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이 나르샤 정도전과 토지개혁 과전법 반포

 

육룡이 나르샤 정도전과 토지개혁 과전법 반포

 

 

조선의 기틀을 세운 태종 이방원(유아인)을 중심으로 이성계(천호진), 정도전(김명민), 이방지(변요한), 분이(신세경) 등 여섯 인물의 야망과 성공스토리를 다룬 팩션사극 [육룡이 나르샤] 32회에서 토지개혁 시행을 앞두고 고민에 빠져 있던 정도전은 아예 토지대장을 불태워버리는 묘책으로 어려운 상황을 타파해 냅니다. 그 모습은 마치 컬럼버스의 달걀 세우기 혹은 고디언의 매듭처럼 알고 나면 너무 쉬운 일이지만 그 대책을 생각해 내기 전에는 어렵기만 한 기발한 해결책을 내놓았을 때처럼 허를 찌르는 통쾌함을 안겨다주었습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어떻게 하면 백성들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토지개혁을 할 수 있을까 불철주야 고민을 거듭해 온 정도전의 큰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입니다.

 

정도전과 토지개혁 과전법 반포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덕일의 [정도전과 그의 시대]를 바탕으로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정도전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이날 이성계파는 무명의 방해로 토지개혁을 위한 양전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성계를 비롯한 혁명파들은 하루빨리 토지개혁을 시행하고자 했지만, 현재의 자료로만 토지개혁을 시행하는 것이 옳을지 아니면 더 자료를 확보해서 더욱 많은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때까지 토지개혁을 미뤄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고민에 빠져진 정도전은 이방지를 만나자 "지금까지 양전된 것만으로 토지개혁을 시행해야 할지 아니면 충분히 양전이 될 때를 기약없이 기다려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며 "넌 검을 겨룰 때 공격이나 방어의 판단을 어찌하느냐"고 묻는다. 이방지는 "저 같은 칼잡이들은 찰나에 결정을 해야 합니다. 어떤 결정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결정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공격이, 내 방어가 반드시 들어갈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그 믿음이 틀리면 죽음이 기다릴 뿐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번에는 분이를 만난 정도전은 "이대로는 우리가 하려는 계민수전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말하자 분이는 “계민수전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라며 백성들을 걱정했다. 이에 분이는 “조직사람들이 볼 때마다 땅은 언제 갖고, 고향엔 언제 갈 수 있는지 묻는다”며 “조직들은 먼 훗날을 바라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오늘 있던 사람이 내일도 있으리란 법은 없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정도전은 “토지개혁이 그저 세율을 낮추는 정도로 끝날 수도 있다. 쉽지 않을 거다“며 걱정스러운 마음을 나타내자 분이는 “쉬운 일만 했던 것은 아니지 않냐. 뭐라도 하시리라 믿는다”며 정도전을 일깨웠다.

 

 

마지막으로 이방원을 만난 정도전은 그에게도 의향을 물어본다. 그러자 이방원은 "어차피 지나갈 일이지만, 이 시기의 늦어진 한 걸음이 훗날의 몇 걸음이 될지 알 수 없지요"라고 대답한다. 많은 사람들의 뜻을 알게 된 정도전은 결심이 선 듯 사람들을 장평문으로 모이라고 한 뒤 역사에 길이 남을 너무나 멋진 명연설을 한다. 그 연설을 그대로 옮겨본다.

 

 

"나는 정도전이요. 나 정도전은 스승님과 동문들, 선배들을 탄핵하고 유배를 보냈소이다. 바로 이것들 때문이었소. 여기 있는 것들은 이 고려 전체 의 토지대장이요. 다시 말해서 이것은 이 나라 백성들이 빼앗긴 땅의 목록이자 되찾아야 할 땅의 전부란 말이요. 이 토지대장에 적힌 단지 몇십 자의 글자로 여러분은 일평생을 일군 땅을 잃었고 고향에서 쫓겨나 낯선땅을 헤매고 있는 것이요."

 

 

"자, 여기에 가렴주구와 토지겸병으로 얽힌 고려의 토지대장이 있소. 또 도화전엔 이만큼의 새로운 양전 자료가 있소. 60만결의 양전자료요. 물론 이것이 다가 아니나 우리는 힘겹게 여기까지 왔소. 그 양전자료를 바탕으로 토지개혁에 착수한다면 빼앗긴 토지의 대부분을 되찾을 수 있고 조세는 단지 10분의 1만 내면 될 것이외다."

 

 

"허나 여러분이 장터에서 보았듯이 땅을 겸병하고 수탈한 자들이 복잡한 정치논리를 내세워 이를 반대하고 있소이다. 정치가 무엇이요? 정치란 복잡해 보이지만 실은 단순한 것이요. 정치란 나눔이요 분배요. 정치의 문제란 결국 누구에게 거둬서 누구에게 주느냐, 누구에게 빼앗아 누구에게 채워주는가, 당신들은 누구에게서 빼앗아왔고 누구의 배를 채웠소이까?"

 

 

"밀직부사 나 정도전 지금부터 정치를 하겠소. 이 나라의 땅은 5백년간의 가렴주구와 겸병과 수탈로 썩어문드러진 땅이요. 여러분은 썩은 땅을 어찌 개간하시오? 응당 불을 질러 화전을 함이 옳지 않겠는가? 화전을 해본 사람이 나서서 불을 질러라. 이제 이 나라의 땅은 새롭게 태어날 것이외다!"
 

