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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육룡이 나르샤 태종 이방원 무자비한 권력의 속성을 보여주다

 

육룡이 나르샤 태종 이방원 무자비한 권력의 속성을 보여주다

 

 

철혈군주 이방원(유아인)을 둘러싼 이성계(천호진), 정도전(김명민) 등 조선의 기틀을 세우는 데 관여한 육룡을 그린 팩션사극 [육룡이 나르샤]가 이번주 2회를 마지막으로 대장정의 막을 내립니다. 그런데 육룡이 나르샤라고 해서 여섯 용을 그리고 있지만, 결말에 이르러 보니 조선 건국 초기에 이성계나 정도전보다 더 큰 역할을 한 것은 태종 이방원인 듯합니다. 실제로 태조는 1392년 7월에 조선 초대 왕위에 올라 1398년 9월에 상왕의 자리로 물러났으니 6년 남짓 왕좌에 있었던데다 바람잘 날 없는 혼란의 시기여서 제대로 정치다운 정치를 할 상황이 아니었고, 또 불과 2년 남짓 왕위에 있었던 2대 왕 정종 역시 나름대로의 정치를 펼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조선은 18년간 왕위에 머무르면서 왕권강화와 정국안정에 주력한 3대 태종에 이르러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육룡이 나르샤 태종 이방원 무자비한 권력의 속성을 보여주다

 

아버지 이성계와 스승 정도전을 도와 조선 건국을 위해 살인마저 마다하지 않는 심혈을 기울였는데도 아버지도 정도전도 자신을 배제한 정국을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새어머니 신덕왕후의 어린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세웠으니, 야망과 기개가 넘치는 방원으로서는 당시 상황이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특히 대세배우 유아인은 이런 권력에의 욕망과 갈등 사이에서 고뇌하는 이방원 역을 빙의라도 된 듯 섬세하고 치밀하게 잘 연기해 주고 있어서 더 실감이 납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전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윤회라는 것이 있다면 유아인이 과거 태종 이방원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이방원은 스승 정도전을 제거합니다. 아마도 이방원은 자신이 세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혹 자신이 아니더라도 다른 형제들이 있었으니 설마 가장 나이어린 방석이 세자 자리에 오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삼은 것은 신덕왕후의 입김도 있었지만 그 뒤엔 사실 정도전이 버티고 있다는 것을 방원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도전이 펼치고자 하는 신권정치와 이방원이 추구하고자 하는 왕권정치는 서로 완벽하게 대립되는 것이었기에 두 사람은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정도전을 죽이지 않으면 방원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즉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만 끝이 나는 게임이었던 것입니다.  

 

 

정도전을 제거한 방원은 이복동생인 세자 이방석에게도 가차없이 칼을 휘두릅니다. 살려달라고 눈물로 애원하는 방석을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방원입니다. 일말의 동요도 없이 방석(정윤석)을 죽이는 그의 모습은 잔혹함 그 자체입니다. 이복형제들의 피를 묻히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그 후에도 '철혈군주'라는 명성에 걸맞게 왕권을 강화하는 데 방해가 되는 사람은 과감히 제거해 나갑니다.  

 

 

