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날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애인의 날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4월 20일은 제35회 장애인의 날입니다. 장애인의 날을 맞아 각 도시에서는 갖가지 의미있는 행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1회성 행사로 치부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리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살다가 장애인의 날을 전후로 여러 행사를 벌이면서 호들갑을 떨다가 지나고 나면 새카맣게 잊는 것 아니냐는 거지요. 하긴 그러고 보면 어버이날도 그렇고, 어린이날도 그렇고, 또 장애인의 날도 그렇고, 꼭 무슨무슨 날이라는 이름을 붙여 기념을 해야만 하는 것 자체가 좀 그렇긴 합니다. 물론 본뜻은 이 날만이라도 더 각별한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보자는 의미이겠지만요. 

 

장애인의 날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필리핀의 어떤 부족은 싫어하다, 미워하다, 전쟁이라는 말이 아예 없다고 합니다. 어떤 인디안 부족은 거짓말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런 사고방식이나 행동도 없습니다. 아니, 그런 사고방식이나 행동이 없기에 그런 단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옳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에게도 장애인이라는 말 자체가 아예 없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굳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가르지 않는다면 장애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요.

 

조선시대에는 고대 그리스나 중세유럽에서와 달리 장애를 질병의 하나로 여기고 장애인의 복지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고 합니다.  EBS 역사채널e에서는 장애인의 날을 맞아 우리 사회 속 장애인들이 여전히 편견과 오해에 갇혀 있는 가운데 역사 속 장애인들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 내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장애아를 양육하지 못하도록 법을 제정하라”고 했고 플라톤은 “장애아는 사회에서 격리시키라”고 했습니다. 또 중세유럽에서는 장애인은 신에게 벌을 받은 사람이라 하여 장애인에게 고문과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서양에서 자행되었던 장애인의 잔혹한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역사 속 장애인들은 과연 어떻게 살았을지 궁금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장애를 질병 중의 하나로 여겨 독질인(篤疾人)은 매우 위독한 병에 걸린 사람을 말하고 잔질인(殘疾人)은 몸에 질병이 남아 있는 사람, 그리고 폐질인(廢疾人)은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조선의 왕들은 장애인의 복지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는데, 세종은 “부모가 나이 70세 이상이 된 사람과 독질(篤疾)이 있는 사람은 나이가 70세가 차지 않았더라도 시정(侍丁) 한 사람을 주고 장애인과 그 부양자에게는 각종 부역과 잡역을 면제, 즉 오늘날의 병역을 면제해 주었다. 시정이란 조선시대에 나이가 많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군역에서 면제된 사람을 말합니다.

 

 

또 장애인을 정성껏 보살핀 가족에게는 표창제도를 실시한 반면 학대하는 자에게는 가중처벌을 내리는 엄벌제도를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이 무고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고을의 읍호(邑號)를 한 단계 강등시켰습니다. 장애인을 천시했던 서양과 달리 조선은 선진적인 복지정책을 펼쳤던 것입니다.

 

 

세종은 흉년이나 기근이 들 때면 장애인 구휼에 가장 먼저 나섰는데, 1418년(세종대왕 즉위년) 11월 3일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들(장애인)에게 환곡을 우선 베풀고 거처할' 집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종 때에는 시각장애인들을 고용하는 특수관청을 설치했습니다. 국가 주도로 설립된 명통시(明通시)는 최초의 장애인협회인데, 이곳에 소속된 시각장애인들은 임금의 행차 때 경을 읽고 흉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는 등 나라의 길흉을 담당하는 직원으로서 녹봉을 지급받았으며 때로는 노비나 건물도 하사받는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세조 때에는 장애인 활동보조 도우미를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농아와 지체장애인들을 책임지고 돌봐줄 도우미(保授)를 널리 찾으라. 동서 활인원이 맡아 장애인을 후하게 구휼하며 분기마다 결과를 상세하게 보고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아무리 높은 재상이라 할지라도 맹인을 만나면 ‘너’라는 천한 말로 대하지 않고 중인(中人) 정도로 대한다고 씌어 있습니다.

 

 

선대왕의 묘를 참배하기 위해 궁을 나선 임금의 행차길에서는 문무백관과 호위무사가 줄지어선 가운데 점잖게 도포를 차려입은 한무리의 관원들이 임금을 환송하는 경을 읊었는데, 이들이 모두 맹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관현(관악기와 현악기)을 다루는 시각장애인 중 천인(賤人)인 자는 재주를 시험하여 잡직에 사용하는 등 장애인의 자립을 중요하게 여겼고 신분에 상관 없이 능력 위주로 장애인을 채용했으며, 점복사, 독경사, 악공 등 장애인을 위한 전문직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장애인에 대해 편견과 차별이 없는 사회였던 조선. 관직등용에 있어서도 편견 없이 능력만을 인정하는 이러한 열린 시각은 차별 없는 인재 선발로 이어져 후세에 남을 걸출한 인물을 배출해 냈습니다. 그 결과 간질장애인인 권균은 중종 때 우의정을 지냈고 지체장애인인 심희수는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내는 등 역사를 빛낸 장애인들이 많습니다.

 

 

조선 초 국가의 기틀을 잡은 청백리 명재상 허조는 중증 척추장애인이었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태종의 신임을 받았고, 그를 신뢰한 태종은 세종에게도 허조를 중용할 것을 적극 추천했다고 합니다. 

 

 

또 정부의 주요 요직을 두루 맡은 우의정 윤지완은 한쪽 다리가 없어 일각(一脚)정승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임금 앞에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 것을 불충이라며 사직을 청했지만 숙종은 수"걸을 수가 없다면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들어오라"며 윤지완의 사직서를 번번이 물리치고 그를 곁에 두고 조언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영조는 8세 때 열병의 후유증으로 청각장애를 앓고 귀가 들리지 않았던 도승지 이덕수를 외교특사로 임명했습니다. "중국어는 외국어이니 말을 할 수 있는 자나 없는 자 모두 같은 조건이 아니냐"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박연은 “옛날의 제왕들은 모두 시각장애인에게 현송(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음)의 임무를 맡겼으니 이는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조선의 장애인들은 생김새가 다르다고 하여 차별받기보다 ‘장애를 뛰어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이상, 조선시대의 장애인 복지정책을 살펴본 장애인의 날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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