 

백성들은 토지에 불을 지르고, 토지대장이 불에 타오르는 모습을 보고 이방원은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 이 토지대장이 다 타버리고 나면 토지를 다시 나눌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 멋진 정도전이라는 사내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며 가슴벅찬 감동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역사 속 과전법(科田法)으로 기록된 토지개혁의 시작이다. 과전법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에 따른 국가 재정의 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성계를 비롯한 조준 등 신진사대부들이 주도하여 실시한 토지제도다. 토지의 국유화를 원칙으로 공전(公田)을 확대하고 사전(私田)의 분급은 일정한 제한을 두었으며, 조선 초 양반관료사회의 경제기반을 이루었다. 역사 속 계민수전(計民受田)이란 정도전의 전제개혁으로, 전국의 토지를 국유화해 나라 안의 모든 농민에게 식구 수대로 분배하는 토지사상이다. 당시 백성들을 위한 진보적인 발상이었지만 그의 발상은 조선 후기 실학파에 와서야 본격화되었다.  

 과전법 반포

 

 

공양왕이 즉위한 뒤 불과 10여 일 후인 1389년 12월, 조준 등은 다시 상소문을 돌려 토지문제에 대한 처리방안을 이야기한다. 이때 6도 관찰사들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조준은 양전의 결과 총 50만결을 찾았다. 이 50만결이 역성혁명파가 새나라를 개창할 물적토대였다. 1결당 20석이 수확되니 50만결이면 천만석 정도가 나오는 농지다. 그 동안 이 농지 상당수가 권세가들의 개인소득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국가 및 왕실, 관료들의 녹봉으로 돌린 것이 과전법이다.

 

먼저 10만결은 나라의 비용으로 나누고 또 10만결은 관리의 녹봉, 곧 봉급용으로 나누고 또 10만결은 관리의 과전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남은 20만 결 중 3만결은 왕실의 소요비용으로 하고 나머지 17만결은 주/현/진을 비롯한 지방관아의 비용으로 할애했다. 여기서 또 원칙을 세운다. 관료에게 주는 과전은 반드시 경기 내로 한정한 것이다. 종전처럼 전국 각지에 사전이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조치였다.

 

이렇게 경기 이외에 사전을 일체 갖지 못하게 하자 구가세족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그러나 역성혁명파는 반대논리를 모두 꺾어버리고 공양왕 2년(1390년) 정월, 급전도감을 통해 새로 과전을 받을 관리들에게 전적, 즉 토지문서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는 일체의 공사전적을 개경 시내에 쌓아놓고 불을 지른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는 이때의 상황에 대해 "기존의 공사전적을 시가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그 불이 여러 날 동안 탔다"고 말하고 있다.

 

공사전적을 모두 불태움으로써 그때까지의 토지제도는 확실히 무효가 되었다. 이제 토지문서가 없으니 더 이상 내 겻이었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어진 것이다. 고려왕실에서 토지개혁을 거부한 결과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본디 토지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나누어 사용해야 하는 유한재다.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독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역성혁명파는 이런 당연한 진리를, 하지만 실천하기에는 너무도 힘든 진리를 실천한 것이다. 과전법을 이런 토대 위에서 공포되었다.

 

 조선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부여한 과전법 

 

 

과전법은 조선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설파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왕조 교체를 정당화할 수 있었던 수단이 사전개혁이었고 과전법이었다. 과전법을 공포함으로써 역성혁명파는 왕씨 임금을 이씨로 바꿀 수 있는 기반을 획득했다. 물론 과전법이 백성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5백년 가까이, 정확히는 474년 동안 존속했던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하는 데 개창 주도 세력만 이익을 본다면 저항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역성혁명파 사대부들은 일반백성들에게도 이득이 되고 자신들에게도 이득이 되는 최대공약수를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과전법이다.

 

소수가 거대한 땅을 독차지하고 다수는 송곳 꽂을 땅조차 없던 고려 말, 일 안 하는 소수는 호화롭게 살고 뼈빠지게 일하는 다수는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고려왕조가 도대체 왜 존속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정도전은 토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백성의 수를 헤아려 토지를 나누어주는 계민수전, 혹은 백성의 입을 헤아려 농토를 나누어주는 계구수전이다. 그런데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려면 토지가 있어야 한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구가세족들, 권귀들의 토지를 몰수하는 수밖에 없다. 정도전의 계민수전은 결국 귄문귀족의 토지를 몰수해 백성에게 나누어주겠다는 방안이었다.

 

하지만 구가세족의 반발과 추대로 왕위에 오르기를 바랐던 이성계의 욕심 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지는 못했다. 정도전은 과전법에 대해 "백성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옛사람들의 토지제도, 즉 정전제나 균번제까지는 못 갔지만 고려의 토지제도보다는 만 배나 낫다"고 자평했다. 그만큼 고려말 사전의 폐단을 과전법으로 해결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사전을 개혁하고 과전법을 공포하고 나서 이성계의 즉위는 기정사실이 된다.

 

이상, 육룡이 나르샤 정도전과 토지개혁 과전법 반포였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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