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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소 권력 없는 유생들이 힘을 모아 외친 서명운동

 

만인소 권력 없는 유생들이 힘을 모아 외친 서명운동

 

만인소 권력 없는 유생들이 힘을 모아 외친 서명운동

 

만인소를 아시나요? 만인소란 조선시대에 만여 명의 선비들이 서명을 해서 올린 상소를 말합니다. 만인소는 1792년(정조 16년) 이우(李堣)를 중심으로 한 영남 유생들이 사도세자의 신원(伸冤)을 상소한 것이 처음이었으며 그 후 총 6차례 더 씌어졌다고 합니다. 그 중 현존하는 만인소는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와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 두 가지입니다. EBS 역사채널e에서 방영한 만 명의 외침 만인소를 바탕으로 권력 없는 유생들이 힘을 모아 외친 오늘날의 서명운동인 만인소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만인소 권력 없는 유생들이 힘을 모아 외친 서명운동

 

백인소(白人疏)는 1565년(명종 20년) 백 명여 명의 유생들이 모여 22차례에 걸쳐 올린 상소를 말한다.

 


천인소(天人疏)는 1666년(현종 7년) 천여 명의 유생들이 집단으로 올린 상소를 말한다.

 

 

상소는 관직을 갖지 못한 선비들이 정치에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이자 수단이었다. 

 

 

그런데 1792년 무려 10,057명의 유생들이 올린 상소가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만 명이 넘는 영남 유생들의 이름으로 올려진 만인소(萬人疏)다. 조선왕조는 조정의 시책이 잘못되면 유생들이 개별적 또는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의견과 주장을 내세울 수 있었다. 유생들의 집단 상소는 16세기 전반까지는 성균관, 4학유생(四學儒生)들이 주도했는데, 16세기 중반 이후 지방 사족(士族)들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유생 집단이 형성된 후부터는 지방 유생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지방 유생들의 집단 상소는 처음에는 수백 명이 서명하는 정도였으나 후대로 가면서 1000명대를 웃도는 규모로 점점 더 커져갔으며, 18세기 말 이후에는 1만여 명의 유생들이 서명한 대규모 집단 상소도 나왔다. 

 


1792년 노론 관료 유성한은 임금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상소를 올린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유성한은 “국왕은 경연을 게을리한다. 연주와 가무를 하는 여자를 궁에 난입시켰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 상소를 들은 영남 유생들은 이것은 사실이 아닌 모함이며 임금을 모독하는 능멸이라고 크게 분노했다. 그리하여 영남지방 30여 개 가문이 모인 회의를 소집해 거짓상소에 대항할 방편을 마련한다.

 

 

안동에서 한양까지 올라가는 데 걸린 기간 단 4일, 상경에 동참한 유생은 200여 명이었다.

  

 

만인소의 전말을 적은 일기 천휘록(闡揮錄)에 따르면, 영남 선비들의 운명을 바꾼 1792년 윤달 4월 23일, 참여 명단을 받아보니 만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성균관 인근 동네에 자리를 잡고 곧장 만인소 제작에 돌입한다.

 

영남 만인소의 상소 내용 중 첫째는 임금을 능멸한 노론 관료 유성한을 처벌하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사도세자 복권과 사도세자 죽음에 일조한 관련자들을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즉 유생들은 노론이 감추고자 했던 절대적 금기사항을 만인소의 핵심으로 작성했던 것이다. 이것은 집권세력 노론에 도전하는 권력 없는 지방 선비들의 정면승부였다.

 
하지만 만인소를 작성한 그들 앞에 커다란 장벽이 놓여 있었다. 천휘록에 따르면, 장의(掌議) 이동수는 자기 임무가 아니라고 핑계를 댔지만, 그들의 마음은 오로지 상소를 막는 데 있었다. 당시 성균관에는 동재와 서재가 있었는데, 이곳에 거처하는 유생들의 자치기관인 재회(齋會)를 설치하고 장의를 각 1명씩 두었다. 이들은 재회를 소집할 수 있는 등 매우 큰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상소가 왕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성균관 장의의 승인절차가 필요했지만, 성균관은 노론 세력이 장악하고 있어서 만인소가 쉽사리 정조에게 전달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유생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궐내에 있는 안동 출신 관료를 섭외해 만인소의 존재를 정조에게 알린다.

 

 

정조는 만인소와 함께 먼길을 올라온 유생들을 친히 접견했고, 소장을 반도 읽지 못해서 해가 저물었다. 촛불 여덟 자루를 밝히면서 밤늦도록 이어진 접견 이후 상소 승인을 거부했던 성균관 장의를 비롯해 담당자들은 파직되었다. 하지만 노론 유성한의 처벌과 사도세자의 복권은 차마 이룰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때 영남 유생들이 전한 노론 관료 유성한 처벌과 사도세자 복권 및 사도세자 죽음에 일조한 관련자 처벌을 원하는 만인소는 지방 유생들의 상소가 성균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임금에게 전달되는 발판이 되었고 그 후 만인소는 6차례 더 작성된다.

 

순조 23년 서얼(庶孼) 차별 철폐 만인소(9,996명)
*철종 6년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10,094명)

고종 8년 서원 철폐 반대 만인소(10,027명)

고종 12년 대원군 봉환 만인소(불명)-지위에서 물러난 대원군의 복귀 요구

고종 18년 척사 만인소(불명)-개항 이후 정부의 개화정책 반대

*고종 21년 복제 개혁 반대 만인소(8,849명)-옷차림 변화에 대한 규정 반대

 

*현존하는 만인소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반 선비들의 외침인 만인소는 집권세력의 일방적인 정치를 견제하고 공론(公論)을 전달하기 위해 권력 없는 유생들이 힘을 모아 외친 오늘날 서명운동의 발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 만인소 권력 없는 유생들의 힘을 모아 외친 서명운동이었습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