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로 보는 세상

<무정도시> 그 도시엔 의리를 지키는 자와 의리를 저버리는 자가 있었다!

 

"우리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위대한 인물들의 부도덕함이 아니라
인간이 자주 부도덕함을 통해
거대한 존재로 부상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역사철학자 토크빌이 한 말이다.
전 유럽과 독일에서 추리문학소설가로 널리 알려진 스웨덴 출신의

헤닝 만켈 시리즈 중 하나인 <미소지은 남자>를 펼치면 맨 먼저 보이는 글귀다.
매번 읽을 때마다 처음 이 글귀를 접했을 때의 충격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 같다.

마치 자타공인의 위대한 인물들이 저지르는 부도덕함은

평소에도 눈에 보이고 뒤로 들으니 뭔가 또 큰일을 터뜨려도

“어떻게 그런 일을?” 하고 놀라는 척하면서 그렇지 뭐, 하고 지나가지만,

대외적으로 모든 면에서 신망을 받고 있던 재벌급 인사가 사실은 뒤에서

은밀하게 비열하고 비인간적인 행위로 황금의 제국을 구축해 오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받는 충격이 아마 이런 느낌일 듯하다.

 

<미소지은 남자>는 누구인가?
알프레드 하더베리. 그는 구릿빛으로 보기 좋게 그을린 얼굴에 언제나 은은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으며, 기품과 품위가 느껴지는 옷차림을 한 50대 남자다.
스웨덴이 지금과 같은 복지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더베리 덕분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스웨덴 재계를 대표하는 거부(巨富)이자 막강한 권력을 소유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 미소지은 얼굴 뒤에서 그는 장기매매를 위해 살인을 지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사고 파는, 즉 돈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선 악(惡)의 화신이다.
앞에서는 미소지은 얼굴, 선량함의 극치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 미소 뒤에서는 인명을 하찮게 여기는 더러운 짓으로 끝모를 부를 쌓으면서
그는 점점 더 거대한 존재로 부상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 <무정도시>에도 이와 유사한 인물이 나온다. 
악명 높은 마약조직을 이끄는 조직의 보스 조회장이 이른바 <미소지은 남자>다.
그 역시 대외적으로는 합법적으로 거대한 부를 이룬 인물로 존경받는 사람이며, ,
그의 온화한 얼굴엔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다.
하지만 조직 뒤에 숨은 그는 자기 일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아군이건

적군이건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제거해 나가는 무서운 인물이다.

 

아마 몰라서 그렇지, 지금 우리 주변에는 이렇듯 많은 사람들을 눈뜬 장님으로 만든 채

겉으로는 얼굴 가득 선량한 미소를 띠고 있는 인물들이 요소요소에 진을 치고 있을 것 같다. 
감쪽같이 속아넘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참 어리석기도 하다고 비웃으면서.

 

 

<무정도시>는 그 외에도 마약조직을 쫓기 위해 비밀리에 신분을 숨기고 

그 밀매조직에 투입된 언더커버들의 애환어린 삶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박사아들 시현도 언더커버이고 사파리 덕배도 언더커버다.
경찰이었던 언니가 총에 맞아 죽은 후 분노에 휩싸인 수민도 언더커버로 활약하게 된다.

 

언제 신분이 노출될지 몰라 단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그들의 삶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적'이 곧 동지가 되고 '동지'가 곧 적이 되는 극과 극의 삶을

동시에 살아내야 하는 그들의 처지가 비록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일이었다 한들 

참 우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겠구나 싶어 안타까웠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팬을 자처하고 싶을 만큼 시현 역을 맡은 정경호도 멋있었지만,

죽음 앞에서도 절대로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시현의 오른팔 윤현민도

꽤나 인간미가 넘쳐서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최무성이 열연한 문덕배, 그가 필요한 순간순간에 입에 담았던

"아시겠습니까?"라는 말이 드라마가 끝나도 오래도록 여운에 남았다.
마약조직의 보스 '미소지은 남자'가 극히 선량하디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아시겠어요?"라고 묻던 소름끼치도록 부드러운 목소리도..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한 부류는 벼랑 끝에 몰린다 싶으면 곧바로 의리를 내다버리는 사람,
그리고 또 한 부류는 죽을 때 죽더라도 끝까지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불행은 친구를 가려준다”고 말했던 거였을까?

 

"쓴웃음을 뱉어도 눈물을 삼켜도 누구도 날 찾지 않아"라고 슬픈 듯 무겁게 내뱉는 

OST <상처>의 가사에서 느껴지는 허무함이 가슴에 아프게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