이어서 방원은 방석을 죽인 것을 알고 한달음에 달려나온 아버지 이성계의 분노와 맞서게 됩니다. 개돼지 만도 못하다는 비난까지 들으면서도 방원은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이성계를 향해 "죽으라고 하면 받아들이겠다. 차라리 죽으면 이 고통도 끝이 나겠다"며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형제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방원이나 아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태조나 참 대단한 성정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부전자전이라고, 태조의 무인 기질을 가장 많이 닮은 것이 바로 방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방원은 그 후 왕위에 오르자 정동에 있던 신덕왕후의 묘를 훼손해 동소문 밖(지금의 정룽)으로 옮기고 묘지석은 광통교에 깔아 도성의  백성들이 밟고 지나다니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죽인 이복형제들의 어머니 신덕왕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적통을 확립하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얼금고법을 만들어 적자가 아닌 사람은 아예 문과시험을 볼 수 없게 했을 뿐 아니라 재가녀의 아들과 손자까지도 출세를 제한했습니다. 적자임에도 서얼에게 밀렸던 수모에 대해 방원이 얼마나  뼛속깊이 분노했었던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더욱이 자신은 제1,2차 왕자의 난을 위해 사병을 기르고 사병혁파를 외친 정도전에게 칼을 겨누었으면서도 왕위에 오르자 바로 반란의 불씨가 될 사병혁파를 단행한 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권력에 대한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이성무의 [조선국왕전]을 바탕으로 이방원에 대해 좀더 알아보았습니다. 육룡이 나르샤 태종 이방원 무자비한 권력의 속성을 보여주다입니다. 태종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역성혁명의 1등공신 태종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해서 아버지 태조의 사랑을 받은 태종은 자라면서 유학공부에도 심취하여 문무를 겸비했으며 17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태조는 무인집안에 학자가 한 명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방원에게 특별히 학식이 높은 선생임능 붙여주고 여러 선비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글만 읽는 유생이 아니었던 방원에게는 아버지 못지않은 무인 기질과 그보다 더 큰 야망이 있었다. 방원의 이러한 야망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392년(공양왕 4) 정적인 정몽주를 제거하면서부터다. 정몽주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역성혁명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방원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기어이 정몽주를 죽였다. 이 일로 그는 아버지의 미움을 사게 되었지만 이것이 조선 창업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정몽주를 격살하고 역성혁명의 1등공신이 된 태종은 그 후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까지 자신의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해 나갔으며, 형제들과의 피비린내나는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둘째형 방과를 왕위에 앉힌 후 세제가 아닌 세자가 된 방원은 곧바로 정종과 공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에 집중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반발하는 세력은 과감히 제거했다. 결국 병권까지 장악한 방원은 세자에 오른 지 채 1년도 안 돼 정종으로부터 선위를 받아 왕좌에 올랐다. 1400년 11월의 일이었다.

 

 "내가 조선의 창업군주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개선했다. 첫 신호탄은 명나라 황제로부터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받은 것이었다. 고명은 중국 황제가 주변국 왕에게 주는 일종의 임명장이고 인신은 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도장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외교관계에서 종주국인 중국으로부터 고명과 인신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지만, 조선은 개국 후 10년이 지나도록 명나라의 고명과 인신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 개국 초기 정도전의 요동정벌 계획 등으로 인한 외교적 마찰과 명나라의 내부적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태종이 즉위한 후에야 드디어 고명과 인신을 받게 된 것이다. 태종의 외교적 수완이 그만큼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태종이 스스로를 창업군주로 여기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이를 계기로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태종은 이와 같은 대외적 안정을 바탕으로 내부적으로도 정국의 안정을 꾀하며 창업군주다운 업적을 하나둘 이루어나갔다. 먼저 정종이 개경으로 옮긴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아버지 태조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던 태종은 아버지 때에 설계한 한양으로 수도를 다시 옮겨온 것이다. 그리고 창덕궁을 새로 지어 경복궁과 번갈아 가며 머물렀다. 이로써 강력한 왕권의 통치기반이 될 한양도 그에 걸맞는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태종은 이 밖에 서적을 인쇄하는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불교개혁을 단행해 국고를 충실히 하는 등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진했다.

 

 왕권강화를 통한 정국안정

 

 

태종이 재위하는 동안 가장 신경쓴 부분은 왕권강화를 통한 정국안정이었다. 그는 먼저 관제개편을 단행해 의정부의 서무를 육조가 분장하게 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채택했다. 육조직계제는 육조에서 각각의 담당 업무를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으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이 대부분의 정사를 직접 처리하기 때문에 재상의 권한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이는 건국 초기에 정도전이 펼친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와는 다른 국왕 중심의 통치체제였다.

 

그러나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는 정도로 만족할 태종이 아니었다. 태종이 빼어든 보다 강력한 왕권강화 카드는 외척 세력의 견제였다. 외척은 왕이 힘이 없을 때는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줄 수 있지만 지나치게 득세할 경우에는 오히려 왕권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었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절대권력을 꿈꾸었던 태종에게 외척의 득세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태종이 가장 경계한 외척은 처갓집인 여흥 민씨 집안이엇다. 여흥 민씨 집안에는 원경왕후의 아버지 민제를 비롯해 아들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 형제가 있었다. 그런데 원경왕후가 누구인가?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조에 오르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운 여장부가 아닌가? 민무구와 민무질도 방원이 왕이 되는 데 원경왕후 못지않게 공이 컸다. 태종은 바로 이 점이 마음에 걸렸다. 공신인데다 세자의 외숙이라는 지위까지 가진 민씨 집안 형제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엇다.

