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로 보는 세상

트럼보 로마의 휴일 시나리오 작가 달톤 트럼보의 뒤늦은 수상

트럼보 로마의 휴일 시나리오 작가 달톤 트럼보의 뒤늦은 수상

 

오드리 헵번그레고리 펙 주연의 [로마의 휴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로마의 휴일]을 연출한 감독이 윌리엄 와일러라는 것도 대부분 알 것이다. [로마의 휴일] 외에도 [제인 에어], [서부의 사나이], [화니걸], [벤허] (1956년) 등을 연출한 감독으로도 유명하니까. 하지만 [로마의 휴일]을 쓴 시나리오 작가가 누구인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는 바로 제이 로치 감독의 영화 [트럼보]의 주인공 달톤 트럼보(브라이언 크랜스톤)이며, 이 영화는 당시 천재작가로 유명했던 그의 실제 삶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고 있다. 

 

트럼보 로마의 휴일 시나리오 작가 달톤 트럼보의 뒤늦은 수상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던 스타작가 달톤 트럼보는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을 휩쓸었던 공산주의자 색출의 열풍, 즉 매카시즘의 광풍에 힘입어 반미주의자들을 척결하려는 정치적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감옥에까지 가게 된다. 법정에서 "공산주의주의자냐 아니냐? 네, 아니오라고만 대답하라"는 지시에 그는 "네, 아니오로만 대답하는 사람은 바보 아니면 노예, 둘 중 하나겠죠"라고 대답했고, 그로 인해 괘씸죄까지 더해지게 된다.

 

최고의 지식인으로 자부하던 그가 감옥의 규칙에 따라 발가벗은 몸으로 투옥되기까지의 절차를 하나하나 밟아나가는 장면은 가히 굴욕적이다. 이처럼 예술혼을 정치색으로 물들여버리는 행위는 예나 지금이나, 또 어느 나라에서나 벌여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의 싹을 깡그리 잘라버리려는 것이겠지.

 

트럼보 로마의 휴일 시나리오 작가 달톤 트럼보의 뒤늦은 수상

 

그가 감옥에 있을 때나 출소한 후에도 더 이상 자기 이름으로 시나리오를 쓸 수 없게 되자 가족들은 궁핍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이 11개의 가명으로 시나리오를 써서 판 돈으로 삶을 꾸려간다. 투옥의 굴욕을 견뎌야만 했던데다 당장 먹고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가명으로 미친 듯이 글을 써내려가야만 했던 그가 점점 괴팍해져 가면서 늘 곁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해준 아내와 자식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장면은 가슴이 아팠다.  

 

달톤 트럼보는 실제로 위의 이미지에서처럼 욕조에 판을 얹은 채 글을 쓰거나 책을 읽곤 했다고 한다.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 역을 맡은 브라이언 크랜스톤달톤 트럼보의 실제 모습과 많이 흡사해 보인다.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달톤 트럼보에 대한 스토리를 다룬 적이 있어서 소개해 본다. 영화 [트럼보]에서는 큰딸의 권유로 그가 자신이 [로마의 휴일] 시나리오 작가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세상을 떠난 후 17년 만에야 그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영화 [로마의 휴일]은 로마를 방문한 공주 오드리 헵번과 평범한 기자 그레고리 펙의 짧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이야기로,  당시 신인이었던 오드리 헵번은 이 영화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영화 속에서 오드리 헵번이 보여준 짧은 커트머리와 스카프, 블라우스 등의 의상은 '헵번 룩'이라 불리며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이 영화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 스페인 광장에서 처음 만나는 장면, '진실의 입' 앞에서 그레고리 펙이 손을 넣자 깜짝 놀라 그를 끌어내려고 뒤에서 끌어안던는장면 등 수많은 명장면이 화제가 되면서 20세기 최고의 로맨틱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달톤 트럼보는 안타깝게도 사망한 지 17년이나 지난 뒤, 즉 영화가 개봉된 지 40년 만인 1993년에야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1952년 미국 할리우드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며 시나리오 작가로 탄탄대로를 걷던 달톤 트럼보였지만, 당시 그와 함께 일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서는 공산주의를 척결하자는 반공산주의의 분위기가 조성됐고, 의회는 반미활동조사위원회를 조직해 공산주의 성향을 보인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3년 달톤 트럼보는 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했다는 이유로 반미활동조사위원회의 청문회에 소환된다.

 

 

당시 반미활동조사위원회의 청문회에 선다는 것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 것과 다름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달톤 트럼보는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청문회에서 의회모독죄와 증언을 거부한 죄로 1년형을 선고받고 켄터키의 연방 감옥에 가게 된다.

 

달톤 트럼보가 감옥에 간 뒤 그의 아내와 세 아이는 집세를 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생활고를 겪게 된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가족들이 곤경에 처하자 몇 날 며칠 동안 밤을 새며 글을 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이 작품이 바로 [로마의 휴일]이다.

 

 

달톤 트럼보는 출소 후 곧바로 영화사를 찾아가는데, 여러 곳의 영화사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자신이 '할리우드 10'에 올라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탓이었다.

 

할리우드 10이란 적극적인 공산주의 활동으로 블랙리스트에 오른 할리우드의 유명인사들로, 10명의 감독 및 작가들을 말한다. 1947년 미국 영화협회는 할리우드 10의 명단을 발표하면서 앞으로 절대 이들과 함께 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그 '할리우드 10' 중 한 사람이 달톤 트럼보였던 것이다.
 


달톤 트럼보는 절친한 친구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이안 맥켈런 헌터를 찾아가 자기 이름으로 영화화되는 것은 어려우니 작가로 자네 이름을 대신 올려달라고 부탁한다. 그의 부탁을 받은 이안은 [로마의 휴일]의 시나리오를 자기 이름으로 영화 제작사에 판매했고, 그 돈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그 돈으로 근근히 생활을 꾸려갔다.

 

시나리오를 구입한 파라마운트사는 곧바로 영화 제작에 돌입했고 1953년 [로마의 휴일]이 개봉되었다. 영화는 흥행과 비평에 모두 성공하여 전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기록했다. 그 다음에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의상상, 그리고 각본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달톤 트럼보가 쓴 시나리오가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지만, 정작 수상자는 그가 아닌 이안 맥켈런 헌터였다. 그는 이 모습을 그저 TV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 그는 그 후에도 가명으로 시나리오를 써야만 했고, 멕시코의 소년과 투우사의 대결을 그린 영화 [브레이브 원], 한 서부 남자의 인생을 담은 [카우보이], 명배우를 꿈꾸는 남자의 이야기 [커리어],  트라키아 출신의 노예 스파르타쿠스가 검투사를 이끌고 반란을 주도하는 [스파르타쿠스], 이스라엘의 독립을 꿈꾸는 유태인들의 투쟁을 그린  [영광의 탈출] 등이 그가 가명으로 남긴 작품들이다.

 

 

20여 년이 흐른 1976년 달톤 트럼보는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로마의 휴일]을 쓴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된 아들 크리스퍼는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아주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리고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92년 드디어 아카데미 시상식을 주최하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는 영화 [로마의 휴일]이 달톤 트럼보의 작품임을 공식인정하고, 다음해인 1993년에는 아카데미 각본상의 주인은 달톤 트럼보임을 발표한다. 이로써 그는 영화가 개봉된 후 40년 만에 아카데미 트로피를 되찾게 된다.

 

이상, 트럼보 로마의 휴일 시나리오 작가 달톤 트럼보의 뒤늦은 수상입니다. 흥미로우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