것이 어떠하오”"라는 글을 보내 사기를 떨어뜨렸으며 우문술에게도 사자를 보내 영양왕이 황제에게 항복을 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식량이 떨어져 미래가 불투명한 적장을 치켜세워 주고 그들의 마음을 흔든 셈이다. 결국 우문술은 우중문을 설득하여 요동으로 퇴각할 것을 지시하게 된다.
이렇게 철수하는 수군이 살수에 도착하여 강을 반쯤 건널 무렵 고구려 군사가 뒤로부터 수군을 공격하니 모든 군사가 무너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싸움으로 요동지역까지 살아 돌아간 수나라 병사는 2,700여명에 불과했다. 결국 을지문덕의 청야전술이 탁월한 승리를 거두었고 수양제의 고구려 정벌도 끝을 맺게 되었다.
적이 바다를 통해 공격해 들어오는데 우리편 해군이 허약하다. 그런데 정부에 소속돼 있지는 않아도 적이 되는 나라를 괴롭히고 있던 해적들이 있다. 이들을 잘 이용해 보자는 생각을 품은 사람은 바로 영국을 강력한 해상왕국을 만드는 데 기초를 다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었다. 해적이 아니면서 해적질로 유명했던 사람은 영국인 드레이크였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르는데 큰 역할을 했고 넬슨 제독과 함께 잉글랜드 최고의 바다 영웅으로 추앙받는 사람이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강력한 스페인과 나머지 세력들간 경쟁 상황이었다. 드레이크는 작고 빠른 배와 강력한 무장을 갖춘 선원들을 확보한 해적선단을 조직하여 스페인 선박들은 물론이고 스페인 소유의 여러 보물저장고들을 타겟으로 약탈을 하고 다녔다. 그의 활동범위는 주로 스페인 세력권이었기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남아프리카, 인도양까지 걸쳐 있었다. 이러한 해적두목 드레이크의 전세계적인 약탈 행각은 스페인 펠리페 2세의 분노를 자아냈는데,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해적두목을 당장 체포하여 넘길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때에 대규모 스페인 함대가 잉글랜드 해협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영국 여왕에게 들려왔다. 우선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배들을 모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해군도 집결시켰다. 하지만 배와 병력이 모자랐다. 이때 여왕이 떠올린 것은 스페인 배들을 괴롭히고 있는 드레이크의 해적선들이었다. 비록 스페인 군에게는 해적일지 몰라도 잉글랜드인인 것만은 틀림없고 그들의 해군력은 강력했다. 특히 드레이크의 해전경험은 높이살만 했다. 그래서 드레이크와 선원들을 잉글랜드 해군에 포함시켜 전쟁에 가담시키기로 했다. 고대를 거쳐 중세시대에 흔했던 용병으로 쓰기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 잉글랜드는 해적이었던 드레이크를 정식으로 임명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해군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는 점차 해상세력으로서 대양에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스페인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와 함께 세계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300년간 이어진 잉글랜드의 전성기는 비록 해적이었지만 국가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활용 가능하다고 생각한 엘리자베스 여왕 덕분이었다.
남극 정복을 위해 영국 남극탐험대 및 남극횡단 탐험대를 이끌고 남극 탐험을 시도했던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에서 관심을 둘 만한 점은 섀클턴이 어떻게 해서 27명의 대원들을 한 명의 낙오도 없이 돌아오게 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데는 리더 섀클턴이 가진 몇 가지 역량이 큰 역할을 했다.
첫번째로 전문성이 확보되어 있었다. 섀클턴은 인듀어런스호와 함께 하기 전에 이미 두 번이나 남극지역 탐험 경험이 있었고 남극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확보하고 있었다. 한 번은 괴혈병에 걸려서 중도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두번째 도전에서도 남극점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리더로서 역량을 축적하는 데는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섀클턴은 강인한 육체 소유자였기에 험난한 바다를 항해할 때 다른 동료들에 비해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두번째로 솔선수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인듀어런스호에는 다양한 직업과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섀클턴은 리더로서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거나 지시하려 하지 않았다. 새로운 길을 뚫어야 하는 길을 탐색할 때도 언제나 앞서서 길을 열었으며, 사우스조지아섬 빙하를 횡단하는 험난한 등산과정에서도 늘 앞장서서 위험을 무릅썼다.
세번째로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고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살렸다. 엄청나게 춥고 어두운 남극지역에서 634일이나 삶의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섀클턴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생각을 모으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유도했다. 작은 가능성이었지만 치밀한 계획을 세워 부하들을 이끌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성공으로 이어진 것이다.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지만 그가 취했던 외교전략 만큼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광해군이 왕위에서 쫒겨난 이후 나타난 결과들을 보면 왜 그가 그런 외교 전략을 했어야 했는지가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기미책’이란 단어로 요약된다. ‘기미’란 굴레를 가지고 소나 말의 얼굴을 붙들어매는 것을 말하는데, 중원 정권이 흉노나 주변 민족을 대했던 방식으로, 견제하면서도 관계를 끊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조정은 만만치 않은 세력으로 등장한 누르하치와 관계를 유지하되 섣부른 모험을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려 했다. 강력한 기마병을 보유한 만주 여진족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조총, 화포 등 신무기를 개발,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봤고, 또 일본과 관계유지에도 힘썼다. 그만큼 광해군은 분명한 현실주의 외교를 지향했다. 즉 광해군은 종이호랑이로 힘을 잃어버린 명나라와의 관계도 유지하면서 떠오르는 호랑이 후금에 대한 대비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실리적 외교술로 원수 사이일 수밖에 없던 일본과도 원만한 사이로 만들었다.
명분론으로만 보면 이런 외교가 자존심상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국가 운명이 달려 있는 변화의 시대에는 실리외교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광해군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명분의 시대로 되돌아감으로써 조선이 참혹한 전란을 다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광해군의 외교전략이 얼마나 시대를 잘 읽었었나를 알려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시 프랑스군 전차부대장이었던 샤를르 드골은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새 지도자가 된 필리프 페탱은 더 이상 방어할 수 없다고 생각해 독일과 휴전을 추진했고, 이를 인정할 수 없었던 드골은 런던으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프랑스 망명자들을 이끄는 리더가 되어 프랑스 국민들에게 전쟁에 맞설 것을 BBC방송을 통해 호소했다.
“지금 프랑스는 독일의 침공으로 어려움에 빠져 있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영국이 지원하고 있고 막강한 미국의 도움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프랑스에서 전투로만 결정될 것이 아니고 다양한 지역에 있는 국민들의 저항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전쟁이 길어져 고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모든 프랑스 남성들은 힘을 모아 싸움에 동참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당시 프랑스 북부는 독일이 점령했고 남부는 페탱이 독일 괴뢰정부인 비시(Vichy) 정권을 설립해 이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드골이 런던에서 저항을 호소하자 프랑스 내에서는 레지스탕스가 활발하게 조직되었고 해외에서는 자유프랑스군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입대했다. 비시정권은 드골이 참석도 하지 않은 법정을 열어 사형을 선고했고, 그는 다시는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1944년이 되어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연합군에 의해 전개되자 드골은 자유프랑스군을 이끌고 돌아와 파리를 해방시켰고, 전쟁이 끝난 후 선거에 의해 프랑스 총리로 선출되었다. 이후 드골은 대통령에 취임하여 국가를 이끌고 나라를 빛낸 영웅이 되었다.
이상, 약자의 필승법 세상은 약자들이 바꿔왔다입 니다. 도움이 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