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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화정 봉림대군 효종의 북벌론과 독살설

 

화정 봉림대군 효종의 북벌론과 독살설 

 

 

드라마 화정에서 그 동안 형 소현세자(백성현)의 그늘에 가려져 늘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자리를 지켜온 봉림대군(이민호)이 드디어 조선의 제17대 왕으로 어좌에 올랐습니다. 다음 왕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소현세자는 안타깝게도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동생 봉림대군이 조선을 이끌어나갈 왕이 된 것입니다. 소현세자가 삼전도의 치욕을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맞추어 조선을 바꾸는 것으로 승화시키려 한 인물이라면 동생 효종 이호(李淏)는 그 치욕을 북벌로 씻으려 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북벌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중 갑작스레 세상을 떠납니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과 그가 북벌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예견치 못한 죽음으로 독살설에 휘말린 상황 등을 이덕일의 [조선왕독살사건]을 바탕으로 간추려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화정 봉림대군 효종의 북벌론과 독살설입니다.    

 

화정 봉림대군 효종의 북벌론과 독살설

 

드라마상에서는 봉림대군이 왕좌에 오르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정명공(이연희)주입니다. 그 동안 [화정]이 정명공주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임을 표방하면서 기실 정명공주의 역할이 너무 미미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번에야말로 소용조씨의 아들 숭선군을 물리치고 봉림대군을 어좌에 오르게 함으로써 그 힘을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소현세자의 장자 석철이 있기는 하지만 겨우 열 살밖에 안 된 터여서 왕위에 오른다 한들 인조(김재원)의 후궁 소용조씨(김민서)와 좌의정 김자점(조민기)이 조정을 쥐락펴락하는 상황에서는 도저히 견뎌내지 못했을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래 살아서 선조-광해군-인조-효종에 이르는 조선의 4대 왕을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한 것만으로도 정명공주의 삶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명공주는 인조를 만나 봉림대군이 국본에 올라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시름에 빠지고 소용조씨와 김자점의 농간에 정사를 돌보는 일에도 소홀하던 인조는 대신들 앞에서 봉림대군을 국본으로 선언합니다. 실제로 봉림대군은 형 소현세자와 함께 8년여를 심양에 머물면서 서양문물을 배우고 실리외교를 주창했던 소현세자와 달리 반청사상을 한껏 고조시킨 인물이어서 인조는 봉림대군의 이러한 반청감정을 흡족하게 여기고 차남 봉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습니다. 

 

 

백성들은 소현세자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저마다 흰 천을 달고 저잣거리로 몰려나와 울부직으며 그 진상을 밝혀달라고 호소하니다. 김자점은 이를 폭동으로 보고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합니다. 봉림대군은 무고한 백성들이 군졸들에게 매질을 당하는 것을 보고 “죄없는 백성들에게 매질을 멈추라”고 외치며 군졸들에게 맨몸으로 달려들었다가 그 역시 매질을 당합니다.

 

 

봉림대군은 백성들이 몽둥이로 맞으며 끌려가는 아비규환의 한복판에 주저앉아 두 손에 하얀 천을 꽉 쥔 채 이를 악물고 “이럴 수는 없다. 절대로 이렇게 저하의 꿈 모두를 잃을 수는 없어”라며 고통스러운 분노를 폭발시킵니다. 봉림대군의 가슴속에서는 형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점점 짙어지고 김자점과 소용조씨에 대한 복수의 마음도 점점 커져갑니다. 

 

 

국본에 오른 봉림대군은 신하들과 첫 정무에 나섭니다. 그리고 김류(박준규)가 정무에 대해 설명하자 자신은 정무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저는 다만 제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공부를 좀 할까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김자점이 “공부라 하셨습니까?”라 되묻자 봉림대군은 “관통가. 그것은 옛일을 거울삼아 지금 일을 행하란 뜻이지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의 것이 아니라 지난 정사를 돌보고자 합니다”라며 조정 대신들의 과거 악행을 다시 파헤치고자 하는 의도를 내비치며 단호함과 카리스마가 가득한 얼굴로 김자점을 노려봅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들여다 본 것이 지난 병자호란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걸 보니 이 나라가 왜 두 번씩이나 청국에 침탈당했는지 알겠더군요. 그것은 힘을 가진 자들을 단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라 덧붙이면서 조정을 개혁할 의지를 드러냅니다.    


