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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보는 세상

[천년의 바람] 박재삼 천년의 바람이 주는 교훈 / 바람이 분다 이소라

 

 

오늘 포스팅하는 시는 박재삼님의 <천년의 바람>입니다.

서정시인 박재삼님은 고향 삼천포 바다의 비린내가 묻어나는 서정과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등을 노래하여 '한을 가장 아름답게 성취한 시인', '슬픔의 연금술사'라는 평가를 받는 분입니다.

우리에게는 백 년이라는 시간도 길고 긴 세월이지만, <천년의 바람> 속에서 바람은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아직도 계속하면서 <기껏해야 백 년도 못 사는 사람들>을 

조금은 비웃는 듯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천년의 바람이 주는 교훈>과 함께 포스트 하단에 이소라님의 <바람이 분다>도 올립니다.

이소라님의 명품 목소리 들으시면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없이 와서는
간지럼을 주고 있는 것을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박재삼 <천년의 바람>

 

 

 

 

초딩 1학년 때 같은 반이 된 한 친구는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아서

학교가 끝나면 늘 함께 집에 돌아오곤 했었다.

그런데 3,4,5월까지는 어떻게든 같이 돌아오려고 애를 써봤는데, 

방과후 햇살이 점점 뜨거워지는 6월이 되면서부터는 

더 이상 같이 다니기가 힘들어져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친구와 함께 올 때면 빠른 걸음으로 달리듯 걸으면

1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집을 때론 거의 한 시간씩 걸려 돌아오곤 했기 때문이었다.

 

교문을 나와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려면 신호등을 한 번 건너야 했다.

그런데 녀석은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져도 그대로 멈춰선 채 파란불이 켜져 있는 사이에

자동차가 몇 대나 지나가는지 세어보느라 건너갈 생각을 안 하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파란불이 빨간불로 바뀌기 직전의 순간을 기다렸다가 후다닥 길을 건너는 바람에 

자동차를 운전하는 아저씨들을 놀래키고는 좋아라 하는 위험한 짓도 곧잘 했다.

 

그렇게 간신히 길을 건너면 이번에는 아파트단지에 조성해 놓은 공원 잔디를 밟고 들어가

나무 밑에 털퍼덕 주저앉아서는 흙장난을 하거나, 아예 땅바닥에 엎드려

흙 위를 기어다니는 개미며 그 외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들과 대화라도 나누듯

얼굴을 처박고 있는 적도 많았다.

 

나는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도 무섭고, 또 바지나 셔츠에

흙이라도 묻을까봐 몸을 사리고 있는데, 녀석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도 착하면 착했지 나쁜 아이는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같은 동에

산다는 것 때문에 되도록이면 같이 돌아오려고 해봤지만, 

햇빛이 점점 강해지는 계절이 다가오자 그 뜨거운 햇빛 아래를 한 시간씩 걸려

집에 돌아오는 것이 고역이 되어버려서 어느 날, 나는 마침내 앞으로는

나 먼저 집에 가겠다고 선언을 하고는 더 이상 함께 다니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 친구는 그 후에도 계속 그러고 다니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집에 돌아왔다가 문구 등이 필요해서 사가지고 오려고 학교 쪽으로 다시 가면,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인 녀석을 종종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변함없이 풀밭에 퍼질러 앉은 채 나무나 꽃덤불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거나,

땅속에 노다지라도 있는지(ㅎㅎ) 나뭇가지 등으로 땅을 파헤치고 있거나,

아니면 손으로 흙을 퍼올려 사방으로 퍼뜨리면서 주변을 흙먼지로 자욱하게 만드느라 바빠서

누가 자기 곁을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아마 알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을 것이다. 

 

간혹은 그 친구의 멋쟁이 엄마가 곁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적도 있었다.

아들과 함께 그런 일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야단치는 것도 아닌,

그저 어서 아들의 작업(?)이 끝나기만을 무료하게 기다리는 그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을 미처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 엄마 같았으면 어서 집에 가자고 등짝이라도 한 대 세게 때리거나

버럭 화를 냈을 법도 한데, 용케도 잘 참고 기다려주셨던 거구나 싶다.

 (마치 에디슨의 어머니가 아들이 닭장 속에 들어가 달걀을 품고 있는 것을 바라봐주었듯이 말이다.)

 

2학년부터는 반도 달라지고, 또 4학년 때는 아예 그 동네를 떠났기 때문에

녀석과의 인연은 그렇게 몇 달로 끝나버리고 말았지만 지금도 이따금 생각나는 친구다.

아버지가 의사였으니 아마 그 녀석도 의사가 됐거나, 아니면 그때 하던 뽄새로 봐서는

과학자가 됐거나 했을 것 같다. 모자라기는커녕 호기심이 주체 못할 만큼 강했던 것뿐,

똑똑한 녀석이었으니까.

