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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대박 어머니 장희빈의 저주가 부른 비운의 왕 경종

 

대박 어머니 장희빈의 저주가 부른 비운의 왕 경종

 

 

이번주 두 회를 마지막으로 종영을 앞두고 있는 드라마 [대박]에서는 숱한 어려움을 딛고 드디어 연잉군(여진구)이 제21대 왕 영조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천한 무수리(숙빈 최씨)의 두번째 아들이었던 연잉군은 서열상으로도 그렇고 출신성분상으로도 결코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지만 이복형이자 희빈 장씨의 첫아들인 경종(현우), 그리고 경종의 지지기반인 소론에게 끊임없이 견제당하면서도 왕좌에 오르는 천운을 타고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말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경종이 병약한 탓에 그토록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연잉군이 세제가 되는 일도, 왕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본디 유순한 성품인데다 어머니 장희빈의 패악질로 후사를 볼 수 없는 비운까지 겹쳐 세자로 있는 동안에도, 그리고 왕좌에 있을 때조차도 늘 바늘방석에라도 앉은 듯 좌불안석으로 마음편할 날이 없었던 가엾은 왕이 바로 경종이었습니다.

 

드라마 [대박]과 청운대 김경수 교수의 [조선왕조사]를 바탕으로 [대박 어머니 장희빈의 저주가 부른 비운의 왕 경종]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대박]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대박 어머니 장희빈의 저주가 부른 비운의 왕 경종

 

숙종(최민수)이 승하한 후 왕위에 오른 경종은 사부 이인좌(전광렬)를 가까이 두며 정치를 펼쳤다. 어린시절에도 다짐한 일이 있었지만 병약한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은 이인좌뿐이라고 믿은 경종은 즉위식에서도 이인좌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하지만 오랜 지병을 가진 경종이었기에 후사를 정하는 일로 고심을 해야 했고, 이를 알아챈 이인좌와 대신들은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적극 추천한다. 그 기세에 밀린 경종은 결국 여진구를 세제에 책봉한다.

 

 

그러나 그 후 경종은 역모를 꾸민다고 여겨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을 치려 하고, 자신의 발판인 노론의 희생을 볼 수 없는 연잉군은 경종을 말린다. 이에 분노한 경종은 "네가 없어져야 노론들이 역심을 품지 않는다"며 연잉군에게 칼을 겨눈다.

 

 

그때 백대길이 경종 앞을 막아서고 "선왕(숙종)이 내게 연잉군을 지키라고 했다"며 경종을 단념시킨다. 하지만 경종은 물러서지 않고 연잉군을 살리는 대신 연잉군을 따랐던 노론 세력들을 모조리 참형시켰다. 경종에 의해 노론의 수장들을 다 참수당하자 연잉군은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 것에 오열한다.

 

 

그 후 경종은 백대길이 연잉군을 살리기 위해 가져다준 이인좌의 혈서를 보고 분노한다. 이인좌를 굳게 믿은 경종은 이인좌의 뜻대로 연잉군을 의심했던 거였건만, 그 혈서에는 이인좌가 역모를 꾀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화가 난 경종은 이인좌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사에 관여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궁지에 몰린 이인좌는 "내가 은혜를 베풀었는데 경종이 날 버렸다"고 분노하며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를 예상한 백대길의 활약으로 제대로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체포돼 저작거리에서 묶인 채 백성들의 놀림거리가 된다. 그러나 악인의 목숨은 더 질긴 법인 듯 이번에도 죽음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그 사이 경종의 병세는 짙어져 피를 토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경종은 어의에게 “하루 이틀 앓아온 것도 아니다”며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경종은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한 뒤에도 계속 그의 역심을 의심해 왔지만, 이제 왕위를 물려줄 아들도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앞두둔 그로서는 연잉군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연잉군은 경종을 위해 게장과 감 등으로 상을 차리게 하고, 이를 본 경종은 속으로 “마음을 먹었구나”라며 연잉군의 달라진 마음가짐을 알아챘다. 경종은 연잉군을 향해 "미안하구나" 하고 말하고, 연잉군은 “용서는 이 아우가 구하겠습니다”는 속엣말로 경종의 뒤를 이어 자신이 왕위에 오를 뜻을 드러낸다. 연잉군이 차려준 음식을 먹은 경종은 결국 세상을 하직한다.  


 어머니 장희빈의 저주가 부른 비운의 왕 경종

 

 

경종은 1688년(숙종 14) 숙종과 희빈 장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숙종은 오래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나자 매우 기뻐하며 서둘러 원자에 책봉했다.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왕비가 아닌 궁인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원자 책봉을 반대했으나 숙종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경종의 이름은 윤(昀), 자는 휘서(輝瑞)다. 

