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옛 사람들이 <신을 위해> 행했던 것을, 요즘 사람들은 <돈을 위해> 행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돈은 베풀고 나눠주는 수단이 되어야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되면 사람들은 단지 돈을 모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삶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기 때문입니다.
<나를 바꾸는 행복한 10분 묵상>에는 어느 영화편집자의 고백이 실려 있습니다.
나는 어느 날 저녁 어떤 여자와 데이트를 했는데, 그녀는 해변을 따라 걷고 싶어했다.
나는 100만원짜리 양복을 입고 15만원짜리 넥타이를 매고 있었으며
20만원짜리 셔츠를 입고 50만원짜리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내 양복을 세탁하는 데는 5만원이 들고, 내 셔츠를 손으로 세탁하는 데는 2만원이 들었다.
만일 내 넥타이에 스파게티 소스가 한 방울 튀면 얼마나 비용이 들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내가 바지를 걷어올리고 해변을 따라 걷기를 원했다.
내 머릿속은 만일 이 여자가 모래 위에 앉고 싶어할 경우
비용이 얼마나 들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내가 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최후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내 옷에 드는 비용을 과연 댈 수 있을까?”
한편 법률가인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이 쳇바퀴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은 거기에 갇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끝도 없이 돌고 도는 회전목마와도 같다.
돈이 얼마나 있어야 충분할까?
아니, 돈은 얼마가 있든 결코 충분할 것 같지가 않다.
3년 전에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조금만 더 벌면.....”
지금 나는 전보다 두 배를 벌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전혀 충분하지가 않다.
위 글을 읽으니 몇 년 전 친척어르신이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세상 떠날 날도 오래지 않았으니,
그 동안 열심히 살아온 데 대한 보상으로 죽어라고 모으기만 했던 돈,
이제부터는 아끼지 말고 오로지 자신과 아내를 위해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동차며 가구며 옷이며 최고로 좋은 것으로,
거금을 투자해서 새로 싹 바꾸고 나니 그렇게 기분이 좋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좋은 자동차에 손주들을 태우면 차를 더럽힐까봐 걱정이 되고,
뱀가죽이라나 하는 소파에 앉아 짜장면이라도 먹고 있으면 소파에 뭘 묻힐까봐 질색을 하게 되고,
비싼 양복에 행여 침이라도 묻을까 싶어 어린 손주들을 안아주는 것도 꺼려지더라는 겁니다.
다행히 어느 순간 자신의 그런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 순간 바로 "에라, 모르겠다! 손주가 소중하고 중요하지 저딴 것이 다 뭐람!" 싶어
마음을 탁 내려놓고 나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랍니다.
스스로 마음의 감옥을 만들어 살았던 셈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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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을 쓴 헨릭 입센은 “돈이란 많은 것들의 껍데기이지 알맹이는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돈이란 음식을 가져다주지만 식욕을 가져다주진 못하고
약을 가져다주지만 건강을 가져다주진 못하며
사람을 사귀게 해주긴 하지만 친구가 되게 해주진 못하고
하인을 부리게 해주긴 하지만 충복이 되게 해주진 못하며
향략의 나날을 가져다주긴 하지만 평화로운 행복을 가져다주진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