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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화정 허균 지배계급에 반기를 든 조선의 이단아

 

화정 허균 지배계급에 반기를 든 조선의 이단아

 

 

선조의 딸 정명공주(이연희)의 기구한 삶을 그린 [화정]에서는 뜻밖에도 교산 허균(안내상)이 병판 이이참(정웅인)을 만나러 온 장면이 흥미를 끌었습니다. 허균은 이이첨을 만나자마자 스스로를 꼴통, 잡놈이라고 칭하며 주위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는 호탕함을 보여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주게 될지 궁금증을 자아냈습니다. 

 

잘 알고 있듯이 허균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작가이자 조선시대의 유명한 여류문장가 허난설헌의 남동생입니다. 홍길동전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서자의 설움과 분노를 대변한 책이며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던 활빈당과 유토피아 율도국으로도 유명합니다. 

 

화정 허균 지배계급에 반기를 든 조선의 이단아

 

2년 전 초여름, 강릉의 허난설헌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허균의 집이 그곳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이어서 좀 놀랐었습니다. 홍길동전의 저자여서 막연히 허균도 서자 출신으로만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며 형제들이 모두 당대 높은 관직에 있었거나 뛰어난 문장가들로 널리 명성을 떨친 사람들이었지요.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허균의 모든 것이 전시돼 있는 전시관의 기록을 보니,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는 대가집 자제인 허균이 마을의 서자들이며 머슴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소외된 사회계층의 대변인을 자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허균의 아버지 허엽의 호가 초당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초당두부가 바로 그 호를 딴 것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당시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정작 허균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 좀더 알아봐야겠다 싶었었는데,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지난회 화정에 등장한 허균을 보고 새삼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방영한 [허균 능지처참당한 날]을 바탕으로 허균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당대 지배질서였던 성리학에 반기를 든 시대의 반항아로서의 남다른 행태가 돈키호테를 연상케 하는 허균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허균 능지처참당한 날

 


교산 허균은 광해군 10년(1618년) 능지처참을 당했다. 허균의 죄는 세상의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하게 굴어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명성이 높았던 허균의 사형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허균이 “할 말이 있다”고 외쳤지만 변론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으로 알려진 허균은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지만 사실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별로 언급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당시 정3품 동부승지(현 청와대 수석비서관), 정2품 형조판서(현 법무부장관)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도대체 어떤 죄를 지었기에 능지처참까지 당한 것일까?

 

 

허균이 처형된 그해 허균 관련 기록은 185건에 이른다. 허균 관련 문제로 조정이 들끓었다는 반증이다. 뿐만 아니라 허균이 죽은 후 3개월까지 허균을 따르는 자들 등 많은 사람들이 진상조사를 했던 엄청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음에도 판결문도 없고 피의자 신문조서 같은 것도 작성하지 않았으며,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심지어 광해군 일기에는 "허균은 천지간의 괴물이다. 그 몸뚱이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일생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다“라고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악평이 기록돼 있다고 한다.

 

조선은 왜 당대 최고의 지식인 허균을 비난했을까?

 

허균의 글재주와 천재성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그 뛰어난 문장은 임진왜란 때 외교의 힘을 발휘했으며 명나라 사신들도 허균의 천재성에 감탄할 정도였다. 더욱이 허씨 오문장가로 불릴 만큼 당대 최고의 가문을 이끌었던 아버지 허엽 또한 조선 3대 성리학자 화담 서경덕의 수제자로 선조 때 세력을 떨쳤던 동인의 영수였다.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대표적인 명문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 지배사회에서 불교를 신봉했던 허균은 부처를 섬겼다는 이유로 부임한 지 43일 만에 삼척부사에서 파직당한다. 그런데 파직당했다는 말을 듣고도 그는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쓰시게. 나는 스스로 나의 삶을 이루려네” 하며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당당함을 보였다. 게다가 불교만이 아니라 천주교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가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 무렵 명나라에는 천주교가 도입되던 시기였다. 새로운 학문과 사상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했던 그는 명나라의 화려한 물품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책만 구입했는데, 그가 사들인 책은 무려 4천여 권이나 됐다. 그 책 중에는 명나라 양명학자 이탁오의 책도 있었는데, 이탁오는 유교적 역사관을 비판하며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해 당대 이단으로 금기시되던 인물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불온서적을 구입한 셈이다.

 

1599년 31세에 지방관리의 부정을 감찰하는 황해도사로 부임한 허균은 부임 6개월 만에 첫 파직이 된다. 평소 알고 지내던 기생들을 한양에서 황해도까지 데려갔다는 이유에서였다. 세상은 그를 행실도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성리학적 질서가 지배하는 조선에서 허균의 자유분방함은 결코 용납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허균은 세간의 비난에 개의치 않았으며, 심지어는 어머니의 상중에도 기생들과 놀아서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또한 허균은 당대 엄친아라고 불릴 만큼 명문가 집안의 자제임에도 불구하고 서자들과 친하다는 이유로  8개월 만에 공주목사에서 파직당하는데, 총 20여 년의 관직생활 중 그가 파직을 당한 것은 모두 여섯 번이었다. 

