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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조선의 청백리 박수량과 청백리 정신

 

조선의 청백리 박수량과 청백리 정신

 

조선의 청백리 박수량

 

 

청백리(淸白吏)란 조선시대 대신, 대간(臺諫) 등의 추천을 받아 공식적으로 인정한 청렴한 관직자를 말합니다. 당시 청백리들이 지켰던 공직윤리는 자신을 수양한 후에야 비로서 남을 교화한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었으며, 청렴과 근검, 도덕 등을 매우 중요시했습니다. 즉 조선시대에 청백리 정신은 선비사상과 더불어 이상적인 관료상이었습니다.

 

오늘 포스팅은 EBS 역사채널e에서 방영한 조선의 청백리로, 어떤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아서 주인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비석 백비(白碑)의 주인 박수량((朴守良)을 통해 알아본 청백리 정신입니다. 

 

 

조선의 청백리 박수량의 백비에는 숨겨진 사연이 있다 

 

 

전라남도 장성에는 이름은 물론 그 어떤 것도 적혀 있지 않아서 묘의 주인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비석이 있는데, 그 속에는 특별한 사연이 숨어 있다. 그 비석의 주인은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섰던 박수량이다. 그는 세상을 떠난 후 가족들이 상여를 메고 고향에 갈 돈조차 없어 조정에서 장례비를 지원해 줄 정도로 청렴했다.

 

 

 

 

조선 13대 임금 명종은 “그의 청백함을 알면서 비에다 새삼스럽게 그 실상을 새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백에 누가 될지도 모른다”며 ‘수량의 청백한 이름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지 오래다“라 하고 비를 하사하라고 명하는 한편 그 비에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하게 하고 다만 그 맑은 덕을 표시하기 위해 이름을 백비라 부르게 했다.

 

 

 

 

조선시대 유일한 백비의 주인인 청백리 박수량은 중종, 인종, 명종 세 명의 임금을 모신 38년의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한 관리였다.

 

 

 

 

김인후가 지은 박수량의 묘지명 중에는 "삼정승(三政丞) 육판서(六判書) 지위에까지 올랐지만 초가삼간조차 없었던 청렴한 선비"라고 씌어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인물백과사전인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따르면, 명종이 보낸 제문에 "경(박수량)은 안으로는 많은 학덕을 지녔으면서도 겉으로는 항상 부족한 것처럼 하였으며 집에는 한줌의 곡식도 없었으니 더욱 아깝고 애석하다"고 씌어 있다.

 

 

 

 

청렴결백한 삶을 기리기 위해 명종이 백비를 하사한 박수량은 청백리로서 이름높은 주세붕과 이황과도 교유하면서 정론을 나누기도 했다. 

 

 

 

 

청백리 제도란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이 있는 곳에 존재하기 마련이었던 부조리,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방지하고 사회기풍을 진작하기 위한 장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청백리 제도란 청렴결백한 관리를 양성 및 장려할 목적으로 실시한 표창제도로, 욕심많고 탐욕스러운 풍조가 활개를 치고 있으니 청백리를 표창하고 상을 주어 관료들을 고무시킨다면 염치를 아는 기풍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씌어 있다.

 

청백리 선발절차는 의정부와 이조가 2품 이상 관료들에게 청렴 근검한 적격자 2명씩 추천을 받고, 그 추천자들을 육조판서가 심사하여 추린 뒤 국왕의 재가로 최종 확정했다.

 

 


 

그리고 암행어사를 출두시켜 해당관리의 실상을 면밀히 조사하는 한편 청렴하기는 하지만 정사에 소홀한 이는 오히려 탄핵을 받기도 했다. 그 예로 여주 목사(정3품에 해당) 김현성은 스스로는 청렴하나 모든 공무를 아전들에게 위임해 백성의 원망이 극심해서 파직되었다.  

 

청백리 주요 녹선자(당선자)로는 인사담당자인 이조판서와 오늘날 총리, 장관급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주로 유혹과 뇌물공세가 심한 고위직 관리의 청렴을 높이 평가했다.

 

 

 

 

청백리가 되면 후손들에게 선조의 음덕을 입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특전도 주어졌다. 그러나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조정에 청백리의 자손을 등용하라는 명은 있으나 오직 뇌물을 쓰는 자들이 벼슬을 하고 청백리 자손들은 모두 초야에서 굶주려 죽고 만다"고 씌어 있다.

 

 

 

 

한말의 유학자 강효석(姜斅錫)이 우리나라 역대 인명에 대한 전거(典據)를 기록한 전고대방(典故大方)에 기록된 숫자에 따르면 조선왕조 500년 역사 중 청백리 단 218명이었다. 218명의 주인공은 황희와 이황, 맹사성 등이다. 황희는 영의정 18년 등 관직생활을 하는 60년 동안 계속 청백리로 뽑혀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맹사성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청백리였다. 세종이 부왕의 [태종실록]이 편찬된 것을 알고 보기를 원했으나 사관외인이 보면 역사의 공정성을 기할 수 없었기에 사관 외에는 누구도 볼 수 없었다. 이때 맹사성이 나서서 “실록이란 사실을 기록해 후세에 보이기 위한 것인데 이를 전하께서 보시고 고친다면 후세 임금이 이를 본받아 또 고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관들이 두려워 제대로 기록하지 못할 것입니다”하고 간곡히 만류했다. 

세종도 그 뜻을 받아들여 태종실록은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전해졌으며, 훗날 실록이 문제되거나 국왕이 함부로 첨삭할 뜻을 보이면 언제나 이 맹사성의 고사가 인용되곤 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청백리를 표창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모두 218명의 청백리가 선발되었다. 임금별로 보면 태조 5명, 태종 8명, 세종 15명, 세조 8명, 성종 20명, 중종 34명, 명종 45명, 선조 27명, 인조 13명, 숙종 22명, 경종 6명, 영조 9명, 정조 2명, 순조 4명이다. 헌종 이후 조선 말기에는 청백리를 뽑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노론의 일당 독재 소수 가문이 권력을 행사하는 세도정치가 이행되면서 관리들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탐관오리가 만연하여 청백리 제도는 유명무실해졌으며, 순조 이후에는 청백리에 오른 이가 없었다.

 

임금의 사생활이 깨끗하고 덕이 있어 민중에게 존경받은 것은 숙종과 영조 때였다. 숙종은 인자하고 영조는 검소했다. 조선왕조가 쇠망의 길로 들어선 것은 영조 이후였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비정한 임금이었지만 세종대왕 못지않게 문예부흥과 경제발전에 성공한 임금이었다. 하지만 정조가 즉위한 뒤로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해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기강이 흐트러져 갔고, 순조에 이르러서는 모든 권력을 안동 김씨에 맡기고 임금은 구중궁궐에 숨어버리는 바람에 엄청난 사회혼란이 빚어졌다.

 

 

 

 

공직자의 어려운 덕목이었던 투명성과 정직성, 오늘 우리는 청백리 정신의 또 다른 백비를 기다리고 있다.

 

 

조선의 청백리 박수량과 청백리 정신,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