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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

국제시장 윤덕수 할아버지(황정민)를 통해 본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국제시장 윤덕수 할아버지(황정민)를 통해 본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국제시장 윤덕수 할아버지(황정민)를 통해 본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국제시장은 부산 국제시장에서 수입품 잡화를 팔고 있는 꽃분이네 가게 윤덕수(황정민) 할아버지의 개인사를 통해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헤쳐나온 격변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고 있다. 국제시장은 본디 해방 이후 귀환동포들이 차린 노점들이 모이면서 이루어진 시장으로, 6·25전쟁 후 전국 각지의 피난민이 모여들고 미국의 구호품과 군용품이 유통되면서 광복동, 남포동의 도심상가와 더불어 부산의 상업기능의 중추 역할을 한 곳이라고 한다.

 

몇 년 전 해운대로 흥행에 성공한 윤제균 감독은 영화 국제시장을 만들면서 주요 배경이 되는 장소로 이곳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우리 부모님 세대에 대한 헌사에 알맞은 공간을 고민하다가 과거 피난민들의 삶의 터전이자 지금까지 서민들이 서로 부대끼고 살아가면서 일상의 소박한 꿈과 희망이 움트는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장 평범한 아버지의 삶을 통해 가장 위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기에 눈부신 발전과 함께 빠르게 발전하는 요즘 조금은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변해가는 ‘시장’을 배경으로 그려냈다는 것이다. 

 

국제시장 윤덕수 할아버지(황정민)를 통해 본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어린 덕수를 굳게 껴안아주는 덕수 아버지

 

또 제작진에 따르면, 현대사에 기록된 굵직한 사건들을 관통하는 서사 드라마를 재현해 내기 위해 각종 인터뷰 자료와 역사 다큐멘터리 등을 연구하고 검토해서 가장 실제에 가깝게 담아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부산과 서울은 물론 태국, 체코 등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했고, 스웨덴의 특수분장팀을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 등 4개의 VFX팀이 투입되는 등 기술적으로도 새로운 시도가 행해진 듯하다. 

 

영화를 보면서 노인이 된 윤덕수 할아버지와 영자 할머니(김윤진)의 모습이 그럴싸해서 분장을 하는 데 꽤 세심하게 신경썼구나 싶었는데, 스웨덴의 특수분장팀 덕분이었던 모양이다. 그 외에 달구(오달수), 덕수 아버(정진영), 덕수 어머니(장영남), 덕수 고모(라미란) 등 탄탄한 연기내공과 개성을 갖춘 명품배우들의 진정성 있는 열연으로 영화는 멋진 앙상블을 선보인다. 게다가 여기에 정주영, 앙드레김, 남진, 이만기 등 실존인물들을 연상케 하는 까메오까지 등장시켜 깨알같은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려는 덕수네 가족

 

윤제균 감독은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탓에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됐을 법한 영화에 갖가지 소재로 잘 엮어넣어서 너무나도 뻔하디뻔한 스토리를 감동과 웃음, 사랑과 비애, 가족사랑이 듬뿍 담긴 훈훈한 이야기로 잘도 포장해 놓았다. 그 때문에 영화는 흥행의 성공요소를 해치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런닝타임 126분 동안 대부분의 관객들은 감독이 여기서는 눈물을 흘려야 해, 하면 눈물을 찔끔 흘리고, 너무 심각해지면 곤란하니 이젠 웃어, 하면 웃음을 터뜨리고, 로맨스도 필요할 것 같은데? 싶으면 애틋한 사랑 이야기도 펼치면서 몰입과 감동의 시간을 선사한다.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보자.

 

국제시장에서 구두닦이를 하는 덕수와 달구 

 

10살 남짓에 전쟁으로 아버지와 헤어져 졸지에 어머니와 두 동생을 거느린 가장이 되어버린 덕수는 피난통에 자신이 챙기기로 한 동생까지 잃은 마음의 책임까지 떠맡은 채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하고 오직 오직 가족을 위해그야말로 온몸이 부서지도록 험한 세월을 살아낸다.

 

독일 탄광에서 일하는 덕수와 달구

 

1960년대에는 동생의 학비며 궁핍한 생계를 꾸리기 위해 서독으로 광부일을 하러 가고, 1970년대에는 총알이 빗발치는 월남으로 목숨을 담보로 하고 돈을 벌러 가야 했던 아버지들, 또 한국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가족들은 1980년대에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 만나도 울고, 못 만나도 울음을 터뜨리며 슬픔을 토해낸다. 특히 덕수가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는 장면에서는 눈물을 참기가 어려웠다.

