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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세 번 결혼하는 여자] 적당한 짝을 찾기보다는 적당한 짝이 되어라!

 

 

종영 2회분을 앞두고 있는 TV 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 관한 포스팅입니다.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결혼과 이혼 문제, 고부간의 문제, 부부간의 문제,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에 대해

생각한 것을 적어본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 주변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일 수도 있으니 

이 드라마를 시청하지 않는 분들이라도 그런 관점에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TV 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가 8회 연장을 하면서 갑자기 부각된 슬기의 새엄마 채린(손여은)의

악랄한 계모 짓과 이해불가의 막장 짓을 폭풍처럼 쏟아내더니, 그런 막가는 행동을 하게 된 근원은

바로 폭력아버지에게 있었다는 식으로 얼기설기 매듭을 지어가고 있는 듯하다.

겉으로는 몇백억씩 기부를 하며 천사의 미소를 짓는 아버지가 사실은 아내와 딸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하는 악마였다는 것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채린이 첫번째 결혼에 실패한 것도 아버지 때문이고, 재혼 후 번번이 의붓딸 슬기(김지영)를 때려 

태원(송창의)으로부터 이혼을 종용받으면서도 못 나가겠다고 버틴 것도 다 아버지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태원과 채린, 두 사람이 이혼하지 않고 계속 살아가려면 뭔가 그럴싸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급조된 대본대로 움직이는 듯하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별안간 부처님 가운뎃토막 같아진 태원은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채린을

가엾다는 듯이 끌어안으며 "내 집에 있는 한 누구도 당신을 건들지 못하게 하겠다. 안심하라"고 말한다. 

 

아주 잘하는 짓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남자라면 여자를 위해 그 정도 용기쯤은 내주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왜 진작에 첫아내 은수(이지아)를 위해서는 그런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다.

하긴 그렇게 못했던 경험이 있어서 지금은 용기를 낼 수 있게 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드라마 제목처럼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누구일까?
태원과 채린이 다시 잘 될 것 같으니 은수가 태원과 재결합하는 것은 이제 물 건너간 것 같고,
그렇다고 은수에게는 두번째 남편 준구와도 재결합할 의사가 전혀 없어보인다.
물론 아직 2회분이 남아 있는데다, 늘 어디로 튈지 도저히 예측불허한 작가이니만큼 어떤 반전을

보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은수도 세 번 결혼하는 여자가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누구도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되지 말라는 것이

이 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인 것일까?

그러고 보면 김수현 작가는 매 드라마에서 사회적으로 뿌리깊은 금기를 하나씩 깨뜨려나가는 것 같다.

이번 드라마에서는 재혼을 넘어 세 번 결혼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은수는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도 놀라운 캐릭터다.
결혼과 이혼, 또 결혼과 이혼으로 주위 가족들에게 끊일 새 없는 걱정을 하게 만들고 있고,

무엇보다도 아직 어리디어린 딸 슬기에게 더없이 끔찍한 불행을 안겨준 장본인이면서도

기회만 있으면 이렇듯 천사같이 해맑은 미소를 짓곤 한다. 

심지어는 <은수의 봄빛 같은 미소 8종 세트>라나 하는 제목으로 

미소짓고 있는 모습이 대량 인터넷을 떠돌고 있을 정도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억지로라도 이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그저 자기만 좋으면 다른 사람들 걱정은 전혀 안 하는

이기심에서 나오는 미소인지 잘 이해가 안 간다.

오히려 어린 딸 슬기가 엄마와 곧 태어날 아기에 대해 밤을 새워가며 고민을 하는데,

이 은수라는 여자는 딸을 두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감행하고, 결혼생활이 여의치 않자

이번에는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또 이혼을 하려고 한다.

어느 그물에도 걸릴 것 없이 한없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것 같아보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불상사를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해결하느라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그저 순간순간 자기 마음이 가는 대로만 거침없이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 

 

 

 

 

서두가 너무 길어졌지만, 사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준구 모자에 대해서다.
은수 시어머니, 즉 준구의 어머니(김자옥)는 언제나 기품있고 말씨며 태도며 조신하기가 이를 데 없는 귀부인이다.

경제적인 부도 충분하지만 인격적으로도 품위가 있어서 적어도 자기 아들이 불륜을 저질러서

이혼에 이르게 된 것에 대해 며느리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사과할 줄도 아는 합리적인 여인이다.