 

1690년(숙종 16)에 3세에 세자에 올랐는데, 그가 세자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비호 세력인 남인이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종이 세자에 오르면서 인현왕후의 폐위로 공석이었던 왕비의 자리는 생모인 장희빈의 차지가 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정쟁에 휩싸여 어머니의 따뜻한 정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채 14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는 것을 보아야 했던 비운의 왕이었다.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는 1701년 무고의 옥으로 사사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그것도 제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는 것을 목격한다는 것이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경종은 이때부터 줄곧 병을 앓게 되었으며, 자식도 두지 못했다. 일설에는 어머니 장희빈이 사약을 받을 때 포악을 떨다가 아들 보기를 청했고, 이에 세자 윤이 오니 "이왕 죽을 바에 네가 살아 무엇하랴!" 하며 세자에게 달려들어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당긴 탓에 병을 얻고 후사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세자 윤은 어린시절에도 어머니의 일로 가슴 졸일 일이 많았지만 자주 병석에 눕다 보니 세자의 자리가 늘 위태해서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희빈 장씨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노론이 그녀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불안해했고, 숙빈 최씨의 아들이며 세자의 동생인 연잉군을 끼고 돌았기 때문이었다. 노론 영수 이이명과의 정유독대에서도 보듯이 숙종 역시 세자 윤의 건강이 불안해서 내심 연잉군을 새로운 세자로 세우길 바랐다. 그러나 대리청정을 하면서도 세자의 큰 흠결이 보이지 않자 1720년 숙종이 승하한 후 왕위를 이어받아 제20대 경종이 되었다.

 

 대안 없는 경종의 선택

 

 

어렵게 즉위는 했으나 경종은 외로웠다. 사고무친인데다 숙종의 병신처분 이후 조정은 자신을 폐출시키려고 혈안이 된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론은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왕의 건강이 날로 악화되고 후사가 없으니 서둘러 세제를 세울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는 남인과 소론이 언제 경종을 움직여 자신들을 제거할지 모르는 상황을 염려하여 하루하도 빨리 연잉군을 세제로 옹립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소론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안이 없었던 경종은 1721년 연잉군을 왕세제에 책봉했다. 그런데 노론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해 10월 경종의 건강을 이유로 들어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릇 대리청정이란 국왕이 명을 내린다 해도 신하들이 반대해야 하는 것인데, 이렇듯 신하가 나서서 청하니 이는 곧 경종에게 정사에서 물러나라는 것과 같았다.

 

노론의 이 같은 주장이 못마땅하긴 했으나 몸이 편치 않았고 아우 연잉군과 우애가 깊었던 경종은 노론의 주장대로 대리청정을 명했는데, 소론이 즞각적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좌참판 최석항이 경종을 면대하고 울며 환수를 요청하니 경종은 마음을 바꾸어 대리청정의 명을 환수하겠다는 명을 내렸다. 이 일로 노론과 소론 양측 대신들뿐만 아니라 성균관 학생과 전국 유생들의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경종은 다시 얼마 후 "내가 병이 있어서 국사를 돌보기 힘드니 세제로 학하여근 국정을 대리하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노론측에서는 기뻐하며 대리청정을 기정사실화하고 세제 대리청정의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소론측은 어떻게든 명을 다시 환수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우의정 조태구가 경종과의 면대를 요청했다. 그런데 이때 노론측 지인 조영복 등이 경종과의 면대를 막자 이를 안 경종이 조태구를 직접 불러들였다.

 

조태구는 "선대왕께서 세자였던 전하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던 것은 선대왕이 연로하시고 병이 중하셨기 때문이다. 허나 전하의 춘추 이제 서른넷이옵고 왕위에 오르신 불과 한 해가 지났을 뿐이어서 세제의 대리청정은 천부당만부당한 분부이니 거두어주시옵소서"라고 말했다. 조태구의 주장이 그릇되지 않으니 노론측도 달리 반박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김창집 등이 환수를 청하자 경종은 대리청정의 명을 환수했다.

