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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폼페이 최후의 날 인간화석으로 남은 사람들

 

폼페이 최후의 날 인간화석으로 남은 사람들

 

폼페이 최후의 날 인간화석으로 남은 사람들 

 

폼페이, 아름다운 예술과 풍요로 가득했던 고대 로마제국의 도시, 그러나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화산 폭발로 한순간에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비극의 도시 폼페이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로마제국의 도시문화와 폼페이] 기획특별전이 오늘(12월 9일)부터 2015년 4월 5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순간 느닷없이 죽음을 맞은 순간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캐스트(웅크린 남자, 엎드려 죽은 여인 등 화산재 속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 당시 모습을 재현한 석고상)와 조각품, 벽화, 장신구 등 3백여 점을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회입니다.  

 

조만간 저도 가보려고 하지만, 그전에 EBS [다큐 오늘]에서 방영한 폼페이 관련 글을 올리면서 로마여행 때 찍었던 폼페이 사진도 몇 장 함께 올립니다. 이미 가보신 분들도 많고 또 폼페이에 대해서는 책으로나 영화로 자주 접해서 잘 알고 계신 분들도 많겠지만, 다시 한 번 폼페이에 대재앙이 덮쳤던 최후의 그 날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포스팅해 보았습니다. 

 

폼페이 최후의 날 폭풍처럼 도시를 삼킨 베수비오 산의 화산 산폭발 

 

폼페이는 남이탈리아의 캄파니아 지방 나폴리에서 남동쪽으로 약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고대도시 유적이다. 베수비오 산의 분화에 의해 형성된 화산대지의 남단에 있으며 사르노 강 하구에 가깝다.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강렬한 폭발에 의해 헤르쿨라네움, 스타비아이와 함께 매몰되었다. 이 고대도시의 유적들은 그리스/로마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독특한 자료가 되고 있다.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산이 폭발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화산 폭발이었다. 순식간에 수백만 톤의 화산 폭발 잔해물이 도시 위로 쏟아졌고, 사람도 도시도 다 한순간에 잿더미에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오랜 세월 후 지하 4미터 화산재 아래 봉인돼 있던 폼페이는 우물을 파던 한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1861년 폼페이 발굴현장에서 이탈리아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 교수는 도무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고 있었다. 화산재에 뒤덮인 폼페이에서는 건물, 도로, 심지어 작은 그릇까지 잘 보조되어 있는 반면 몇 구의 화석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의 흔적이 젼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발굴한 어느 집에서는 식사 중에 봉변을 당한 듯 음식을 담았던 그릇이 식탁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주변에도 사체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폼페이 최후의 날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초기 발굴은 대체로 무책임하게 이루어졌다, 발굴자들이 주로 보물을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60년 이런 발굴방식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그리고 지하에서 지상으로의 폼페이의 봉인이 풀리자 옛 로마제국의 도시문명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그런데 발굴이 본 궤도에 올랐을 때 폼페이 발굴 최대의 미스터리에 한 줄기 빛이 보였다. 피오렐리 교수는 용암과 화산재가 식어서 굳어진 발굴현장의 흙더미 속에서 이상한 형태의 빈 공간들을 발견했다.

 

 

이러한 빈 공간은 건물마다 많았다. 피오렐리 교수는 이 의문의 공간에 주목해 석고를 부어보았다.그리고 석고가 굳은 다음 주변의 흙을 긁어내자 빈 공간을 채우고 있던 놀라운 형체가 드러났다.

 

 

순간 발굴단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것은 폼페이 최후의 날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폼페이 고고학 관리국 안토니오 바로네 박사는 화산폭발 때 생성되는 화산재가 희생자들의 피부를 완전히 덮었으며, 오랜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화산재가 굳어져 고유의 형태를 갖게 만들면서 동시에 굳은 화산재 내부의 육체는 썩게 되어 공간이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폼페이 사람들의 주검은 화산재에 묻힌 채 오랜 세월에 걸쳐 굳어졌다.

 

 

그리고 굳어진 잿더미 속에는 시신이 썩으면서 빈 공간이 생겼다. 

 

 

바로 그 빈 공간에 피오렐리 교수가 석고반죽을 채워넣자 폼페이 사람들의 최후의 순간이 되살아난 것이다.