또 그닥 여유롭지 않은 집의 며느리를 맞았어도 흔히 재벌급 시어머니들이라면 보여줄 법한

과시욕도 없고, 물질적인 것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듯한 태도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준구 어머니에 대해 외면적으로만 나타나는 모습에서

뭔가 미심쩍은 기분이 들고, 마치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 여겨졌던 것은, 저토록 완벽할 정도의 

인품을 가진 사람이 왜 아들과 재혼한 며느리(이지아)의 딸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재혼을 초혼이라고 속이고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딸아이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재혼하는 며느리를 맞을 때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과거까지도 모두 끌어안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싶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자기 아들의 불륜을 용서하지 못하고 

이혼을 하겠다고 나선 며느리 은수를 불러 앉혀놓고는 "지금 임신중인 아이는 태어나는 대로 

우리가 데려와 기르겠다"는 말을 하는 장면을 보고는, 역시 그랬구나 싶었다. 

겉으로만 한껏 우아한 인품을 갖추고 있었을 뿐, 이 시어머니 또한 은수의

첫 시어머니(김용림)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속물근성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막장드라마의 선두를 달렸던 <왕가네 식구들>이나 슬기 할머니처럼 온통 속내를 드러내는

말과 표정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것만이 막장 짓은 아니다. 

자신은 다 장성한 아들을, 그것도 결혼한 후에도 분가도 시키지 않고 끼고 살면서,

즉 자기 자식은 그렇게 어떤 이유로도 품에서 내놓을 수 없을 만큼 소중히 여기면서, 

며느리에게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까지 내놓겠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막장 짓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귀를 기울여야만 들릴 것처럼 조용조용한 목소리와 한껏 우아한 자태로 

그런 요구를 한다고 해서그 지저분한 속물근성이 감추어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같은 여자로서 어미에게 자식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안다면

어떻게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부터 챙길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식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진작에 태어나

엄연한 존재로 살아가는 며느리의 딸 슬기는 어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자기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고 여기는 근거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저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이유라면 그들이 가진 경제적 부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은 자식은 소중히 여겨도 되고,

상대적으로 부유하지 못한 사람은 자식을 버리거나 뺏겨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일까?

자기 아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야 경제적 여건과 전혀 관계 없는 일인데 말이다.

 

 

 

준구(하석진)라는 이 남자의 찌질함은 하늘을 찌른다.

그래도 은수의 전남편 태원은 찌질하긴 해도 인간미가 있는 찌질함이라면, 

준구의 찌질함은 인간이라면 대충 챙겨 갖게 마련인 최소한의 인간미조차 없다.

게다가 언제 어디서건 오로지 자신의 아픔만 들여다볼 줄밖에 모르는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남자다.

 

은수가 이혼하겠다고 나서니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대충 반성하는 척하면서

우산도 없이 옷을 입은 채로 비도 맞는 둥 처량함을 온몸으로 드러내보이고 있지만,

아마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매듭지어지면 또다시 곧바로 몸만 멀쩡한 성인일 뿐,

엄마 치마폭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들로 돌아갈 게 분명하다. 

 

이런 유형의 남자들은 흔히 다 커서 자신이 뭔가 일을 잘 해결 못하거나 하면

왜 나를 이렇게 키웠느냐고 항변을 하는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사실 그런 말은 적어도 중학교를 넘어서부터는 할 이야기가 아니다.

머리통은 뒀다가 어디에 쓰려고 하는가.

두 눈으로는 대체 뭘 보면서 사는가?
자신이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인지 알려고만 한다면,

어디서든 알 수 있는 방법이 있게 마련이다.
그걸 귀찮다는 이유로 혹은 보호받는다는 기분으로 떠먹여주는 대로 다 받아먹고는,

즉 누릴 것은 다 누리고서는 안 되는 부분에 한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은 찌질함의 극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은수를 잃게 된 지경에 이르러서야 준구는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그런데요, 어머니,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처음부터 그 사람 딸 데려오게 허락하셨으면,

아이 낳고 분가시켜 주겠다고 하셨으면 어땠을까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준구 씨, 그 사안을 결정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이지 부모가 아니다.
남자라면 사랑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일 때 그녀의 모든 것을 다 쓸어안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 여자가 목숨만큼이나 사랑하는 딸을 버려두게 하고 오는 것은

남자로서 참으로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비겁한 처사다.

 

뭐가 염려되어서 그러는가?

부모가 시키는 대로 말을 안 들으면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지 못할까봐 겁나서?

그렇다면 독립해 나와서 적으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면 되지 않을까?

그래도 부유한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배운 것은 많을 테니,

여느사람들처럼 살 각오만 되어 있다면 절대로 못할 것도 없는 일일 것 같은데 말이다. 

 


 

어떤 결말이 가장 바람직할까?

자신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일단 결혼을 해서 부모가 된 이상,

아이들을 책임질 수 있는 부모의 역할을 잘해 낼 수 있는 방향으로

결말이 지어졌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