 

이 밖에도 태종은 왕실 족보인 선원보(璿源譜)를 재정리해서 태조와 자신의 직계만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정종과 자신의 서자는 물론 태조의 방계인 이원계와 이화 역시 왕실 족보에서 제외시켰다. 자신이 죽은 후 종친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지지 않도록 미리 조치한 것이다. 특히 태종의 이복동생인 이화는 조선 건국에 공이 크고, 태종이 두 번의 왕자의 난을 통해 왕좌에 오르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 중 하나다. 그리고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외척인 민씨 형제를 몰아내는 데 앞장설 만큼 태종에게 충성을 다했음에도 왕실 족보에서 제외시킨 것을 보면 태종의 과단성을 엿볼 수 있다.

 

 태종의 선위파동

 

 

1406년 8월, 태종은 느닷없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나섰다. 갑작스러운 왕의 선위 발언에 놀란 백관과 종친들이 펄쩍 뛰며 명을 거두라 아뢰었다. 선위는 불가하다는 반대상소도 빗발쳤다. 그러자 태종은 며칠 만에 선위를 하겠다는 명을 철회했다. 태종의 이 선위파동으로 화를 입게 된 이들이 있었다. 바로 민무구, 민무질 형제였다. 태종이 선위를 하겠다고 했을 때 이들은 내심으로 좋아하면서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들의 죄를 제일 먼저 청하고 나선 사람은 영의정 부사 이화였다. 이화는 상소를 통해 민무구, 민무질 등을 금장의 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금장의 죄란 그들이 태종에 대해 역심을 품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역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 일로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공신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유배를 가게 되었으며, 결국 1410년 유배지에서 자진했다.

 

이런 과정을 볼 때 태종의 선위파동은 외척인 민씨 집안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태종의 의도대로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죽음으로 민씨 집안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민씨 집안에 대한 태종의 견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민씨 형제의 막내인 민무회가 태종에 대해 불충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으며, 그의 형 민무휼 역시 민무회가 불충의 죄를 지은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이 두 사람 역시 1426년 각각 유배지에서 자진했다. 태종은 이들 형제의 누나인 원경왕후마저 폐위시키려고 했는데, 원경왕후는 왕세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간신히 폐서인이 되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다. 태종은 외척뿐만 아니라 공신들도 견제했고, 그 결과 이무, 이숙번 등이 제거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태종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으며, 조선 건국 초기의 혼란을 잠재우고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나갔다.

 

 세종시대를 위한 태종의 마스터플랜

 

 

1404년 태종은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아들 양녕대군을 왕세자에 책봉했다. 이때 양녕의 나이 11세였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자유분방한 기질을 타고난 양녕은 착실히 공부를 하기보다는 말타기, 활쏘기 등을 즐겼다. 성인이 된 후에는 여색을 즐겨 자주 궁궐 밖으로 나가 기생들과 어울려 놀았다. 완벽을 추구하는 태종에게 이런 양녕이 눈에 찰 리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적장자 계승의 원칙을 무시하고 왕위에 오른 것에 부담을 느낀 태종은 장자인 양녕을 쉽게 내칠 수 없었다. 그래서 양녕을 정신을 차리도록 꾸짖어도 보고 타일러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1418년 결국 태종은 양녕을 폐하고 셋째아들 충녕을 세자로 삼았다. 충녕은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해 왕의 재목으로 손색이 없었다. 태종은 충녕이 세자로 책봉된 지 두 달 만에 선위를 발표했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왕위를 물려주고 뒤를 봐주려는 마음에서였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세종이 수성 군주로서 완전한 모습을 갖출 때까지 자신이 병권을 쥐고 정사에 관여하겠다고 선언했다. 세종만큼은 어진 성군으로서 정사에만 집중하기를 바란 태종은 자신이 직접 새종을 대신해 폐세자 양녕의 지지 세력을 정리하고 이척 제거에도 직접 나섰던 것이다.

 

태종은 세종이 성군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챙겼다. 실제로 세종 재위 초기에 행해진 대마도 정벌 등의 군사작전은 상왕 태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처럼 창업 4대 만에 해동의 요순시대를 연 세종의 탄생은 태종의 철저한 마스터플랜에 따라 이루어졌다. 태종은 할 수만 있다면 세종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할 때까지 계속 뒤를 봐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이 즉위한 지 4년 만인 1422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왕인 세종을 만들어낸 것이 태종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이상, 육룡이 나르샤 태종 이방원 무자비한 권력의 속성을 보여주다였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