 이상주의자 효종 

 

 

볼모생활 내내 복수심과 청나라를 정벌할 것을 다짐했던 봉림대군은 귀국 후 청나라를 정벌하고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아버지 인조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했으며 그 때문에 당시 총애를 받던 소용조씨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이복형제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원손의 세자 책봉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중신들의 뜻을 물리치고 봉림을 세자로 책봉했다. 봉림은 세자의 물망에 오르자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거듭 권고가 들어오자 인조의 뒤를 이어 조선으 17대 왕으로 즉위했다. 봉림대군의 나이 27세 때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소현세자와 원손 석철에 대한 말은 금기가 되었다. 소현세자와 원손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효종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일 수 있었다. 비록 소현세자의 두 아들은 제주도에서 죽었을지라도 셋째아들 석견은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에 대해 해결할 일은 효종이 즉위했다고 해서 그냥 묻어버리기에는 너무 많았다. 소현의 급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함에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의관 이형익의 처리문제도 그 중 하나였다.

 

효종의 즉위 후 중신들은 다시 이형익의 처형을 청했으나 효종은 인조가 그랬던 것처럼 단호하게 반대했다. 이형익은 인조의 공신이자 효종 즉위의 일등공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 일가의 죽음에 관한 문제도 있었다. 강빈은 누가 봐도 시아버지 인조에 의해 누명을 쓰고 죽은 불쌍한 며느리였고, 그 식구는 사돈에 의해 멸문된 불쌍한 가문이었다. 이렇듯 불씨를 안은 채 잠복해 있던 강빈 신원(伸寃) 문제는 효종 5년(1654)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가뭄이 계속되자 효종이 사대부들의 의견을 구했는데, 이때 황해 감사 김홍욱이 응지상소(應之上訴)를 올리며 강빈의 신원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강빈이 저주사건을 일으키고 인조의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는 이미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소용조씨와 김자점의 공작이었다며 강빈의 무죄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효종은 김홍욱의 상소에 격렬하게 분노했다. 이 상소를 자신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만큼 강빈 문제는 효종의 아킬레스건이었기에 효종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김홍욱을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김홍욱의 상소대로 강빈 옥사를 재조사해서 사건 자체가 조작임이 밝혀지면 그 파장은 손쓸 길이 없었다. 강빈이 무죄라면 강빈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유배형에 처해져 제주도에서 죽어간 두 아들도 당연히 신원되어야 했으며, 나아가 셋째아들 석견이 생존해 있으므로 종통(宗統)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소현세자가 이형익에 의해 독살당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효종의 정통성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소현의 죽음에 효종이 관련되었다는 소문이 퍼질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효종은 거의 모든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홍욱을 국문했고, 가혹한 국문에도 굴하지 않은 김홍욱은 결국 장살(杖殺. 곤장을 맞고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김홍욱의 장살 사건 이후로 조야는 흉흉해졌고, 그때까지만 해도 효종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던 서인과 남인에서도 소현세자의 아들을 세손으로 삼아 왕위를 전해야 되는데 효종이 왕세자가 된 것이 아니냐는 말들이 터져나왔다. 사대부들은 크게 반발했다. 나라는 국왕과 사대부가 함께 통치해야 하는 것이지 국왕 마음대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대부들의 입장에서 볼 때 효종의 행위는 절대왕권을 행사하려는 위험한 행동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효종의 생각은 달랐다. 효종은 조선을 군주국가라고 생각했고, 군주국가에서 국왕은 나라의 주인이자 어른이며 사대부나 일반 백성은 모두 신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 두 생각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즉 이는 조선의 지배자가 국왕과 사대부냐 아니면 국왕뿐이냐 하는 본질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효종 재위 10년간 왕과 사대부 사이에서 벌어진 충돌의 근본원인이 되었다.

 

효종의 북벌론

 

 

효종은 북벌에 매달렸다. 북벌만이 자신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시켜 준다고 믿은 효종은 북벌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주자학이 아니라 군사력이라고 보았다. 이런 사고의 배경에는 8년간에 걸친 심양에서의 볼모 생활이 있었다. 효종은 소현세자를 적극 보호하고 청의 내부사정을 파악해서 본국에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는 가운데 소현세자와 함께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흥기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두 사람 모두 청이 승리한 이유가 학문이 아닌 군사력의 우위에 있음을 보았으나 청에 대한 입장은 달랐다. 

