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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아가씨 김민희 남자들 세상 한복판에 도시락폭탄을 날리다!

 

아가씨 김민희 남자들 세상 한복판에 도시락폭탄을 날리다!

 

 

갑질 세상이다. 아무래도 사람들 내면에 깊이 뿌리내린 고약한 속성 중 으뜸이 갑질인 듯하다. 재벌 회장이니 VIP고객을 내세운 갑질은 이제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뭐든 상대보다 눈꼽만큼이라도 나은 위치에 있다 싶으면 어김없이 갑질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청을 주는 기업이 그렇고, 회사 상사니 교수님, 선생님이 그렇고, 하다못해 선배도 기회만 되면 갑질이다. 그뿐인가. 갑질은 가족들 사이에서도 비일비재하다. 부모들이 내 자식 내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찌 보면 갑질이고, 몇 년 먼저 세상 구경을 했다는 이유로 동생들 위에 군림하려는 것도 엄연히 갑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갑질 중에서도 가장 지독하고 끔찍하고 가혹하고 끈질긴 갑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남자들의 여자들에 대한 갑질이 아닐까 싶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구조적으로 치밀하게 행해져 온 갑질이다. 그로 인해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죄 아닌 죄로 그 동안 여성들이 당해온 수모는 굳이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 등 남자들이 여자를 한갓 성적 수단으로 여기는 데서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들은 최근에도 연일 뉴스가 되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스릴러 [아가씨]는 바로 이러한 남자들의 갑질에 도시락폭탄을 날리는 두 여자, 즉 아가씨 히데코 김민희와 하녀 숙희(김태리)의 유쾌한 도발을 보여주고 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이, 모든 억압된 것은 결국엔 터지게 마련이다. 그것도 찍어누르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세게 터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부모의 억압에 고통스러운 날을 보낸 자식이 성장해서 복수를 꾀하듯, 형제간의 불필요한 경쟁의식이 살인을 부르듯, 매사에 남성우월주의를 내세우는 남자들 세상 한복판에 저 옛날 윤봉길 의사가 일왕의 생일축하 행사장에서 도시락폭탄을 던졌듯이 쾅 하고 폭탄을 터뜨린다. 이 경고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것 같은 꼴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하다. 남자들을 싹쓸이해 버린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 아닌가?

 

 

영화의 배경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 나라를 빼앗긴 죄로 내 땅에 살면서도 침입자 일본놈들의 몹쓸 박해에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을 꿀꺽꿀꺽 참아넘겨야 했던 시절이다. 말도 빼앗기고 이름도 빼앗기고 글도 빼앗긴 당시 사람들은 언감생심 사람다운 대접은 꿈도 못 꾼 채 거의 개돼지 수준의 취급을 당하면서도 그저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왜 사람인가. 존엄성, 정신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정신을, 그 존엄성을 잃어버리면 이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정신적 노예라는 말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고, 사람을 제 마음대로 요리하려면 정신적 노예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사악하리만큼 영리한 일본놈들은 인간에게서 정신과 자존감을 뺏어버리면 외형만 사람 꼴을 하고 있을 뿐 마소처럼 마구 부려도 끽소리 못한다는 것을 잘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놈들의 만행은 어쩐지 여자들을 성적 노리개로만 여겨온 남자들의 만행과 묘하게 닮아보인다. 야설 낭독을 통한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앉은 저 사진 속 남자들이 바로 그런 추악한 남자들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스포의 염려가 있으니 홈피에 올라 있는 정도로만 스토리를 따라가보면 어릴적 부모를 잃고 후견인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의 엄격한 보호 아래 살아가는 귀족 아가씨 김민희에게 사기꾼 백작 후지와라(하정우)가 추천한 새로운 하녀가 찾아온다. 하녀 숙희는 유명한 여도둑의 딸로 장물아비 손에서 자란 소매치기 고아소녀다.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될 아가씨를 유혹해 돈을 가로채려 하는 사기꾼 하정우가 아가씨 김민희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들여보낸 것이다.

 

숙희가 하녀로 간 그 집은 정문으로 들어선 후에도 한참 더 가야 하니 한숨 자도 된다고 말할 만큼 온 산을 다 차지한 거대한 저택이다. 하지만 그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큰 집에서 하녀 숙희가 몸을 누일 공간은 벽 한귀퉁이에 만들어둔 손바닥만한 골방이다. 그 골방은 일제강점기에 내 나라에 살면서도 하녀와도 같은 취급을 받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수모, 나아가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역시 남자들에 의해  하녀 취급을 받아야 했던 여자들의 피폐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즉 일본 대 우리 민족, 귀족 아가씨 대 하녀, 남자 대 여자의 구조에서 <우리 민족>, <하녀>, <여자>는 갑질의 대상으로 같은 값인 것이다.