 

적자였던 허균이 서자들과 유난히 친했던 이유는 서자 출신인 스승 손곡 이달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한다. 이달은 조선의 이태백으로 불린 조선 중기의 시인인데, 허균은 스승을 통해 적서차별 문제를 실감했으며 나아가 스승을 통해 조선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느꼈던 듯하다. 즉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사회적 모순이 분출됐던 당시였지만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나라와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허균의 초상화

 

 심리유형을 통해 본 인간 허균

 

정철상 부산외국어대학 교양학부 교수에 따르면 허균이 남긴 글과 기록을 추론해 볼 때 MBTI에서는 언변능숙형으로 나온다. 이 유형은 외향적이면서 낙천적 성격인데, 실제로 허균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쫓기면서도 경치를 즐기고 시를 평하는 여유를 즐겼다고 한다. 풍부한 직관적 감정형으로 추정되는 성격이 타고난 천재성과 결합되면서 문학, 예술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한 셈인데, 이 유형으로는 전 미대통령 로널드 레이건과 에이브러햄 링컨 등이 있다고 한다. 

 

 

허균은 스스로를 표현한 말인 불여세합(不與世合), 즉 "나는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다"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이 때문에 주변에 적을 많이 만드는 유형이었다. 한편 기생들과 놀며 기생들에게서 위안을 받은 허균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을 경우 나타나는 여성편력이 있는데, 여성편력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증상은 애정결핍증이다. 게다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가던 중 아내까지 잃은 후 가까이에 위로해 줄 사람도 없어 기생들에게 빠졌던 듯하다. 

 

 칠서의 난으로 허균에게 찾아온 위기

 

 

광해군 5년 봄 문경새재에서 은을 강탈하고 은상인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의 주모자는 여주 남한강변에서 스스로 강변칠우라고 부르던 일곱 명의 서자들로 모두 고관의 자제들이었지만 단지 서자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힌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거사 자금을 모으기 위해 사건을 벌였다고 자백한다. 이른바 칠서의 난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평소 서자들과 절친하게 지낸 허균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서얼금고법이란 1415년 태종이 양반의 자식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도록 제한한 법이다. 임진왜란 중 나라에 돈이 부족해지자 돈을 주고 벼슬을 사게 되면서 서얼들이 관직에 나아가는 통로가 조금 넓어지는 듯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서얼들은 분노했다. 더욱이 서자 출신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만큼 서얼들의 출세길이 더 열리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과 달리 오히려 더 강화되자 서자들의 실망은 더욱 컸다. 허균의 사상을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한 홍길동전은 칠서의 난이 발생한 무렵에 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칠서의 난의 무대도 문경새재이고 홍길동전 속 활빈당의 주요무대도 문경새재이기 때문이다.

 

 홍길동전과 허균의 개혁사상 

 

 

허균의 유재론(遺才論)은 모순된 제도에 의한 인간 차별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차별 없는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인데, “한 사람의 재주와 능력은 하늘에서 준 것이므로 귀한 집 자식이라 해서 재능을 더 많이 주고 천한 집 자식이라 해서 인색하게 주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서자라고 해서 능력이 있는데도 이를 수용하지 않는 서얼차별의 신분제를 비판한 것이다. 200년 후 다산 정약용이 계승한 이 핵심내용은 평등한 세상을 지향한 근대적 사상이다.

 


또한 허균의 개혁사상을 담은 호민론(豪民論)에는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백성뿐이다. 국왕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벡성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민본주의적 개혁사상이 담겨 있다.

 

호민론은 백성을 세 부류로 나눈다. 일상에 얽매여 순순히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항민(恒民)은 가렴주구에 가죽이 벗겨지고 뼛골이 부서지는데도 번 것을 다 갖다바친다. 이들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끝없는 요구에 괴로워하고 한숨쉬며 원망만 하는 원민(怨民)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백정이나 장사치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몰래 이심을 품고는 천하를 엿보아 시절이 어지러워지면 자신이 바란 것을 이루려는 호민(豪民)이야말로 크게 두려워할 만한 존재다. 호민이 나라의 분열을 엿보고 시절의 어지러움을 틈타 치고 일어나면 원민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여 모의하지 않고도 한목소리를 낸다. 그러면 항민도 살 구멍을 찾아 몽둥이와 낫을 들고 따라나서 무도한 임금을 죽이지 않을 수 없다. 이 호민을 형상화한 것이 바로 홍길동이다. 

