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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 보는 세상/시사/사회/교육

부재(不在), 그 깊고 치명적인 슬픔에 대하여(세월호 참사를 생각하며)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또 일어났네요. 대한민국이 경제대국이니 선진국 대열에 발맞춰 나가고

있다느니 하며 뽐내고 있지만, 후진국형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코웃음이 쳐질 뿐입니다.

오늘은 포스팅에 앞서 먼저 여객선 세월호 침몰사고로 소중한 목숨을 잃은 분들께

삼가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그 가족분과 친지분들에게도 깊은 위로의 마음을 표합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것은 중2 여름방학 때였다.

흔히 할머니라고 하면 연상되는 그런 푸근하고 인자한 분이 아니라 

꽤 까칠하고 까다로운 성품이어서 손주들에게도 잔정을 주지 않았던 할머니여서 그랬는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어도 하나도 슬프지 않고 눈물도 나지 않아서 

어린 마음에도 민망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어른들 틈에서 슬픈 척이라도 해보려고 머릿속으로 그나마

할머니가 잘해주셔던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애썼고, 그도 안 되자 슬펐던 일 혹은

화나고 속상했던 일이라도 생각해 내보려고 머리를 쥐어짜보기도 했다.

하지만 눈시울조차 붉어지질 않아서 눈만 멀뚤멀뚱 뜨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할머니 장례를 마치고 어느덧 평온한 일상으로 다시 돌아간 지 며칠 후,
무심코 할머니 방을 열었던 나는 깜짝 놀라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할머니는 분명 돌아가셨는데, 마음으로는 아직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듯,

문을 열면 할머니가 거기 늘 계시던 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계실 줄 알았던 것이다.
지나칠 만큼 깔끔하셨던 할머니는 늘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계시곤 했었다.
그 실수는 그 후에도 두어 번 더 했고,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어린 마음에도 죽음이란

곧 부재(不在)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어렴풋이 다가왔다.

그리고 동시에 만일 못 보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세상을 떠난 거라면

그 깊고 큰 슬픔을 감당해 내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도 얼핏 들었던 것 같다.

 

 


 

그 후 세월이 흐르고 몇 년 전 여름 어느 날,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셨을 때는
며칠이 지나도록 머릿속이 마치 동굴 속에 갇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어둡고 침침한 채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아서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러다가 하관식을 할 때 아버지가 누운 관을 땅속으로 내려놓는 순간,
산더미 같은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와 텨져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저 관을 내려놓으면 안 되는데. 저 관 위에 흙을 덮으면 아버지가 무거워하실 텐데,

다시 올라오고 싶어도 흙 때문에 못 올라오실 텐데' 하는 생각들이 밑도 끝도 떠올랐고,

할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그 관 속에 아버지와 같이 눕고 싶은 심정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여름이어서 정말 다행이다, 땅속이 추워서 떨지는 않으실 테니 

정말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차피 생명을 잃은 몸으로 땅속에 누운 아버지가

여름이면 어떨 것이며 겨울이라고 해서 뭐가 다르겠느냐만은, 아무튼 그때는

"여름에 돌아가셔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말을 입속으로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 후로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하관식 장면이 나오면 아버지를 묻었던 그때 생각이 나서

줄줄 흐르는 눈물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나중엔 그런 장면이 나오면 재빨리 채널을 돌려버리곤 했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은 이렇듯 죽음으로 인한 부재가 얼마나 깊고 치명적인

슬픔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물론 가족이라 해도 이민을 가거나

오랜 유학생활이나 직장 때문에 거의 몇십 년을 얼굴도 못 보고 사는 경우도 많고,

또 깊은 갈등으로 살아는 있으되 서로에겐 없는 존재로 잊고 사는 사람들도 종종 보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못 보는 사이가 된다 한들,

엄연히 생명을 가진 존재로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과 저세상으로 떠나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는 존재가 되는 죽음은 다르다는 것을 가슴아프게 받아들이게 해주었던 것이다.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고 소식을 들으면서도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이 

"아직 바닷물이 차가울 텐데 어떡하지"라는 생각이었다.

왠지 바닷속 얼음 같은 날카로운 추위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저께 밤에는 차마 TV를 끌 수가 없어서 밤새도록 똑같은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뉴스속보를 듣다가 어찌어찌 잠이 들었는데, 

문득 눈을 뜨니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40분이나 늦게 일어나고 말았다.

허둥지둥 일어나 다시 TV를 틀어놓고 뉴스를 들으면서 늘 해오던 대로 

포스팅을 올리면서도 "이것을 오늘 꼭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가까스로 마치긴 했지만, 어제는 하루 종일 마치 오래도록

울고 난 것처럼 얼굴이며 눈이 부어 있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울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는데, 왠지 일단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까지 겹쳐서 손쓸 도리가 없을 것 같아 간신히 꾹꾹 눌러야 했다. 

