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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 보는 세상/시사/사회/교육

파사현정(破邪顯正) 사악하고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 파사현정(破邪顯正) 사악하고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 대학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을 꼽았다. 교수신문은 전국 교수 1천 명을 대상으로 이메일 설문조사를 한 결과 올해를 잘 표현하는 사자성어로 파사현정을 뽑았다. 파사현정은 '2012년 새해 희망을 담은 사자성어'로 선정됐다가 5년 만에 올해의 사자성어로 다시 등장했다. 파사현정은 사견(邪見)과 사도(邪道)를 깨고 정법(正法)을 드러내는 것, 즉 사악하고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불교 종파의 하나인 삼론종의 기본교의로, 삼론종 주요 논저인 길장의 [삼론현의](三論玄義)에 실린 고사성어다. 파사현정을 추천한 최경봉 원광대 교수는 "사견과 사도가 정법을 짓누르던 상황에서 시민들이 올바름을 구현하고자 촛불.. 더보기
결혼 파업 비혼과 졸혼 결혼 파업 비혼과 졸혼 지난 5월 통계청이 발표한 ‘4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취업자는 2, 590만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21만 6천 명이 증가해 23개월 만에 가장 낮은 증가폭을 보였다고 합니다. 청년 실업률(15∼29세)은 10.2퍼센트로, 4월 수치로만 따지면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1999년 6월 이후 최고치라고 합니다. 이런 가운데 혼인율 또한 1970년 이후 역대 최저로 나타났는데, 이는 결혼 적령기 인구가 줄어든 영향도 있지만 일부 젊은 층이 경제적 이유 등으로 결혼을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이른바 "결혼 파업"에 들어선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다양한 현상과 이슈에 관한 화두를 던지는 다큐멘터리 EBS1의 [다큐 시선]을 바탕으로 결혼에 대해.. 더보기
추석의 어원과 유래, 세시풍속과 시절음식 추석의 어원과 유래, 세시풍속과 시절음식 추석을 앞두고 공연히 마음이 바빠지는 하루하루입니다. 특히 올해는 연휴가 길어서 미리미리 챙겨야 할 일도 많을 듯합니다. 추석을 맞아 국립민속박물관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추석의 어원과 유래, 세시풍속과 시절음식]을 알아보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친지분들과 행복하고 풍요로운 한가위 보내세요.^^ ■ 추석의 어원 설, 한식, 단오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명절의 하나인 추석은 한가위, 중추절(仲秋節) 또는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고 한다. 한가위의 '한'은 '하다'(大·正)의 관형사형이고, 가위란 '가배'(嘉俳)를 의미한다. 가배란 '가운데'란 뜻인데, 지금도 신라의 고토(故土)인 영남지방에서는 '가운데'를 '가분데'라고 하며, '가위'를 '가부', .. 더보기
아동문학가이자 한국 동요의 아버지 윤석중과 어린이날 노래 아동문학가이자 한국 동요의 아버지 윤석중과 어린이날 노래 오늘은 5월 5일 어린이날입니다. 어린이날이라고 해서 가슴이 설레던 나이는 이미 한참 지났지만, 어린이날 노래를 들으면 지금도 왠지 어린이날 노래의 가사에서와 같이 푸른 하늘을 나는 새 혹은 푸른 벌판을 달리는 냇물처럼 마음이 들뜨는 기분입니다. 이 어린이날 노래를 석동(石童) 윤석중님이 지으셨다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실 테지만, 어린이날을 맞아 [EBS 지식채널e]를 바탕으로 윤석중님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아동문학가이자 한국 동요의 아버지 윤석중과 어린이날 노래]입니다. 평소에는 듣지 않게 되는 어린이날 노래를 모처럼 들으면서 잠시나마 동심으로 돌아가보는 것도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아동문학가이자 한국 동요의 아버지 윤석중과.. 더보기
전국을 강타한 인형뽑기 열풍..왜 뽑냐고 물으신다면? 전국을 강타한 인형뽑기 열풍..왜 뽑냐고 물으신다면? 사무실 근처 교차로의 각 코너에는 인형뽑기집이 있다. 어느 날 한 집이 들어서더니, 얼마 안 돼 코너마다 하나씩 들어서서 총 네 집이 된 것이다. 인형뽑기라면 꽤 오래 전에 한두 번 해본 적이 있는데, 재미삼아 하려던 것이 쉽게 되지 않으니 오히려 더 스트레스를 받게 만들어 그만뒀었다. 내 돈과 소중한 시간을 들이면서 스트레스 받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 인형뽑기가 전국적으로 대유행이라고 한다. 실제로 눈여겨보니 인형뽑기집이 눈에 띄게 많아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지가 안 맞으면 많아지기는커녕 문닫는 집이 늘어날 테니 장사가 되긴 한다는 말인데, 마침 EBS [다큐시선]에서 인형뽑기 관련 방송을 하기에 그것을 바탕으.. 더보기
