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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 한민족의 뿌리를 위협했던 얼룩진 이름

 

창씨개명 한민족의 뿌리를 위협했던 얼룩진 이름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 일본의 압제에서 독립한 날입니다. 광복절 경축식을 하고 오늘 하루나마 광복절에 대해 좀더 생각을 하고 나면 내일부터는 또다시 책이나 영화, 드라마로나 접하는 과거의 일이 되겠지만, 단 하루만이라도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치욕을 견뎌야 했던 그 날들을 되새겨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놈들이 조선인들의 정신을 황폐화시키기 위해 펼쳤던 식민정책은 조선어를 말살하고 한글을 말살하며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는 정책이었습니다. 이 중 창씨개명은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EBS [역사채널e]에서 방영한 <얼룩진 이름>을 바탕으로 정리해 본 [창씨개명 한민족의 뿌리를 위협했던 얼룩진 이름]입니다. 일제의 갖가지 만행 중 하나를 곱씹어보는 뜻깊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1940년 조선의 어느 학교. 교실로 들어온 일본인 교사가 한 소년을 지목하더니 특별한 이유도 없이 질책과 구타를 했다. 

 

 

매맞는 소년의 잘못은 김대한, 단지 이름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1938년 조선어 사용 폐지에 이어 1939년 11월 특별한 정책을 발표한다. .

 

'조선의 히틀러'라고 불린 미나미 지로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조선민족말살정책을 추진했는데, 먼저 국민총력운동과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전개하여 조선인들을 기만적인 황민의식하에서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조선교육령을 개정해 민족의식의 말살과 황민화(皇民化)를 꾀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지원병제도를 실시해 많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었으며, 국민징용법에 따라 많은 조선인들을 강제징용한 악명높은 총독이었다. 

 

 

모든 조선인은 조선식 '성'을 일본식 '씨'로 만들고 이름을 바꾸라는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었다.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선의 고유문화를 확립한다는 핑계로 부계혈통 중심의 가족 개념을 파괴해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서였다.

 

 

반발을 줄이기 위해 자진신고를 권장하고 다양한 홍보를 실시했는데, 매일신보 1939년 11월 19일자에는 "씨(氏)를 설정해도 성(性)과 본관은 절대 바꾸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호적상에도 계속 표기된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어이없게도 창씨개명을 하기 위해서는 1인당 50전이라는 수수료까지 지불해야 했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창씨개명을 할 수 있도록 이 수수료를 1인당 50전에서 1가구당 50전으로 인하한다는 기사도 실렸다. 자신의 이름을 바꾸면서 수수료까지 내야 하는 짓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노비 출신이나 웃긴 이름을 가진 자는 변경의 기회로 삼았고, 일부 상류층은 솔선 신고 및 강연을 통한 권유 등 협조적이었지만 1940년 3월 이후 3개월간 창씨 신고율은 약 7.6퍼센트에 불과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한 일제는 다양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다음은 당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사항 중에 실려 있는 것 중의 일부다. 

 

1 창씨하지 않은 사람의 자제에 대해서는 각 학교로의 입학/진학을 거부한다.

2 창씨하지 않은 아동에 대해서는 교사가 이유없이 질책/구타함으로써 아동의 호소에 의해 부모가 창씨하게 한다.

3 창씨하지 않은 사람은 공사 불문하고 일체 채용하지 또한 현직자도 점차 파면조치를 취한다.

4 창씨하지 않은 사람은 비국민으로 단정하고 미행을 철저히 함과 동시에 노무징용의 대상자로 한다. 또한 식량 및 기타 물자의 보급대상에서 제외한다. 

 

이 외에도 창씨하지 않은 사람은 행정기관에서 다루는 모든 민원사무를 취급하지 않았으며, 철도 수송화물의 명패에 조선인의 이름이 씌어진 것은 취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강압적 조치 결과 1940년 8월 10일까지의 통계에 따르면 창씨 신고율은 약 80.3퍼센트에 이르렀다. 

 

 

창씨 반대운동을 펼친 만해 한용운처럼 끝까지 버티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조선인은 자신을 위해 혹은 자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어쩔 수 없는 선택 속에는 조선인의 저항의식이 엿보이기도 했는데, 어떤 문중은 평산(平山)을 히라야마로 바꾸는 식으로 본(本)을 같은 씨(氏)로 바꿔 혈통을 유지하려 한 것이 그 예다.   

 

 

혹은 이누코 구마소(犬子熊孫), 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이나 이누쿠소 구라에(犬糞食衛), 개똥이나 먹어라 등 조롱 섞인 이름으로 반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또는 단식, 음독, 투신자살 등 목숨을 걸고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계속된 조선인들의 저항 끝에 1941년 말까지 신고율은 81.5퍼센트에 그치고 만다.

 

 

한민족의 뿌리를 위협했던 창씨개명은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폐지되고 이듬해 [조선성명복구령]에 의해 사라졌지만,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아 있다.

 

이상, 광복절을 맞아 알아본 창씨개명 한민족의 뿌리를 위협했던 얼룩진 이름이었습니다. 이 얼룩이 완벽하게 가셔질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