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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대박 아들 연잉군을 통해 귀해진 어머니 숙빈 최씨

 

대박 아들 연잉군을 통해 귀해진 어머니 숙빈 최씨

 

 

드라마 [대박]에서는 지옥 끝에서도 살아 돌아올 듯한 백대길 역을 맡은 장근석의 활약이 눈부십니다. 끔찍하다 못해 징글징글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죽음의 고비를 온몸을 불사르듯 넘고 또 넘는 그의 살기등등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장근석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주겠다는 승부수를 띄운 듯합니다. 그런 장근석 옆에 눈길을 사로잡는 또 한 사람의 배우가 있습니다. 바로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 역을 맡은 여진구입니다. 

 

올해 스무 살이 되는 여진구는 요즘 대세배우인 유아인의 그 시절을 봤을 때 느꼈던 기분을 되살아나게 합니다. 당시 20대 초반의 유아인도 장차 얼마나 큰 배우로 성장하려고 저런 명배우의 포스를 보여주는가 하고 놀랐었는데, 겨우 스무 살에 상남자 포스로 가득한 여진구 또한 앞으로 결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명품배우의 면모를 갖춰나갈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자다운 목소리마저 진중하고 신뢰감을 주는 음색이어서 아역배우에서부터 시작한 배우가 갖게 마련인 나약한 이미지를 완전히 떨쳐낸 듯합니다.

 

대박 아들 연잉군을 통해 귀해진 어머니 숙빈 최씨

 

지난 방송에서 아들 연잉군이 망나니 짓을 하고 다닌다는 말에 화가 난 숙빈 최씨는 궁궐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아들의 뺨을 때리며 "왕손으로서 부끄럽지 않냐"고 야단을 칩니다. 그리고 연잉군이 "망나니면 어떻고 한량이면 어떻습니까. 어머니도 소자를 마음에서 내려두십시오"라고 말하자 "당분간 칩거하며 자중하세요. 이 어미가 내리는 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연잉군은 어머니 곁을 떠나면서 속으로 "어마마마, 됐습니까. 이리 하면 되는 겁니까"라고 말하고 숙빈 최씨 역시 마음 속으로 "잘 참았습니다. 참고 참고 또 참으세요. 살아남아야 후사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살아남아야 옥좌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연잉군은 날 때부터 영특했지만 숙빈 최씨는 아들의 안위를 위해 일부러 망나니로 키워온 것입니다. 실제로 연잉군은 뛰어난 무예와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왕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음지에 숨어 지내는 시절을 보낸 바 있습니다.  

 

 

한편 연잉군의 비범함을 알아본 숙종(최민수)은 장희빈(오연아)의 아들인 세자 이윤(현우)과 연잉군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자신이 어릴 때부터 해준 괴물 이야기를 다시 언급합니다. 숙종은 우물 속 괴물에 대해 “참다 못한 괴물이 우물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다 집어삼켜버리는 것이다”라며 “자신을 괴롭히던 자들을 죽이자니 하늘이 두렵고 살리자니 후환이 두렵고. 대체 이 괴물을 어찌해야 하느냐”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자 세자는 “그 괴물은 본디 선한 존재이니 잘 달래서 하늘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답하지만 연잉군은 “그 괴물은 달랠 수도 죽일 수도 없으며 더더욱 소자의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존재다. 그 괴물이 바로 아바마마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영특한 연잉군의 대답에 숙종은 포상을 하듯 “너를 사헌부 정4품에 임하겠다”고 명합니다.

 

 

연잉군이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는 소식에 기함을 한 숙빈 최씨가 또다시 아들을 불러 야단을 치자 연잉군은 “지난 세월 어마마마 말씀대로 망나니 한량으로 살아왔지만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제 다 컸으니 내 길은 내가 도모하겠다”며 홀로 설 것을 선언합니다. 실제로 숙빈 최씨는 평소 아들 연잉군에게 항상 자중할 것을 가르쳤으며, 숙종은 그런 소박한 품성의 숙빈 최씨와 영특한 연잉군을 무척 아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잉군 또한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긴 했지만 더없이 어머니를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역사의 중심에서 소외된 후궁들의 이야기를 다룬 최선경의 [왕을 낳은 후궁들]을 바탕으로 아들 연잉군을 통해 귀해진 어머니 숙빈 최씨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대박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아들 연잉군을 통해 귀해진 어머니 숙빈 최씨

 

 

숙빈 최씨는 숙종의 후궁이면서도 장희빈과 인현왕후에 가려져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미천한 무수리 출신이라는 소문만 무성할 뿐 그녀에 관한 기록 또한 별로 없다. 그러나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세상을 떠난 왕실에서 숙종의 총애를 받은 사람은 숙빈 최씨와 그의 아들 연잉군(영조)이었다. 비록 신분은 낮았지만 죽을 때까지 왕의 사랑을 받았고 또한 조선의 최장수 임금 영조를 낳은 어머니로서 숙빈 최씨는 행운을 누린 여인이었다.