 

 

 

 

그때, 그러니까 그 녀석과 함께 집에 돌아가곤 하던 어느 날, 

녀석의 밝은 눈이 개미집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녀석은 갑자기 득달같이 달려들어 뭔가를 파헤치기 시작했고, 

그러자 수천수만 마리의 개미들이 미친 듯이 뿔뿔뿔 쏟아져 나와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는데,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 같은 광경이었다.

아무튼 어린 마음에 나는 그때 좀 충격을 받았었던 것 같다.

그날 보았던 그 개미들 모습이 지금도 머릿속에 뚜렷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 혹은 현실세계에서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뜻하지 않은

재난이 발생해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게 될 때면,

묘하게도 그때 자기 집이 파헤쳐진 바람에 놀라서 뿔뿔이 흩어져 가던

개미들의 모습과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 떠오르곤 한다.

 

즉 그때 개미집을 파헤쳐놓고 세상이라도 무너진 듯 놀라서 허겁지겁 도망쳐 다니던

개미들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짓고 있던 그 악동 친구(물론 어려서 악의 없이 한 행동이었지만)처럼

마치 저 높은 곳 어디에선가 인간세계에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재난을 던져놓고는

사람들이 황망한 모습으로 허둥지둥하고 있는 꼴을 내려다보면서 즐기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물론 개미들이 자기 집을 파헤친 것이 사람의 짓이었다는 것을 결코 알 리 없듯이,

사람들 역시 자신들을 그런 엄청난 곤경에 빠뜨린 그 누군가를 알 리 없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박재삼님의 <천년의 바람>이라는 시,

그 중에서도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라는 싯귀를 대할 때도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잘났다고 으스대며 산다 한들,

천년의 바람 앞에서는 마치 사람들의 횡포를 알 리 없는 개미처럼

우매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대부분은 이 시를 읽고 인내심을 가지고 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듯하지만 말이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천년의 바람이 살고 있었다.
이 천년의 바람은 올바르고 심성 곧게 사는 사람에게는 한여름의 산들바람처럼

시원한 바람과 세상을 더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 사랑을 주었지만,

못되고 악랄한 사람에게는 심술궂기가 짝이 없어서 큰 벌을 내리곤 했다.

그 벌이란 다른 아닌 그 못된 사람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였다.

 

“저놈이 기분나쁘게 굴지? 가서 한주먹에 날려버려!”
“저 친구 복수하고 싶지? 뭘 망설여? 저 낭떠러지로 가서 밀어버려!”

"저기 저 친구가 너를 음해하고 있어. 너도 똑같이 저놈을 모함해서 곤경에 빠뜨려!"

 

그러면 천년의 바람의 속삭임을 들은 그 사람은 그 말대로 당장 달려가

기분나쁘게 군 사람에게 주먹질을 하고, 복수하고 싶었던 사람을 낭떠러지에서 밀어버리고,

친구 뒤에서 몰래 모함을 하고 다니면서 괴롭혔다.

본인은 자신이 분노에 못 이겨 한 일로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벌이는 모든 악행들은 사실은 하나같이

다 이렇게 천년의 바람의 꼬드김에 의한 것이었다.

 

 

 

 

위 이야기 또한 박재삼님의 <천년의 바람>을 읽게 될 때면 반드시 떠오르는 소설의 한 대목이다. 

소설 제목은 모르겠다. 어느 해 여름, 김포 쪽 어딘가로 자원봉사를 갔을 때 

어느 집에서인가 표지도 뜯겨지고 종이빛깔도 누렇게 바랠 대로 바랜 책을 

잠시 집어들고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보았던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그 글을 읽으면서 온몸을 엄습했던 모골송연한 느낌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만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이 내가 아닌 누군가의 꼬드김에 의한 것이라면?

마치 장기판의 말처럼 누군가의 조종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인지 박재삼님의 <천년의 바람>을 앞에 두면 

나는 언제나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는 심정이 된다.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거나 탐을 내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마치 귀신같이 밝고 노회한 눈으로 내 속을 들여다보는 천년 바람의 속삭임에 꼬드김을 당하는, 

그러니까 부처님 손바닥에서 노는 손오공 같은 꼴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소라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내내 글썽이던 눈물을 쏟는다

 

하늘이 젖는다 어두운 거리에
찬 빗방울이 떨어진다

 

무리를 지으며 따라오는 비는
내게서 먼 것 같아 이미 그친 것 같아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바람에 흩어져 버린 허무한 내 소원들은
애타게 사라져간다

 

바람이 분다 시린 한기 속에
지난 시간을 되돌린다

 

여름 끝에 선 너의 뒷모습이
차가웠던 것 같아 다 알 것 같아

 

내게는 소중했던 잠 못 이루던 날들이
너에겐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나의 이별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내게는 천금같았던 추억이 담겨져 있던
머리위로 바람이 분다
눈물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