 

 

경종의 지지를 얻게 된 소론은 여세를 몰라 오론을 제거하기 위해 1721년 12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일은 후에 급소라고 불리게 된 소론 내 급진차인 김일경을 비롯한 7인의 연명으로 이루어졌다. 그 내용은 세제 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과 청정 명령을 받아들이고 행하려고 한 이른바 노론 4대신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이 임금을 얕잡아보고 왕권교체를 시도한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 경종은 이 상소를 받아들였다. 노론 4대신은 삭탈관직된 뒤 유배되고, 그 자리는 소론 조태구, 최규서, 최석항 등이 차지했다. 그리하여 숙종 후반부터 지속되었던 노론의 권력기반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722년 3월 소론의 강경파들이 노론을 확실하게 처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때, 서얼 출신 남인 목호룡의 고변서가 날아들었다. 목호룡이 고한 내용은 노론측에서 숙종의 죽음에 임박하여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세 가지 방법으로 시해하고자 했다는 '삼급수설'이었다. 삼급수란 자객이 칼로 살해하는 대급수(大急手), 약으로 살해하는 소급수(小急手), 모해하여 폐출시키는 평지수(平地手)를 의미했다. 아무리 유약한 경종이라도 고변을 듣고는 "아무리 내가 힘이 없다 한들 세자인 나를 두고 이런 음모를 품다니!" 하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은 노론에게 벼락 같은 것이었다. 이 음모에 관련된 이천기, 김용택, 이기지, 정인중, 심상길, 백망 등이 노론 핵심 집안의 자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국청이 열려 역모 관련자들이 처형되었음은 물론 유배되었던 노론 4대신도 사사되었다. 이 일에 연루되어 처형되거나 유배된 사람은 17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옥사는 신축년과 임인년에 이어서 일어났다 하여 신임옥사 혹은 신임사화라고 한다. 특히 백망은 왕세제 연잉군의 매사냥꾼이어서 고변서에는 왕세제의 이름까지 거론되어 신임사화는 영조대까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작용했다.

 

신임사화로 노론을 완벽하게 몰아내고 조정을 장악한 소론은 숙종 때 병신처분으로 삭탈관직되었던 윤선거와 윤증 부자를 복관시키고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등을 숙종묘에 배향하는 등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소론이 잡은 것은 병약한 헌 동아줄이었으니, 2년 뒤 경종이 죽자 소론의 짧은 권력독점도 끝나고 말았다.

 

 노론과 소론의 갈등 속에 의문사하다

 

 

신임옥사로 소론은 노론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소론이 득세한 기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소론의 지지자인 경종이 재위 4년 만인 1724년(경종 4) 8월 25일에 죽었기 때문이다. 경종은 짧은 재위 기간 내내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했고, 죽기 며칠 전부터 위독한 상태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경종의 죽음에는 의문점이 있었다.

 

특히 죽기 전 날 세제 연잉군이 올린 게장과 생감을 먹고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다가 죽었기에 독살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의가에서는 게장과 생감은 함께 먹으면 안 되는 음식으로, 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잉군이 실제로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것이 경종의 죽음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면,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했던 노론 사이에 충분한 정쟁거리가 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결국 이 일은 노론에 의해 왕으로 옹립된 연잉군에게도 큰 정치적 부담이 되었다.

 

 

경종은 숙종의 사랑을 받던 어린시절에는 매우 총명하고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런데 생모의 비극적인 죽음과 마음이 변한 숙종의 냉대, 그리고 그의 자리를 위협하는 노론의 압박으로 인해 몸과 마음에 병을 얻었다. 즉위 후에는 세자 시절에 얻은 병증이 더욱 심해져 경연도 오랫동안 하지 않고 말수도 점점 줄어들었다고 한다. 정적이었지만 인현왕후와 인원왕후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으며, 연잉군에 대해서도 형제로서의 의리를 지켜 신임옥사 당시 소론 강경파들은 연잉군의 처벌을 주장했지만 경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1724년 즉위 4년 만에 병이 갑자기 악화되어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경종은 생모 희빈 장시의 파란만장한 생으로 우울한 유년기를 보내고 세자가 되어서도 병약해서 늘 좌불안석이었고 왕위에 올라서도 노론과 소론의 권력다툼으로 하루도 편할 날 없는 나날을 보냈으니 뚜렷한 치적을 남길 시간도, 후사도 없었다. 경종에게는 부인이 둘 있었으나 워낙 병약했던 탓에 자식은 없었다. 첫부인 단의왕후(端懿王后)는 심호(沈浩)의 딸로 세자빈에 책봉됐으나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2년 전에 죽고, 그 뒤를 이어 세자빈에 책봉된 두번째 부인 선의왕후는 어유구(魚有龜)의 딸로 1730년(영조 6)에 죽었다. 37세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 삶을 마감한 경종의 능은 서울시 석관동에 위치한 의릉(懿陵)이다.

 

이상, 대박 어머니 장희빈의 저주가 부른 비운의 왕 경종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