 

최씨에 관해서는 정식 기록이 거의 없고 야사나 설화를 통해 조각조각 전해질 뿐이어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고아였고, 민씨 집안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으며, 민씨가 왕비가 간택되었을 때 함께 궁에 들어갔다는 사실들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부모를 여의고 천애고아가 된 최씨가 자신을 거두어준 민씨 집안과 인현왕후에게 충성을 다할 이유는 충분했다. 더욱이 인현왕후를 따라 궁에 들어왔는데 민씨가 억울하게 폐위되어 쫓겨났으니 그를 모시는 사람으로서 정성과 의리를 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701년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떠난 빈 자리는 숙빈 최씨와 그녀가 낳은 연잉군이 대신했다. 1702년 세번째 계비로 인원왕후 김씨가 들어오긴 했지만 그녀에겐 후사가 없었다. 숙빈 최씨는 3형제를 낳았지만 첫째와 셋째아들은 일찍 죽고 둘째아들 연잉군만 남았다. 하나 남은 아들과 함께 살아온 숙빈 최씨의 여생은 비교적 평탄했고, 숙종의 특별한 배려를 받았다.

 

숙종은 또한 연잉군도 총애하여 1703년 연잉군의 관례를 치르게 했는데, 이전까지는 왕세자만 관례를 치렀을 뿐 왕실에서 대군이나 왕자의 관례를 치른 일은 없었다. 실록에는 "세자보다는 한 등급 낮게 했지만 그래도 "분수에 넘치는 바가 많아 여론이 아주 해괴하게 여겼다"고 기록돼 있다. 연잉군은 1704년 나이 11세가 되었을 때 진사 서종제의 딸과 혼인했다. 그때도 사치가 법도를 넘어 비용이 만금을 헤아릴 정도였다. 또한 후궁의 아들이나 딸은 혼인을 하면 궁궐 밖으로 나가 살게 되어 있는데, 숙종은 연잉군이 나가 살 집이 아직 없다면서 해조(該曹)로 하여금 새로 구입하게 했다

 

 

당시 숙빈 최씨가 살고 있던 이현궁(梨峴宮)은 매우 크고 넓은 집이어서 후궁이 쓰기에는 호화로운 편이었다. 숙종 28년 비변사 기록에도 이현궁을 고치는 데 말 30필이 3개월 동안 토석을 운반하니 거의 1만 바리가 넘을 정도의 공사비가 들었다고 한다. 이에 참찬관 김진규, 지사 이여 등이 백성을 위해 흉년을 위해 준비해야 할 마당에 후궁의 저택을 짓는 것이 급한 게 아니라면서 이현궁 수리를 속히 중지하도록 간청하자 숙종도 이에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의 잠저(潛邸)였던 이현궁은 숙빈이 거처하면서 숙빈방으로 불렸고, 나중에 연잉군이 거처로 정하여 영조의 잠저가 되었다. 숙종은 숙빈이 살고 있던 이현궁을 환수했다가 다시 연잉군의 집으로 정하면서 숙빈도 함께 살게 했으니 숙빈 최씨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후궁에게 너무 호화스러운 궁이라는 신하들의 반발도 잠재우고 숙빈 최씨와 아들이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했으니 숙빈 최씨를 위한 숙종의 배려가 아닐 수 없었다.

 

연잉군은 혼인하고 바로 출궁하지 않다가 8년이 지난 숙종 38년(1712)에야 독립하게 된다. 숙종 37년부터 출합(出閤. 왕자가 장성한 뒤에 사궁을 짓고 나가서 삶)하기 좋은 날짜를 잡는데, 숙종은 연잉군의 출합날을 자꾸 뒤로 물리더니 이듬해 2월 12일에야 사제로 내보냈다. 그만큼 아들 연잉군을 아꼈던 것이다.

 

 

숙빈 최씨는 성격이 물처럼 고요하고 차분해서 기쁘거나 노여움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으며 인현왕후와 다음 계비인 인원왕후를 잘 모셨다고 한다. 남의 말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여러 후궁 사이에서도 덕망이 있었으며, 숙빈에 오른 뒤에는 군직에 종사하는 동기간을 사직시킬 정도로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이 깊었다.

 

또한 소박한 품성의 그녀는 아들 영조에게 항상 자중할 것을 가르쳤다. 숙종 말년 연잉군을 세자로 바꾸자는 세자 교체설이 떠돌면서 노론과 소론 간 갈등이 또다시 불거졌을 때 정숙하고 신중한 숙빈 최씨는 아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처신을 조심하도록 가르쳤다. 그러한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영조는 화려하지 않으면서 소박하고 서민적인 이미지의 군주였다. 더욱이 19세에 궁궐 밖으로 나가 왕세제로 책봉되기 전까지 10여 년간 일반 백성과 살았던 경험은 그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영조가 탕평책이나 균역법을 시행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영조는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할 정도로 냉혹한 아버지였지만 어머니에게는 더할 수 없는 효자였다. 영조가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졌다고 하는데, 이는 영조 스스로 콤플렉스를 느낀 것이라기보다는 철저한 신분사회가 그의 처지를 곤란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자신의 출신성분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정성으로 극복해 나간 편이었다.

 

이상, 대박 아들 연잉군을 통해 귀해진 어머니 숙빈 최씨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