삼일절을 맞아 돌아본 제암리 학살사건 삼일절을 맞아 돌아본 제암리 학살사건 제암리 학살사건을 아시나요? 제암리 학살사건은 1919년 4월15일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제암리 교회에서 일본 군인들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사건을 말합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얼마 뒤인 1919년 3월 31일 화성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천여 명이 밤마다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면서 만세운동을 계속합니다. 그러자 일제는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모이게 한 후 문을 모두 잠그고 집중사격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질러 안에 있던 주민들이 모두 불에 타죽고 맙니다. 올해로 98주년인 삼일절을 맞아 EBS 역사채널 [제암리 1919]를 바탕으로 일제의 만행에 의해 20여 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던 [제암리 학살사건]을.. 더보기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일화 10선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일화 10선 1935년 58세의 도산 안창호는 대전교도소에서 나온 후 국내 순방의 길을 떠납니다. 호남과 영남을 두루 살피고 평안북도 산천에 들렀을 때 당시 오산학교 주기용 교장 댁에 머물게 됐는데, 동지들이 정성을 다해 좋은 병풍을 펴드리고 새 비단 이부자리를 깔아드리자 "저는 민족의 죄인이올시다. 이 민족이 저를 이렇게 위해 주는데 저는 민족을 위해 한 일이 없습니다"라고 엎드려 기도했다고 합니다. 나라를 위해 가정의 행복과 개인의 생명까지도 버린 애국자로 독립정신의 산 증인이자 민족정기의 본보기였음에도 자신은 민족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한낱 죄인이라고 참회한 것입니다. 숭실대 명예교수이자 도산아카데미연구원 설립자인 안병욱 교수님 등이 쓰신 [안창호 평전]에는 이 외에.. 더보기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를 찾아서 안창호 명언 15선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를 찾아서 안창호 명언 15선 도산 안창호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며 원대한 이상을 지시하여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을 밝힌 사상가입니다. 지난주 MBC [무한도전] 캘리포니아 LA 특집에서는 유재석, 정준하, 광희, 하하, 양세형 등이 도산 안창호의 발자취를 따라 코리아타운 명소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LA에는 코리아타운 인터체인지부터 남가주 대학교, 한인회관, 코리아타운 우체국,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등 도산을 기리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는데, 무한도전에서 방영한 내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죽음의 공포마저 이겨낸 도산 안창호의 애국정신에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되는 숙연함이 느끼껴집니다.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를 찾아서입니다. 안창호 명언 15선도 함께.. 더보기
창씨개명 한민족의 뿌리를 위협했던 얼룩진 이름 창씨개명 한민족의 뿌리를 위협했던 얼룩진 이름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 일본의 압제에서 독립한 날입니다. 광복절 경축식을 하고 오늘 하루나마 광복절에 대해 좀더 생각을 하고 나면 내일부터는 또다시 책이나 영화, 드라마로나 접하는 과거의 일이 되겠지만, 단 하루만이라도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치욕을 견뎌야 했던 그 날들을 되새겨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놈들이 조선인들의 정신을 황폐화시키기 위해 펼쳤던 식민정책은 조선어를 말살하고 한글을 말살하며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는 정책이었습니다. 이 중 창씨개명은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EBS [역사채널e]에서 방영한 을 바탕으로 정리해 본 [창씨개명 한민족의 뿌.. 더보기
호패 조선판 주민등록증 호패 조선판 주민등록증 조선시대의 호패(號牌)는 왕족, 양반, 양인, 노비에 이르기까지 16세 이상의 남자에게만 주어진 일종의 신분증으로 민원청구, 소송제기 때는 물론 항상 휴대하고 다녀야 했습니다. 본디는 중국 원(元)에서 시작된 호패를 고려 공민왕 때(1354년) 처음 도입해 군인에게만 실시했는데, 잘 시행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후 조선 태종 때(1413년) 황사후(黃士厚)의 건의로 전국에 시행되었다가 숙종 초까지 중단되고 다시 시행하기를 다섯 차례나 반복하면서 고종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호패 사용이 도중에 자꾸 중단된 것은 호패를 받으면 호적(戶籍)과 군적(軍籍)에 올려져 군인으로 뽑히거나 나라의 각종 요역(沓役)에 동원되었으므로 백성들이 호패 받는 것을 피했기 때문입니다. 또 국역을 피하기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