 

[아가씨]의 영문표기를 Handmaiden이라고 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Handmaiden은 본디 하녀라는 뜻이지만, "뭔가 보충한다"는 의미도 있다. 즉 하녀는 자기 자신으로서의 온전한 삶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보충해 주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이 영화 제목을 영문으로는 Handmaiden이라고 표기하면서 우리말 제목으로는 [아가씨]로 한 것은 아가씨든 하녀든 결국 여자들의 삶은 남성우월주의의 세상에서는 하녀의 삶과 진배 없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 것일까.   

 

 

런닝타임 144분으로, 결코 짧지 않은 영화이지만 의식의 흐름을 잘 따라간데다, 3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하녀 숙희의 시각으로 사건을 그려주고, 2부에선 아가씨 김민희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전개를 보여주어서인지 그닥 지루한 줄은 몰랐다. 

 

<1부 남자 VS 여자 - 남자의 적은 여자다?> 돈 많은 조카딸을 이용해 부를 넘겨받으려는 이모부 조진웅과 아가씨를 속여 부를 차지하려 하는 사기꾼 백작 하정우의 이력이 밝혀진다. 그들에게 있어 여자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든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수단일 뿐이다. 돈 많은 아가씨는 그들에게 그저 속여넘겨야 할 적인 것이다.

 

<2부 여자 VS 여자 - 여자의 적은 여자다?> 매일 이모부의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이 일상의 전부인 외로운 아가씨 김민희의 삶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하지만 사실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이 공허한 삶을 살아온 아가씨는 사기꾼 백작 하정우가 남모를 계획을 세워 들여보낸 하녀 숙희에게 차츰 의지하기 시작한다. 남자의 꾐에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넘어가는 이 두 여자는 서로 적이 될 수밖에 없다. 

 

<3부 여자 VS 남자 - 여자의 적은 남자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이모부 조진웅과 사기꾼 백작 하정우를 대표로 하는 남자들 세상 한복판에 도시락폭탄을 날리고 함께 떠난 아가씨 김민희와 하녀 숙희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보여준다. 누가 만들어낸 말인지는 모르지만,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에 휘둘려온 삶을 마감하고 자신들의 적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게 된 두 사람이다.

 

그리하여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씨가 법의 힘을 빌릴 필요 없이 직접 죄를 심판하여 복수했듯이 [아가씨]에서 두 여자, 즉 이제 아가씨와 하녀라는 낡은 신분의 벽마저 깨부숴버린 김민희와 김태리는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마다 않는 남자들의 비루한 욕망을 처절하게 응징한다. 껍질은 깨야 한다. 단단한 껍질이어서 깨기가 힘들지라도 깨야 하고 그럴수록 더 깨야 한다. 알을 까고 새로운 세계로 나와야 할 것은 헤르만 헤세의 아프락사스만이 아닌 것이다.  

 

 

시종일관 알 듯 모를 듯 기묘하고 신비스러운 표정으로 관객들을 잘도 속여넘긴 김민희의 연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거둔 놀라운 수확 중 하나는 하녀 숙희 역을 맡은 신인배우 김태리의 발견일 것 같다. 특히 사기꾼 백작 하정우와 순진한 줄로만 철석같이 믿고 마음을 온통 내줘버린 아가씨 김민희의 합동작전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간 후 울분을 참지 못해 괴성을 질러대던 김태리의 섀도모션은 영화 [내부자들]에서 보여준 이병헌의 감탄스러운 연기력에 비길 만했다.

 

아가씨 김민희의 이모로 나온 문소리는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겼고, 하녀들의 집사 역을 맡은 김해숙은 이모부 조진웅의 전부인으로 알려지면서 뭔가 큰 의미가 숨겨져 있는 듯했지만 흐지부지 끝나버려서 아쉬웠다. 레즈비언 영화라느니 쓸데없이 노출신이며 베드신이 과다했다는 평도 있지만, 이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사랑은, 그 어떤 사랑이든 그만큼 시간을 들여 서로 상대를 배려하고 정성을 다해야만 더없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전하고자 하는 듯했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사랑의 목적이 되어서도 안 되거니와, 사랑한다는 핑계로 상대를 성적 수단으로 삼는 것도 더더욱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 것이다. 

 

이상, 아가씨 김민희 남자들 세상 한복판에 도시락폭탄을 날리다!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