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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살인자의 기억법 가정폭력이 만들어낸 살인마 설경구 김남길

 

살인자의 기억법 가정폭력이 만들어낸 살인마 설경구 김남길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설경구, 김남길, 두 살인자, 아니, 두 살인마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을 착잡한 심정으로 보고 있는 동안에 문득 떠오른 시귀절이다. 누구의 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집에 돌아와 검색을 해보니, 정호승 시인의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시귀절이었다.

 

아무리 죽어라 열심히 살아도 누구 하나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주지 않는 서글프고 비참한 삶을 살아온 사람의 넋두리였다. 정호승 시인 또한 인생이 나를 사랑하지 않기에 이렇듯 고통의 도가니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어느 날 쓴 시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인생에 대한 강한 분노도 뼈아프게 느껴진다.

 

금수저니 은수저니 흙수저니 하고 수저계급론을 논하며 흙수저인 인생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는 세상이지만, 그 흙수저 인생에서조차 처절하게 소외됐던 두 살인자 김병주(설경구)민태주(김남길)의 참혹한 삶. 어쩌면 그들이 그런 삶을 살게 된 원인의 뿌리는 "인생이 그들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은 데" 있지 않았을까?

 

살인자의 기억법 가정폭력이 만들어낸 살인마 설경구 김남길

 

그 때문인지 비록 그들이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여온 연쇄살인범들이었음에도 악마성을 지닌 인간으로 여겨지기보다는,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게 원죄라는 생각이 들어 차라리 불쌍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극악한 범죄자들도 어린시절 가족이든 이웃으로부터든 사랑과 관심이 담긴 따뜻한 말 한마디만 들었어도 인생이 달라질 수 있었을지 모른다던 어느 변호사님의 말도 떠올랐다. 그들을 그런 살인마들로 키워낸 것은 바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가정폭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천성적으로 타고난 살인마일 수도 있다. 또 가정폭력의 희생자라고 해서 다 살인자가 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이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명분을 주는 것도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저 남편이라는 이유로, 혹은 그저 아버지라는 이유로 날이면 날마다 밤낮으로 날아드는 폭력을 견뎌야만 하는 삶을 살아왔다면, 그 끝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아니면 독안에 든 쥐처럼 목숨을 걸고 반항하는 것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불보듯 뻔하다. 외면으로야 멀쩡해 보인다 한들 그 내면은 극한공포에 사로잡힌 상처투성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뭐 있겠는가.

 

 

스포일러의 염려가 있으니 홈페이지에 소개된 스토리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예전에는 연쇄살인범이었지만 지금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병수. 우연히 접촉사고로 마주치게 된 남자 태주에게서 자신과 같은 눈빛을 알아채고 그 역시 살인자임을 직감한다. 병수는 경찰에 그를 연쇄살인범으로 신고하지만 태주는 경찰이고, 아무도 병수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 후 태주는 병수의 딸 은희(설현) 곁을 맴돌며 병수의 주변을 떠나지 않고, 병수는 혼자 태주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를 쫓지만 기억이 자꾸 끊어지는데다 오히려 예전의 익숙했던 살인 습관들이 되살아나며 망상과 실제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원신연 감독은 작가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을 40분 만에 독파하고 곧바로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원작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런닝타임 118분 동안 단 1분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긴장감과 몰입도를 유지할 수 있어서 모처럼 좋은 영화를 만난 느낌이다. 곧 원작도 읽어보면서 영화와 비교해 보는 묘미에 빠져봐야겠다. 

 

 

악마 같은 아버지를 죽이고 나자 문득 찾아든 평화에 낯설어하면서도 어느덧 세상에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불필요한 쓰레기들을 청소한다는 명목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 설경구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생각나게 한다. 세상이 벌하지 않으니 자신이 벌한다는 명분으로 살인을 저지르기는 하지만, 그 역시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그가 저지르는 모든 악행들은 트라우마가 되어 차곡차곡 몸과 마음에 새겨진다.

 

그가 자신의 악마성에 진저리를 치고 두려움을 느껴왔다는 것은 딸 은희에게 "넌 내 딸이 아니니 네 몸에 살인자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호소하듯 말하는 장면에서 명백하게 알 수 있다. 그가 17년 전 머리에 이상을 느끼고 연쇄살인을 그만둔 후 수의사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게 된 것 또한 사랑하는 딸을 죽이게 될까봐 두려운 무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고 희미해져 가는 기억과 싸우면서 딸을 지키고자 사투를 벌이는 병수 역을 맡은 설경구는 그 동안에도 늘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이 영화에서 또 한 편의 인생작을 만든 것 같다. 극한의 체중 감량으로 특수분장 없이도 자신보다 열 살 많은 외모를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는 그에게서 아주 열심히, 최선을 다해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스크린 밖으로까지 뜨겁게 뻗어나오는 듯했다.

 

 

이 해맑고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는 김남길이 살인마 설경구와 대립각을 세우는 또 하나의 살인마라니, 왠지 저 따스한 미소가 더 잔인하게 느껴지고 으스스 소름이 돋는다. 원신연 감독은 김남길이 살을 찌웠을 때 섬뜩함이 배가되는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설경구와는 반대로 몸을 불리라고 해서 14킬로그램이나 체중을 늘리는 변신을 감행했다고 한다.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따뜻한 얼굴과 냉혹한 얼굴을 자연스럽게 오간 김남길 또한 이 영화가 대표적인 인생작이 될 것 같다. 스토리상 살인자여야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디 아니기를 바라고 싶었던, 그저 설경구의 딸 은희의 정다운 남자친구이기를 바랐던 태주였지만, 어머니를 지키려던 자신을, 바로 그 어머니가 배신했다는 이유로 여혐까지 지니게 된 그는 어쩌면 설경구보다 더 차갑고 냉혹한 살인마임을 부인할 수 없다.

 

 

친아버지임에도 매일 폭력을 휘둘러 자식을 살인마로 키워낸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피붙이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딸을 잘 키우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싶어하는 아버지도 있다. 그 아버지는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제 몸을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딸에게 "너와 나는 친부녀지간이 아니니 행여 네 몸에 살인자의 피가 흐르지 않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 말 속에서 그가 악마 같았던 아버지의 피가 자기에게 흐르고 있다는 것에 얼마나 고통에 찬 삶을 살아왔을까 하는 짙은 아픔이 느껴진다. 날이 갈수록 잔인하고 폭력적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그는 "그래도 우리가 기댈 곳은 내 몸을 던져서라도 누군가를 구해내겠다는 간절하고 따뜻한 마음"이라고 호소하는 것 같다.

 

이상, 살인자의 기억법 가정폭력이 만들어낸 살인마 설경구 김남길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