 

헐벗은 자기 삶의 터전이 되어주었던 고모의 꽃분이네 가게, 그리고 아버지가 헤어지면서 거기서 만나자고 했던 그 가게를 떠나지 못하는 마음을 아버지가 마련해 준 풍요한 삶을 걱정 없이 누리고 있는 자식들은 전혀 알 길이 없다. 덕수는 아버지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만하면 저 잘 살았지요?"라고 묻고, "그런데 저 진짜 힘들었거든예"하며 오열을 한다.

 

베트남 정글에서 몸을 숨기는 덕수와 달구

 

영화는 엎드려 오열하는 덕수 할아버지와 그 옆 거실에서 즐겁게 웃고 떠드는 가족들을 동시에 보여주다가 롱샷으로 높은 빌딩들이 즐비한 눈부신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 아버지들이 죽을 고생을 해서 이뤄놓은 풍요로움이다. 오늘날의 이 풍요는 많은 덕수 할아버지들 덕분이라는 메시지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전쟁 후 그야말로 완전한 폐허에서 덕수 할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온 많은 아버지, 할아버지들의 피땀이 만들어낸 나라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들은 "내는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기 참 다행이라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들에게 지금의 젊은세대들은 감사의 마음을 갖기는커녕 아버지라면 응당 해야 할 일 아니냐며 뒷방 노인네 취급을 할 뿐이다.

 

이산가족 찾기 방송 프로그램에 나온 덕수

 

하지만 한편으로는 윤덕수 할아버지 같은 삶 정도만 살아왔어도 잘산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탄광 속에서 소리도 없이 죽어갔을 사람들, 월남전에서 목숨을 잃었거나 불구가 되어 그 후의 삶을 제대로 꾸려나가기 힘겨웠을 사람들, 그리하여 덕수 할아버지만큼만큼이라도 살고 싶었을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덕수 할아버지의 모습에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 이야기는 덕수 할아버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온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덕수 할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곧 대한민국의 파란만장한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왜 우리가 6.25라는 동족상잔의 불행한 전쟁을 겪어야 했는지, 그리고 왜 남의 나라로 광부로 간호사로 돈을 벌러 가야만 했는지, 또 왜 목숨을 걸고 월남의 전쟁터로 떠나야 했는지에 대한 문제를 성찰하게 해주는 부분이 부족해서 많이 아쉬웠다. 이 모든 시련을 그저 순종적으로 받아들였던 초긍정 덕수 할아버지의 삶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감독이 바라는 지난 세대에 대한 헌사 혹은 지내세대와 현세대의 소통을 이루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다. 물론 대중들이 보는 가족영화에 반드시 그런 것을 담아내야 한다는 원칙은 없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뭔가 단단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그냥 슬쩍슬쩍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아서 갑갑하고 답답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비빔밥이 아무거나 막 넣고 비벼도 비빔밥이긴 하지만, 정말 맛있는 비빔밥 만들기는 그리 쉽지 않다. 먼저 밥알이 고슬고슬해야 하고, 들어가는 재료도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게 적당해야 한다. 무조건 많이만 넣는다고 맛이 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고추장 역시 너무 많이 넣어서 시뻘개지거나 부족해서 희끄무레하면 맛있어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참기름 또한 자칫 너무 많이 넣으면 느끼해지니 한두 방울로 딱 맞춰야 한다. 그리고 빛깔 고운 고명도 빠지면 안 된다. 이렇게 잘 비비면 명품 비빔밥이 탄생한다. 하지만 이 훌륭한 비빔밥에도 만드는 사람의  진정한 마음이 빠지면 포장만 근사한 선물이 되게 마련이다. 

 

내게 국제시장은 딱 그런 영화였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겪어온 파란만장한 역사가 담긴 다큐멘터리라는 밥에 그간 국가적 혹은 개인적으로 겪었던 굵직굵직한 사건들, 즉 비빔밥 재료들을 아주 잘 버무려 넣어 보기에도 좋고 맛도 일품인 비빔밥을 차려냈지만, 정작 중요한 역사적 인식에 대한 성찰을 하게 만드는 요소가 빠진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마치 최대한 잘 차려입고 상견례에 나온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지나친 세련미가 오히려 좀 거북스러웠고, 감동과 웃음, 눈물을 흘리는 순간까지도 치밀하게 계산해서 만들어진 장면들에 순간순간 몰입은 되었어도 영화관을 나선 후에는 다시 곱씹어보고 싶은 매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는 말도 있듯이, 아무리 근사한 뚝배기도 중요하다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든 장맛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와서 흥남 철수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서 한국사 전문가인 설민석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 다음은 그 강의에 나온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교과서적인 지식은 알고 있었지만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았다.

