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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육룡이 나르샤 최영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던 원칙주의자

 

육룡이 나르샤 최영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던 원칙주의자

 

 

조선의 기틀을 세운 태종 이방원(유아인)을 중심으로 태조 이성계(천호진), 삼봉 정도전(김명민) 등 6명의 야망과 성공스토리를 그려나가는 팩션사극 [육룡이 나르샤]는 이방원의 물밑노력으로 이성계와 정도전이 곧 손을 잡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혼탁하기 그지 없던 고려는 멸망하고 신조선이 세워지기 직전입니다. 그런데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인 고려 말을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로 회자되는 최영 장군입니다. 흔히 "패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만,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망해가는 고려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최영 장군이기에, 잠깐잠깐 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안타까움이 앞섭니다. 

 

최영 장군은 새로운 세력의 손을 잡기만 하면 안위가 보장되는데도 뿌리치고 꿋꿋이 자기 길을 갔던 강직한 분입니다. 게다가 더없이 청렴해서 무인이자 명장으로 공을  세울 때마다 국가에서 하사받은 전답을 매번 백성들에게 나눠주고는 자신은 좁은 집에서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최용범의 [하룻밤 안에 읽는 고려사]를 바탕으로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던 원칙주의자 최영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육룡이 나르샤]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최영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던 원칙주의자

 

육룡이 나르샤 최영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던 원칙주의자

 

최영은 고려 후기의 학자로 집현전 태학사(太學士)를 지낸 최유청(崔惟淸)의 5대손인 최원직(崔元直)의 아들로 태어났다. 5대조 최유청은 무신란이 일어나 많은 문인들이 살육당했을 때도 화를 면할 만큼 덕망이 높은 분이었다.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가문이 성하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훈을 남길 만큼 강직하고 청렴한 감찰관이었다. 즉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은 최영이 한 말이 아니라 최영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남긴 유훈이었다. 이런 강직한 아버지의 뜻을 최영은 평생 잊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던 최영은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혀 무장의 길을 걸었다.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 패한 적이 없는 최영을 용의 얼굴에 봉의 눈, 범의 걸음걸이를 지녔다고 말하곤 했다. 

 

최영은 무관으로 출직하여 왜구를 막는 데 공을 세워 왕의 근위대원이 되었다. 그 뒤 공민왕 원년(1352)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공민왕 3년 39세에 대장군(종3품)으로 진급했다. 그 후에도 최영의 전공은 거듭되어 중국에서 일어난 홍건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원정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우면서 중원의 급변하는 정세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공민왕 때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침공한 홍건족을 서북면병마사로서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홍건족에게 점령당했던 개경을 탈환했을 때 김용의 사주로 일어나 공민왕 역모 시도도 사전에 탐지하여 저지했으며, 이 공으로 관밀직사사(오늘날의 국방장관)로 임명됐다. 이어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옹립하기 위해 고려를 공격하게 했을 때도 이성계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나가 격멸시켰다. 이처럼 최영은 홍건족, 왜구, 원의 침략을 무장으로서 앞장서 막아냈던 고려 말의 영웅이었다.

 

 

최영은 우왕 즉위 후에도 삼남지방에서 극성이던 왜구를 격파하는 데도 전념을 다했다. 우왕 2년(1376) 홍산대첩이라 알려진 공주에서의 전투에서 최영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으로 대규모의 왜군을 격파했다. 삼면이 절벽인 험한 진격전에서 병사들은 두려워 전진하지 않았자 그는 노구를 이끌고 진두하여 전투를 이끌었다. 그때 왜병이 쏜 화살에 입술을 맞아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화살을 쏜 왜구에게 활을 쏴 사살한 뒤에야 입술에서 화살을 뽑았다. 그런 용장 앞에서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진격하여 왜구를 섬멸하는 홍산대첩을 이뤄냈다.

 

이 싸움의 공으로 우왕은 최영을 시중을 임명하려 했지만 그는 시중이 되면 전시에 쉽게 출격할 수 없으니 벼슬을 받을 수 없다며 사양했다. 최영은 우왕 3년(1377)에는 서강에 침입한 왜구를, 이듬해에는 승천부(풍덕)로 침입해 온 왜구를 막았다. 그리고 우왕 7년(1381) 수시중으로 임명된 최영은 중앙 정계에서도 과단성 있고 청렴한 정치노선으로 일관했다. 당대 최고의 권세가였던 문하시중 이인임이 청탁을 면전에서 거절하는가 하면 우왕의 유모인 장씨가 정사에 관여해 물의를 일으키자 참형에 처하기까지 했다. 우왕은 눈물로 유모의 선처를 호소했지만 최영에게 타협은 없었다.

 

 청빈했던 최영

 

 

무관으로서 가장 출세했던 최영은 사는 집이 누추했으나 이에 만족했고, 음식이나 의복이 검소하고 흔히 끼니를 끓일 쌀이 없을 정도로 청빈했다. 최영이 시중으로 있던 당시 개성의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적이 있었다. 정세가 불안해 물가가 폭등했던 것이다. 장사꾼들은 한푼이라도 이익을 더 얻으려고 물가를 올려 폭리를 취했다. 이에 최영은 매매되는 물건에 정가를 표시하는 세인(稅印)을 찍어 물가의 안정을 꾀하면서 세인 없이 거래하는 상인은 갈고리로 등을 찍을 것이라는 엄명을 내렸으며, 실제로 개경 시내에 큰 갈고리를 걸어놓아 상인들은 두려워 벌벌 떨 정도였다.

 

최영은 살찐 말을 타고 다고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벼슬아치들을 개나 돼지같이 멸시했다. 고려 말 그 더러운 진흙탕 속을 뒹구는 것 같은 권력싸움에서도 최영은 전쟁에서는 명장인데다 정치에서는 사심과 욕심이 없어 보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영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간신 이인임과 손을 잡고 국정을 이끌어나갔다. 그러나 이인임의 국정 농단이 극에 달하자 이성계와 손을 잡고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 일파 100여 명을 숙청하고 시중에 올랐으며, 딸을 우왕의 왕비로 들임으로써 우왕의 장인이 되었다. 그러나 요동정벌의 좌절로 일어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반란으로 체포돼 고봉에 유배되었다가 참수되어 목은 효수되고 시체는 길가에 버려졌다.

 

한국전쟁 전만 하더라도 개성 부근의 덕물산은 무당들이 최고로 치는 영산으로 무당부락이 있었다고 한다. 덕물산 꼭대기에는 최영 장군을 모시는 장군당이 있어서 2년 간격으로 음력 3월 전국 무당들이 모여서 행하는 대규모 굿판이 벌어졌다. 굿이 끝난 뒤에는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이때 나오는 음식은 국내 최고의 진미로 치는 '성계육'이라는 돼지고기였다. 태조 이성계의 이름을 딴 돼지고기를 먹는 것으로 굿을 마무리하는 것인데, 최영을 죽인 이성계에 대한 분노를 백성들은 이렇게 풀었다. 인생 말년에 정치적으로 대패하여 비참한 죽음을 당한 최영이지만 백성들의 가슴속에는 이렇게 살아남은 것이다. 

 

이상, 육룡이 나르샤 최영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던 원칙주의자였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