 

TV 뉴스 화면도 보기 싫어서 틀어놓고 떠들어대는 소리만 듣고 있노라니

"인재다, 책임자는 누구인가, 사고 원인은 무엇인가...?"

어쩌면 매번 그렇게 똑같은 말들을 해대는 걸까?

하늘에서, 바다에서, 산에서, 땅에서 잊을 만하면 발생하는 사고들.

그리고 그런 인재사고에  덧없이 희생되는 소중한 생명들.

차라리 천재지변이라면 덜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경주 리조트 붕괴사고로 소중하고도 아까운 생명들이 스러져 간 것이 두 달도 채 안 지났는데,

그리고 그때 이런 인재사고가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노력하겠다고

머리를 조아리던 것은 그저 사태를 적당히 다스리기 위한 모션일 뿐이었던 것일까?
하긴 이번에도 역시 그저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쯧쯧..하고 혀 몇 번 차고 나면
또다시 사고가 날 때까지 새까맣게 다 잊고 잠잠해지겠지.

 

 

 

 

인재사고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세월호 침몰 당시 조타실을 맡았던 항해사는

경력 1년이 조금 넘은 3등항해사이고 선장 또한 2급 면허 소지자라고 한다.

2급 면허가  법적으로는 결격 사유는 아니라고 한다. 현행 선박직원법상 3천 톤급 이상

연안수역 여객선의 경우 2급 항해사 이상의 면허를 보유하면 선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최대급 규모의 여객선 운항을 책임지는 선장이니만큼 1급 항해사에게

선장을 맡기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선장에게 비난 여론이 쏟아지는 이유는 그가 290여 명의

승객이 배 안에 갇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는데도 먼저 탈출했기 때문이다.

선원법에도 선박에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 선장은 인명·선박·화물을 구조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다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생존자 중 한 사람의 인터뷰에 따르면 세월호 선장은 탑승객보다 먼저

경비정에 타고 있었고, 다른 승무원들도 이날 오전 일찌감치 구조됐다는 목격담이 나와 

사고 직후 선장과 승무원들의 대처에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승객들을 두고 탈출해서 목숨을 구한다 한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과연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과거 타이타닉호 선장은 책임관답게 대처했다고 한다.

타이타닉호는 1912년 2200여명을 태우고 영국 사우스햄프턴을 출항해 미국 뉴욕으로

항해하던 도중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남서쪽 바다에서 빙산과 충돌해 침몰했다. 

이때 1500여명이나 사망했지만, 당시 타이타닉호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는

배가 침몰하기 직전까지 승객을 구조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이를 기려서 그의 고향인 영국 리치필드에서는 배와 운명을 함께한 스미스 선장의

동상을 세우고 동판에 “영국인답게 행동하라(Be British)”는 그의 마지막 말을 새겼다고 한다. 
2009년 미국 뉴욕 허드슨강에 불시착했지만, 승객 150명과 승무원 5명을 구한 US 에어웨이 소속

1549편 여객기 기장 체슬리 설렌버거도 책임관다운 행동을 보여준 사례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무것도 먹히질 않아서 사흘쯤을 물만 마시면서 꼬박 굶었는데, 

나흘째가 눈앞이 어질어질할 정도로 배가 고팠다.

그래서 간신히 수저를 들고 밥을 먹으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난 살려고 먹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몹시도 서글퍼져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친지분들이 식음을 전폐하고 있던 어머니에게도 식사를 권하면서

"산 사람은 살아야지. 어서 먹고 몸을 추슬러야지"라고 하는 말이

어찌나 야속하게 들리던지 또 울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은 지금 떠올려봐도 너무 잔인하게 들린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말처럼 현실을 강렬하게 일깨워주는 말도 없었던 것 같다.

 

문득 박완서님의 글이 생각난다. 남편분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마저 잃게 되자

반미치광이가 된 듯한 심정으로 매일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왜 내가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합니까?"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박완서님의 한탄과 원망, 울부짖음을 끝내게 해준 것은

"왜 너에겐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하느님의 목소리였다고 한다.

 

생떼 같은 목숨들을 잃은 사람들의 가족들이 지금 어떤 심정에 처해 있을지는

당사자가 아닌 한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미루어 짐작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왜 내게 이런 불행이 닥쳤을까" 하고 가슴을 치고 있겠지만,

그리고 앞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으로 오래도록 고통스럽겠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잔인한 말을 버팀목삼아 하루라도 빨리 

그 깊고 치명적인 슬픔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현재 해양사고 전문가들은 ‘에어포켓’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다고 합니다.
에어포켓이란 배가 침몰할 때 밀려들어온 물의 수압으로 인해 밀폐된 곳에 공기가 남아 있는 공간을 말하는데,

학생들이 묵었던 3층 객실과 인근 식당, 4층 객실 일부에 에어포켓이 만들어졌다면 생존을

기대해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시바삐 구조대원들이 배 안으로 들어가 에어포켓을 찾아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소중한 생명을 구조해 내기를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