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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밀정 송강호(이정출)에게 마음의 빚을 지운 것은 누구인가?

 

밀정 송강호(이정출)에게 마음의 빚을 지운 것은 누구인가?

 

 

골리앗을 이기는 다윗의 전략 25가지를 담은 [안계환의 인문병법]은 강자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약자의 필승전략을 들려주고 있다. 능력이나 힘으로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강자에게 맞서 이기려면 상대의 약점을 공략한다거나 변칙전술을 쓴다거나 정보력 등을 이용해야 승산이 있는데, 이 중 정보력을 이용하는 전략에는 '첩자', 즉 스파이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손자는 이 첩자의 종류를 향간(鄕間), 내간(內間), 반간(反間), 사간(死間), 생간(生間) 등 다섯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송강호와 공유 주연의 영화 [밀정](김지운 감독)은 바로 이 첩자 중 반간, 즉 이중간첩인 밀정 이정출의 스토리를 보여주고 있다. 

 

[밀정]의 시대적 배경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 이정출은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뒤를 캐라는 특명을 받고 의열단 리더 김우진(공유)에게 접근한다. 이정출과 김우진은 서로의 정체와 의도를 의심하면서도 속내를 감춘 채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제의 주요시설을 파괴하는 데 쓸 폭탄을 경성으로 들여오는 작전을 개시한다. 일본경찰 또한 여기저기 심어둔 스파이들의 보고를 바탕으로 의열단의 뒤를 쫓는다. 

 

밀정 송강호(이정출)에게 마음의 빚을 지운 것은 누구인가?

 

홈피의 소개에 따르면 영화 [밀정]은 1923년에 실제로 발생했던 <황옥 경부 폭탄사건>과 인물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에 이어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지만 원하는 결과를 이루지 못해 무력감에 휩싸였던 조선 민중들은 신출귀몰하며 일본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는 김상옥 의사의 도주를 응원한다. 그리고 김상옥이 죽은 후 의열단은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제의 거점시설을 파괴할 2차 거사를 계획하는데, 국내에서는 파괴력 강한 폭탄을 만들 수 없기에 헝가리 혁명가인 폭탄제조 전문가와 함께 상해에서 폭탄을 대량제조하여 경성으로 들어오려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때 독립운동에 가담했지만 변절한 후 일제 고등경찰인 경부로 일하고 있던 <황옥>이 의열단의 새 리더 <김시현>과 함께 했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다. 이로 인해 황옥은 의열단의 2차 거사를 저지하기 위해 일제가 심은 ‘밀정’이었다는 설, 혹은 일본경찰을 가장한 의열단원이었다는 설이 퍼졌는데,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역사 속 의문으로 남게 된다. 그 황옥 역을 송강호가 맡고 공유는 김시현 역을 맡아 밀정에서 명연기를 펼친다. 당시의 분위기를 섬세하고 멋스럽게 재현해 낸 덕분에 상해며 경성 역, 경성 거리를 되돌려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영화의 전개는 필요 이상 호흡이 느리지 않나 싶기도 했지만 지나칠 정도는 아니었고(아마 장면 하나하나를 천천히 곱씹으면서 보라는 감독의 의도였을 것 같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송강호의 알 듯 말 듯 애매모호한 표정은 지금도 진실이 확실하게 밝혀진 게 아니니 스토리상 필요한 설정일 듯했다. 실제로 그 때문에 조선총독부 경무국 부장 히가시(츠루미 신고)는 이정출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심의 끈을 늦추지 못하면서도 계속 일을 맡길 수밖에 없었고, 의열단의 김우진 또한 이정출이 일본의 앞잡이여서 자신들이 펼치는 작전이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국을 위해 일해 줄 것이라고 애써 믿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들인다.

 

김지운 감독과 송강호는 인터뷰에서 "<밀정>에서 밀정은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김지운 감독은 "<밀정>의 방향은 선과 악의 구분처럼 이분법적인 역사관이 아니다. 붉지도, 검지도 않은 색이다. 좌절의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이 겪는 현실적인 고뇌와 갈등을 조명하는 시선의 각도가 새로운 영화다"라고 말했고, 송강호는 "밀정을 찾기보다는 혼란스러운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는데  연기 포인트를 뒀다"고 말했는데, 선악이 분명치 않은 이정출의 캐릭터를 명품배우 송강호는 충분히 소화해서 보여주었다.  

 

 

하긴 그 누군들 어떻게 선악으로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으랴? 만일 아무 일 없이 무사태평한 인생을 살다가 평탄한 죽음을 맞는다면 자신의 내면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악을 전혀 모른 채 스스로 선한 사람인 줄로만 철석같이 믿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00년 남짓한 삶 동안 큰 전쟁이며 재난까지는 아니라도 크고 작은 위기 한 번 없이 삶을 마감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위기에 처했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저마다 다르다. 