 

 

위기에 처한 허균의 변신

 

그러나 칠서들과 친하게 지냈던 허균은 자신에게 미칠 정치적 탄압을 예감하고 글방동무인 대북파 실세 이이첨을 정치적 방패막이로 선택한다. 이이첨은 세자 책봉시 광해군을 지지하고 왕으로 옹립했으며 광해군 정권의 핵심인물이다. 허균은 칠서사건의 화를 피하기 위해 광해군의 최측근인 이이첨에게 의탁한 것이다. 당시 광해군의 최대 관심사는 인목대비 폐모였다. 폐모론 여론몰이가 필요했던 이이첨에게도 대찬 성격인데다 뛰어나 문장가였던 허균은 확실하게 이용할 만한 재목이었다.

 

폐모론 확산에 적극 개입하게 된 허균은 광해군으로부터 신임을 받는다. 하지만 성리학적 질서에서 폐모론은 반인륜적 처사였기에 서인 동인 할 것 없이 폐모론을 반대했고, 심지어 대북파에서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인 기자헌과 허균은 결국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허균이 폐모론을 내세우면서까지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한 까닭은 일단 살아남기 위한 위장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혹은 자신의 개혁사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데,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가 우선 권력을 쥐겠다는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역모의 주동자로 몰린 허균

 

 

계축옥사가 일어난 5년 후 남대문에 흉방이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흉방의 내용은 백성들으 구하고자 장차 하남장군이 나타날 것이니 거사에 참여하라는 글이었다. 남대문 흉방사건은 허균의 조카이자 심복이던 하인준의 소행으로 밝혀졌고, 허균의 주변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진상조사가 시작됐으며 허균이 역모를 꾀했다는 자백이 나온다.

 

 

역모의 주동자로 지목된 허균은 투옥되고 정세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급변한다. 허균은 끝까지 부인했지만 심복들에 의해 주동자로 지목되고, 심복 중 한 사람이 "허균이 애초에는 선조의 아들 중 하나인 의창대군을 추대하고자 했는데 나중에는 허균이 스스로 하고자 하여 결정하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자백을 하는 바람에 역모를 꾀한 것으로 몰렸다.

 

 

허균이 역모를 주동했다는 결정적인 증언은 기준격의 비밀상소를 통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기준격은 인목대비 폐모론 과정에서 허균과 대립했던 영의정 기자헌의 아들이다. 기준격의 상소내용은 "허균이 인목대비 아버지인 김제남을 이용해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다.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린 후 자신이 군권을 잡아 김제남을 제거하고 자신의 조카사위인 의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의혹에 싸인 허균의 죽음

 

 

심복들이 자백한 지 3일 만에 허균은 정확한 진상조사도 없이 전격적으로 처형당한다. 조선시대에는 사형은 초심, 재심, 삼심으로 반복해서 심리를 한 후 결정해야 한다는 형사절차상의 제도인 삼복계가 있었음에도 적법한 재판절차도 없이사형집행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때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고자 하려는 의지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폐모론의 공을 독차지하려는 이이첨의 계략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이첨은 폐모론의 패륜이라는 비난을 뒤집어쓸 것을 우려해서 허균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게다가 허균이 광해군의 신임을 받고 있는데다 허균의 딸이 세자의 후궁으로 간택될 가능성이 높았던 상황이었던지라 이이첨이 정치적 라이벌로 급부상하는 허균을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일 수도 있다. 그 근거로 이이첨은 옥사에 갇힌 허균을 찾아가 계속 걱정 말라며 안심을 시켰는데, 실제로는 바로 사형을 집행해서 허균에게 대책을 세울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광해군은 허균이 죽은 후 반교문을 내렸는데, "허균은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 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의 도리가 전혀 없었다. 죄인을 잡아서 동쪽의 저잣거리에서 베어 죽이고 다시 기쁨을 누리고자 대사령을 베푸노라"라는 끔찍한 내용이었다. 허균을 신임한 광해군이었지만 이이첨과 허균의 대립에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 결국은 이이첨의 손을 들어준 광해군의 권력의 비정함을 보여주는 반교문이다.  


조선시대 기피인물 1호 허균이 죽고 5년 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역모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은 대부분 복권되었지만 허균만은 복권이 되지 않고 조선왕조 내내 역적으로 남았다. 그 때문에 허균의 후손들은 300년이 넘도록 다른 왕조의 족보에 숨어 살아야만 했다. 정치가로서의 허균은 미숙하고 불완전했지만 사상가로서의 허균은 성리학 이외의 다양한 학문을 수용하는 개방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답답하고 폐쇄적인 조선사회에서 좀더 진취적이고 넓은 세상을 지향했던 허균의 선구적 사상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할 말이 있다“고 외친 허균, 그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이상, 화정 허균 지배계급에 반기를 든 조선의 이단아였습니다. 드라마 화정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