 

 

어떤 가족은 방안에 피신해 있다가 질식사로 죽었다. 어머니는 죽음이 엄습하는 순간에 어린 아이를 꼭 껴안고 있었다.

 

 

골목길에서 엎드린 모습으로 발견된 이 남자는 의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황급히 수술도구를 챙겨나오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죽어가면서도 서로를 지켜주려 했던 폼페이 연인의 모습이다. 2천 년 전 그들의 이 순간은 한 찰나에 영원의 시간으로 멈춰섰다.

 

 

사람들의 최후의 흔적으로 폼페이 최후의 그 날을 상상해 보았다. 외과의사는 응급환자를 향해 서둘러 가고 있었고, 아이는 엄마와 사랑스러운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연인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잠시 후 자신들에게 어떤 운명이 다가오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79년 8월 24일 오후 1시경 굉음과 함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다.

 

 

놀라긴 했지만 폼페이 사람들은 화산 폭발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대재앙의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수백만 톤의 화산재와 부식물들이 쏟아져내렸다. 불길하게 바람은 남동쪽으로 불었다. 폼페이가 있는 방향이었다.

 

 

첫 폭발이 일어나고 잠시 후 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 어마어마한 폭발은 베수비오 산의 봉우리를 완전히 날려버렸고 거대한 불길이 상공으로 솟구쳐오르며 화산암을 뿜어냈다.

 

 

너도 나도 우왕좌왕하며 살 길을 찾아 헤맸지만 안전한 곳은 없었다. 세상을 뒤덮은 열구름과 고온가스 때문에 숨쉬는 것이 점점 고통스러워졌다. 집으로 돌아가던 임산부도 다친 사람을 돌보던 외과의사도 곧 숨을 거두었고, 어떤 가족은 방안에 피신해 있다가 질식사로 죽었다. 함께 도망쳤던 폼페이의 연인도 재앙을 피할 수는 없었다.

 

 

폭풍처럼 도시를 삼킨 것은 화쇄난류였다. 엄청나게 뜨거운 물질로 이루어진 화쇄난류는 시속 160킬로미터로 산중턱을 타고 내려오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는 허리케인과 같은 속도였다.

 

 

비극은 이튿날인 8월 25일 아침에야 끝났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폼페이는 4미터 높이로 쌓인 화산재에 묻혀버렸다. 사람도 도시도 완전히 사라졌다가 최후의 순간을 맞았던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폼페이는 지금도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아직까지 폼페이의 2분의 1 가량이 화산재 속에 묻혀 있습니다. 폼페이 고고문화유산관리국장 마시모 오산나는 인터뷰에서 나머지 2분의 1은 후세를 위해 남겨놓을 거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다음은 폼페이에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사진이 여러 장 더 있는데, 북적이는 사람들 때문에 정작 봐야 할 유적은 가려져버린 사진들이 많네요. 그 중에서 비교적 유적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사진들만 골라낸 것입니다. 

 

 

 

귀족들을 위한 휴양지였던 곳입니다. 그 먼 과거에도 로마의 귀족들은 이런 환상적인 휴양지에서 향락적인 삶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허구헌날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것도 모자라, 산해진미가 가득한 대형 식탁 옆에는 배를 두드리며 마냥 먹고 토할 수 있는 용기까지 마련해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향락의 기쁨은 3만 가까운 인구들이 사는 한 도시를 완전히 삼켜버리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옛터를 푸르게 덮은 풀들이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왠지 제겐 처연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폼페이의 인간화석들을 모아둔 장소입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저마다 화쇄난류에 삼켜져 버린 당시의 모습대로 화석화된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니, 결국은 누구나 다 언젠가는 버리고 갈 목숨이지만 선택할 수만 있다면 좀더 평온한 죽음을 맞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차가 달리던 길입니다. 그리고 양옆으로는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입니다. 저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 폼페이 사람들이 되살아나와 뭔가 끝도 없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습니다. 

 

 

폼페이 원형극장입니다. 자료에는 수용인원이 약 8천 명이라고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2만여 명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당시 폼페이 인구가 3만 명이 조금 안 되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시민들이 모두 저곳에 앉을 수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큰소리칠 만도 했겠다 싶습니다. 

 

폼페이 최후의 날 인간화석으로 남은 사람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