 

제 목숨 부지하기에 급급해 무작정 납작 엎드려 빌붙어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 목숨 귀한 줄 모르고 남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 사람도 있을 테고, 혹은 그 틈새를 파고들어 남을 짓밟고 등쳐서라도 제 몫만 챙기려고 날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밀정은 이 중 세번째, 즉 아무런 위기도 없었다면 선한 사람으로 삶을 마쳤을지도 모르는데 <사느냐 죽느냐의 위기를 맞게 된 탓에> 동물적 본능과 악마의 본성을 드러내게 된 사람에 속할 것이다.

 

제 목숨은 뒷전인 채 대의를 위해 일한 사람은 그전이나 그 후나 언제나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다. 문제는 강자 앞에 납작 엎드렸던 사람들, 그리고 제 앞가림을 위해 타인들에게 인간으로서는 차마 못할 짓을 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위기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자괴감과 죄책감에 휩싸이거나 자신이 저지른 죗값에 대한 마음의 빚으로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느냐 죽느냐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 실은 자기 탓도 아닌데> 당시 <어떤 선택을 했느냐>가 죄인 아닌 죄인을 만드는 셈이다. 진짜 죄인은 선량한 사람들을 더 이상 평탄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몰아간 전쟁이나 재난 혹은 광기어린 지도자나 힘없는 국가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 때문인지 영화를 보던 중 귀에 날아와 꽂힌 <마음의 빚>이라는 단어가 영화관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내내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실존인물인 의열단 김원봉 단장의 모델인 정채산 역을 맡은 이병헌이 한 말이었는데, 이정출을 믿고 일을 맡겨도 되느냐 마느냐는 선택을 앞두고 "일단 믿어보자"면서 "만일 <마음의 빚>이 있다면 그걸 갚을 기회를 주는 셈도 되니까"라는 의미였다. 

 

그 <마음의 빚>이라는 말이 왠지 귀에 몹시 거슬렸다. 이정출이 조국을 버리고 일본을 위해 밀정 짓을 한 것은 죗값을 치러 마땅한 일이지만, 그 이전에 그저 평범한 사람들을 둘로 셋으로 갈라져 의심하고 싸우게 만든 것이 누구인가 하는 것부터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도 모자라, 밀정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겠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어리석은 개인이 그 죗값은 물론 마음의 빚까지 져야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야 어떻든, 누구나 김우진처럼 당당하게 목숨을 걸고 의열단에 뛰어들기란 현실적으로든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이정출 같은 밀정이 암약을 하게 된 것은 1910년 일제가 한일병합 조약에 따라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삼은 데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 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은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잃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으며, 그때는 물론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아픔과 고통의 세월 속으로 민중들은 떠밀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부모가 됐든 나라가 됐든 윗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인간의 치부를 드러내는 이런 참혹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단도리를 해주는 일이다. 그것도 못해주면서 남을 밀고해서라도 오직 살아남고자 밀정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은 참으로 저급하고 비열한 짓이다. 물론 밀정 짓을 하는 사람을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죽으면 죽었지 그런 짓을 하고서는 절대로 살 수 없는 사람들도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전에 죄를 짓게 만들고, 스파이 노릇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드는 일부터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식을 보호하는 부모, 국민을 보호하는 국가가 아닐까. 

 

 

게다가 이보다 더 두렵고 끔찍한 일은, 세상에는 이정출 같은 밀정보다 더 몹쓸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정출은 적어도 스스로 마음의 빚이라도 가졌던 사람이지만, 그런 마음의 빚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철면피 같은 인간들도 있기 때문이다. [밀정]에서 일본으로 귀화한 조선인 일본순사 하시모토(엄태구) 같은 인물이 바로 그런 인간들의 전형이다. 세상을 망가뜨리고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이런 자들 앞에서라면 회색분자 이정출도 '왜 내가 마음의 빚을 져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세월이 흘러 양상은 달라졌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는 자신이 지키고 보호해야 할 사람들을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로 몰아넣는 지도자나 국가, 그리고 그런 지도자나 국가를 위해 일한답시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거침없이 짓밟고 올라서는 이런 섬뜩한 철면피들이 들끓고 있다. 우리가 진실로 경계하고 그 싹을 잘라버려야 할 것은 바로 그런 인간들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엄태구는 베테랑이며 차이나타운, 악마를 보았다, 인사동 스캔들 등에도 출연했지만 크게 주의를 끌지 못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인간미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잔혹한 일본순사 역을 씽크로율 100프로로 해내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준 것 같다.)

 

이상, 밀정 송강호(이정출)에게 마음의 빚을 지운 것은 누구인가?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