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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맹사성 온유의 리더십

 

맹사성 온유의 리더십

 

 

패망한 고려의 신료 고불(古佛) 맹사성은 조선에 출사해 갖은 고생과 좌절을 겪었으나 비정치적 처신과 겸손, 청빈한 자세로 태종과 세종대에 충성을 다함으로써 군주와 백성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맹사성이 남긴 온유의 리더십은 요즘처럼 혼란스러운 시기를 살아나가야 할 후손들에게 길이 배우고 익혀야 할 교훈입니다. 

 

최근 KBS 드라마 [장영실]의 인기에 힘입어 아산시 배미동에 위치한 장영실 과학관만이 아니라 맹사성의 고택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드라마에서는 배우 김병기가 맹사성 역을 맡아 겸손하면서도 온유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박기현의 [조선참모실록]을 바탕으로 두 왕조를 섬긴 자괴감을 문화예술로 꽃피웠던 맹사성 온유의 리더십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맹사성 온유의 리더십

 

망국 고려의 충신들은 굶어죽을지언정 새 왕조에는 충성할 수 없다는 단호한 결단을 보였다. 조선 건국 후 끝까지 출사(出仕)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이 그랬고, 맹사성의 조부 맹유가 이에 동참했으며 부친 맹희도 역시 벼슬을 그만두고 칩거에 들어갔다. 이에 반해 맹사성은 조부와 부친이 걸어간 충신의 길을 버리고 조서에 출사해 자신의 명예와 가문의 영광을 지켰다. 조선의 대학자이자 문장가인 권근이 초야에 묻혀 있던 맹사성을 '조선의 미래를 짊어질 천재'라고 적극 추천해 조정에 출사토록 한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 실력있는 인재로 촉망받던 맹사성은 세종대에 좌의정까지 오르는 등 성공적인 삶을 이뤄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선조가 반대한 새 왕조에 출사했기 때문에 적잖은 고민과 방황을 겪었다. 고려를 버리고 조선을 택한 변절에 대한 속죄감이 한평생 그의 가슴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수원 판관을 지내는 동안 맹사성은 '부러지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하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결론을 얻었다, 더 이상 정치와 이념에 매달리지 말고 비정치적 처신으로, 오로지 백성을 위해 일하고 자신을 낮추며 온화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자는 것이었다.

 

때마침 맹사성은 중앙 관료로 불려들어갔다. 그는 이미 작심하고 준비한 특유의 처세법을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신을 낮추되, 지극한 겸손과 절제로 대하자>는 온유한 자세는 맹사성이 지켜나갈 맹사성표 처신술이었다. 그는 군주를 모실 때와 상하좌우의 신료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결코 겸손과 온유, 절제와 조화를 잃지 않았다. 그것은 대인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맹사성이 추구한 대인관계 소통방식은 윗사람에게는 정직하게 이야기하되 겸손을 지키고, 아랫사람에게는 정과 사랑을 담되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평생 이 원칙을 어기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편 자신의 처남들까지 형장으로 보내는 등 철저히 힘으로 왕위를 지켜낸 태종은 망국 고려에서 일했던 신하들의 진심을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태종이 보기에는 맹사성이 문제였다. 도무지 그의 진심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온화하고 부드럽긴 한데, 그 밑바닥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태종은 맹사성의 충성심을 흔들어보고 그 됨됨이를 확인해 보고자 했다.

 

맹사성이 삼정승과 군주에게 직언을 통해 조정의 의견을 좌지우지할 뿐 아니라 수사권과 재판권까지 보유한 사헌부 대사헌의 자리에 있을 때였다. 태종은 자신의 사위인 부마 조대림이 역모에 휘말리는 사건이 일어나자 관노 출신 목인해의 꼬임에 빠져 그렇게 된 것을 알고 그를 무죄방면토록 하라고 명했다. 사헌부 수장 맹사성은 이 문제로 태종의 신뢰를 얻을 수도, 아니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다. 법대로 하면 조대림은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임금은 그를 무죄방면하라고 했으니 그 명을 따르면 대사헌의 직임보다 임금의 눈치를 본다는 비판과 함께 권력지향형 인물로 낙인찍힐 게 뻔했다. 그렇다고 대사헌의 직임대로 처리한다면 태종의 성격으로 보아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절대적 위기였다. 그러나 맹사성은 죽음을 각오하고 원칙대로 조대림을 형벌에 처하기로 결정했다.