 

1950년 9월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은 기적의 대승리를 거둔다. 덕분에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8일 다시 서울을 수복하고 그 후 계속 밀고 올라가 10월 1일 38도선을 통과했다.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이 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10월 19일 평양을 차지하고 계속 밀고 올라가 압록강 두만강까지 치고 올라갔다. 완전히 우리가 통일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이었다. 중국 공산당, 즉 중공군의 인해전술엔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중공군 숫자가 얼마나 많았느냐 하면, 모기 숫자보다 군인 수가 더 많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군인 수가 너무 많으니 3명 중 1명에게만 소총을 주고 나머지 두 명에게는 피리와 꽹과리를 주었다고 한다. 

 

 

중공군은 낮에는 땅굴을 파고 그 속에 숨어 있었다. 그때 중공군이 판 땅굴이 6,700킬로미터에 달하는 만리장성과 말이 나올 만큼 땅굴을 많이 팠다. 그리고 밤이 되면 피리를 불면서 전진했는데, 당시 유엔군은 영하 30도에 달하는 개마고원의 추위와 밤마다 30만명이 불어대는 피리 소리에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다. 우리는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적의 포탄이나 파편에 맞아 죽은 병사보다는 추위에 온몸이 동상으로 썩어서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 결국 우리는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빼앗기게 된다.


그때 중공군한테 퇴로를 차단당한 미군 10군단은 흥남부두에 고립돼 있었다. 미군은 군수물자 35만톤을 싣고 탈출하려는 큰 작전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흥남철수였다. 그런데 이때 미군들 앞에 놀라운 일이 펼쳐진다. 피난민 10만명이 몰려든 것이다. 그들은 "우리도 데려가달라. 우리는 끝까지 UN군한테 협조했던 사람들이어서 만약 북한군이 우리 마을을 점령하게 되면 모두 학살당할 게 분명하니 제발 우리를 데려가달라"고 호소한다.

 

 

미군은 고민에 빠졌다. 이때 민간인을 실은 마지막 배가 메러디스 빅토리호였다. 탑승정원이 60명밖에 안 되는 화물선이었는데, 승선인원 중 선원이 47명이었다, 그러니 더 탈 수 있는 인원은 13명밖에 안 된다. 그때 미 10군단장의 고문이었던 현봉학 박사가 “장군님, 선장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저 사람들 여기 두고 가면 다 죽습니다"라고 눈물로 호소하고, 장군은 배에 있는 25만 톤의 군수품을 버리고 그보다 몇천 배 더 중요한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승선인원이 60명인 배에 14,000명이 오른다. 그리고 부두와 공장들은 북한군의 손에 들어가면 안 되니 폭발해 버린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이틀간 항해하여 부산을 거쳐 거제로 오게 된다. 그런데 이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는 비좁은 배 안에서 새 생명이 다섯 명이나 태어난다. 미군은 이 아기들의 이름을 김치1, 김치 2, 김치 3, 김치 4, 김치  5라고 붙이고 아이들 다섯 명을 김치 파이브라고 불렀다. 배는 크리스마스 무렵 거제도에 도착했는데, 놀랍게도 14,000명 중 사망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오히려 인원이 다섯 명 늘어나 있었다. 그 후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단일 선박으로는 가장 큰 규모의 구조작전을 성공시킨 선박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다.

 

 

1.4후퇴로 태안반도 근처까지 밀렸던 우리 국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서 밀고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38도 근처에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1951년 3월부터 6월까지 3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중국은 소련이 전쟁에 참여하길 바란다. 당시 소련군은 두만강 근처에서 공중지원 정도를 해주고 있었는데, 만일 전쟁에 참여하면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중재에 나선다. 즉 소련이 휴전을 제의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1951년 6월이었다. 이때 휴전을 했으면 피해가 덜했을 텐데, 휴전을 제의하고도 2년 동안 전쟁이 계속된다. 휴전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지, 포로송환은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등의 문제로 양측에서 합의를 보지 못한 것이다. 이 사이에 애꿎은 우리 군인들만 끊임없이 죽어나가고, 2년 뒤인 1953년 7월 27일에야 휴전이 이루어진다.

 

 

전쟁의 피해는 심각했다. 양측 군인들의 사망자는 160만명, 민간인 사망자는 대한민국 집계로만 99만명, 전쟁고아 10만명, 그리고 수백만의 이산가족이 생겨난 것이다. 경제규모는 120개국 중 119위로 꼴찌에서 두번째였다. 1950~60년대에는 우리와 전쟁을 했던 북한보다도 못살았다. 완전한 폐허로, 아무것도 없었다. 국제시장은 그 후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겪은 눈물겨운 이야기다. 

 

국제시장 윤덕수 할아버지(황정민)를 통해 본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