소현세자는 청이 대륙을 장악한 이상 분쟁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현실을 인정하고 청과 선린관계를 구축한 후 국가발전에 매진하는 거시 조선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처럼 어차피 사대의 예를 취할 바에야 그 대상이 명이면 어떻고 청이면 어떠냐고 생각했던 소현세자의 실리적 사고는 심양에서 주자학의 상대성을 알게 된 데서 비롯됐다. 소현세자는 지구 반대편에 주자학이 아니라 천주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신봉하는 또 다른 문명국가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들과 교류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봉림대군의 생각은 달랐다. 패전국의 왕자라는 이유로 청나라 관리들로부터 멸시받기도 했던 경험들은 봉림대군의 반청사상을 더욱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고, 이런 봉림대군에게 청은 선린관계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심양생활을 통해 현실적인 청의 모습을 이해하는 동안 봉림대군은 청의 약점을 알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봉림대군이라고 해서 앞뒤가 막힌 이상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소현세자처럼 주자학을 절대가치로 생각하지 않았고 천주교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주자학이나 천주교가 아니라 북벌이었다. 그 북벌을 위해서는 군사력을 갖추어야 했고, 군사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주권이 필요했다. 청나라 임금은 주자학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주자학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봉림대군은 바로 그것이 실질적인 군주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효종의 독살설   

 

 

그러나 북벌준비에 박차를 가하더 효종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문치((文治)의 나라 조선에서 효종이 무치((武治)를 하려 하자 당연히 사대부들은 반발하고 나섰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효종은 이조판서 송시열과 손을 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당황한 조정에서는 안절부절하지 못했고, 염습을 하는 동안 시신의 부패와 약물 부작용 등으로 시신이 갑자기 부풀어오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효종의 국장((國葬)을 주관하던 송시열, 송준길 등은 당황해하며 염의를 다시 마련하는 한편 새로 관곽을 짤 수 없자 기존의 관곽에 나무를 잘라 연결해서 새로 재궁을 마련했다.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당연히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효종의 증세가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는 점도 의혹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사안이었다. 머리에 난 종기의 독이 점점 퍼져 얼굴에까지 번졌는데, 어의들이 예사롭게 여길 정도로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종기를 진단한 어의의 처방은 산침((散鍼. 환부에 따라 침을 놓는 것)이었는데, 이를 통해 독기를 배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효종은 계속 산침을 맞았는데, 이 와중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문제의 어의 신가귀(申可貴)다. 당시 병으로 집에 있었던 신가귀는 효종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입궐을 청했고, 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농증을 이루려고 하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필를 뽑아낸 후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잇다고 말했다. 이때 다른 어의 유후성이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렸지만 효종이 침을 놓으라고 명했고, 신가귀가  침을 놓은 후 침구멍으로 피가 나오자 효종은 "가귀가 아니었다면 병이 위태로울 뻔했다"며 안도했다.

 

하지만 침구멍으로 피가 나온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피가 그치지 않고 계속 솟구친 것이다. <효종실록>에는 침이 혈락(血絡)을 범한 탓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문제는 침을 놓은 신가귀가 수전증 상태였다는 것이다. 신가귀가 일부러 효종의 혈락을 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전증의 어의가 옥체에 침을 놓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피가 그치지 않자 약방에서는 급히 청심환과 독삼탕(獨蔘湯)을 올렸고, 정신이 혼미해진 효종은 삼정승과 송시열, 송준길, 그리고 약방제조를 부르라고 했다. 하지만 이들이 달려갔을 때 효종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현재 남겨진 자료로 효종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다시 조사하기는 힘들지만 여러 의혹을 제기할 수는 있다. 정말 효종은 침이 혈락을 범해 사망한 것일까? 효종의 시신에 부기가 있었던 것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을까? 송시열의 말대로 시신에 부기가 있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일까? 또한 재궁이 시신보다 작은 것이 그저 '망극'이라는 한마디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일까? 왜 재궁이 시신보다 작았을까? 효종이 죽은 다음달에 의관 이기선이 갑자기 엄한 형벌을 받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기선이 효종의 몸에 부기가 있는데도 맥을 짚을 줄 모른다며 꽁무니를 뺀 데 대한 추궁이었다. 그러나 송시열 등이 "이기선은 정말 맥 짚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며 옹호하고 나섰고, 이 주청 덕분에 이기선은 살아남는다. 

 

조선 27명의 왕 중 독살설에 휘말리는 임금은 문종, 단종, 연산군, 선조, 효종, 경종, 정조, 고종, 순종 등 11명이나 된다. 세자 또한 소현세자, 사도세자, 효명세자 등이 독살설에 휘말려 있다. 가장 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가장 비참하게 생을 마쳐야 했던 불행한 운명이었다. 한편 효종이 사망할 당시 그보다 연하였던 계모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생존해 있었다. 이는 효종의 상복을 장남의 예로써 입느냐, 차남의 예로써 입느냐를 놓고 서인과 남인간에 예송논쟁(禮訟論爭)이 발생하는 단초가 된다.

 

이상, 화정 봉림대군 효종과 북벌론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