 

 

맹사성이 부마 조대림을 처벌하기로 했다는 보고를 받은 태종은 분노했다. 맹사성의 충성심을 살필 절호의 기회였으며 사사건건 시비를 붙는 사헌부를 길들일 좋은 기회이기도 했으니 누구보다 정치적인 군주인 태종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태종은 임금이 나서서 정리한 문제를 대사헌 등이 들고 일어난 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천명하며 맹사성을 엄벌하라고 지시했고, 때려서 죽어도 좋으니 그냥 둘 수 없는 일이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계속해서 매질을 당하고 고문을 받자 문신 출신의 유약한 맹사성은 '모약왕실'(謀弱王室)이라는 거짓진술을 하고 말았다. 모약왕실이란 '왕실을 약하게 하려고 일을 도모했다'는 뜻인데, 이마저도 맹사성의 자백이 아니라 공초에 미리 이 문구를 써놓고 맹사성이 이를 인정하도록 한 것이었다. 태종은 맹사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일이 지나칠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어 맹사성이 죽음에 이르게 되자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노정승과 신료들까지 달려들어 이 문제를 진화하려고 했다. 특히 병석에 누워 있던 길창부원군 권근이 가마를 타고 들어와 임금에게 맹사성의 죄를 사해달라고 청했다.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었으니 맹사성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다. 영의정 하륜도 맹사성을 감쌌고 좌의정 성석림도 뜰에 나와 아뢰었다. 이처럼 고위 관료들이 모두 나와 눈물을 흘리며 맹사성을 두둔하고 사면을 요구해 간신히 문제를 가라앉혔던 것이다.

 

1408년 12월 극형만은 면한 맹사성은 장(杖) 백 대를 맞고 한주(충남 한산)에 있는 향교로 유배되었다. 그 후 1409년 8월 7일 태종은 맹사성에게 직첩을 도로 주어 외직으로 전근시켰으며, 같은 달 9일 쌀 20석을 하사했다. 또 1411년에는 맹사성, 유정현(대사헌), 이승상(형조판서) 등을 위한 잔치를 베풀어 고생한 맹사성을 위로했다. 맹사성은 태종의 테스트를 계기삼아 조선의 진정한 참모로 성장해 나간다. 

 

맹사성과 소(이미지 출처 다음백과사전)

 

맹사성의 군주를 섬기는 태도를 마치 부모를 모시는 것처럼 정성스럽고 충성스러웠다. 일각에서는 그가 군주를 모심에 지나치게 겸양해서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과단성이 부족했다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그의 온유함과 비정치적 소신 때문이었다. 그는 평생을 온유하고 겸손하며 정빈하게 살았고, 신분고하를 초월해 사람 사귀는 것을 즐겨했다. 또한 그는 뛰어난 학자이자 관료였을 뿐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대단히 깊었다. 악기 연주를 즐기는 연주자였으며, 악기를 직접 만들기까지 했다. 특히 늘 소를 타고 다니며 피리를 즐겨 불었고, 홀로 있을 때에도 피리를 자주 불었기 때문에 그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는 피리 소리만 들으면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맹사성은 세종의 뜻을 받들어 조선 초기 음악과 관련된 모든 제도와 예를 정비했다. 1431년에는 태종실록을 편찬한 공로로 좌의정이 되었고, 73세 때인 1432년에는 조선왕조 최초의 지리책인 [신찬팔도지리지]를 편찬했는데, 이는 그가 이룬 큰 업적 중 하나였다. 이 신찬팔도지리지는 현재 전해지는 본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조선 인문지리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고, 이후 제작된 조선시대의 모든 지리지의 바탕이 되었다. 또한  세계 지리학사에도 이름이 날 쾌거였으며, 조선의 지리학이 과학적인 인문 지리학으로 발전하는 첫 단계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맹사성은 조선 최고의 청백리라 칭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청렴한 일생을 보냈다. 관직에서 번 돈으로 식량을 사먹었고 결코 다른 수입을 꾀하지 않았던 그는 식량을 사고 남은 녹봉을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나눠주었으며, 자신은 집 한 채 제대로 갖추지 못햇다. 현재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있는 맹씨행단도 최영의 집을 물려받은 것이다. 맹사성의 집은 청렴거사의 집답게 턱없이 비좁고 허술했으며 비가 오면 가구와 살림살이가 모두 젖었다. 그의 집을 찾았던 병조판서는 매우 협소한 집을 보고 자신의 집에 돌아와 “정승의 집이 그러한데, 내 어찌 바깥 행랑채가 필요하리요”라며 자신의 바깥 행랑채를 헐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또한 맹사성은 효성이 지극해 자주 온양으로 부친을 뵈러 갔는데, 그때마다 하인 하나만 데리고 소를 타고 왕래했다. 판서까지 지낸 그가 마음만 먹으면 편히 갈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절제하고 삼갔으니 그것 자체가 후대의 공직자들이 본받을 일이다. 1438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대왕은 맹사성의 장례기간 동안 모든 국정을 중단하고 문무백관을 거느리며 문상했다고 한다. 

 

맹사성 묘(이미지 출처 문화재청)

 

경기도 광주시 직동 산 27번지 야산 기슭에 있는 맹사성의 묘(경기도 기념물 제21호)이다. 봉분 앞에는 세종 20년(1438)에 세운 묘비가 있으며 봉분 좌우로 문인석과 망주석, 동자상이 배치되어 있다.

 

아산 맹씨행단(사적 제109호)

 

충남 아산군 배방면 중리에 있는 맹사성의 고택 맹씨행단(杏壇)이다. 행단이란 선비가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뜻인데, ㄷ자형 맞배집인 이곳은 여느 백성이 살던 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져 있다. 

 

세덕사(世德社. 대대로 쌓아 내려온 미덕을 기리는 사당)

 

이상, 맹사성 온유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