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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로 보는 세상

[세 번 결혼하는 여자]와 착한아들콤플렉스

 

 

TV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를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된 것은

친척어른 중에 슬기 할머니(김용림)와 꼭 닮은 분이 계시기 때문이었다.

외모가 닮았다는 뜻은 아니고, 다 장성한 아들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품에서 놓아주질 못하는 바람에

결국은 지금도 외롭고 불행한 삶을 살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흡사하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 친척어르신도 며느리를 둘 맞았었는데, 좀 무뚝뚝한 성격이었던 첫번째 며느리가 

곰살맞게 굴지 않는다고 무척이나 미워해서 결혼식 같은 데서 잠깐잠깐 만나도

얼마나 살벌한 삶을 살고 있는지 충분히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살다 보니 부부 사이도 서걱서걱해진 듯, 결국 이혼을 하고야 말았다.

 

그 후 두번째 며느리를 맞았는데, 이번 며느리는 싹싹하고 상냥하고 애교가 많아서

좋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시며 몇 년간 조용히 잘사는가 싶었다.
그런데 몇 년 후 할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혼자 된 친척어르신이 아들집으로 들어가

함께 살게 되면서부터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또 이혼한다는 말이 들렸다.

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이혼 직전에 그 두번째 며느리가 죽고 말아서

굳이 이혼이라는 절차를 거칠 필요는 없게 되었다. 

 

그 내막까지야 알 길도 없고 구태여 알려고 할 필요도 없어서 다들 가타부타 말을 삼갔지만,

결국 어머니 덕분에 다시 혼자가 된 아들은 지금 아이 둘과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어이가 없는 것은 그 꼴을 당하고도 그 어르신은 또 며느리를 맞겠다고 나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아들이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어머니에게 또 결혼은 못한다고

거부하고 나서는 바람에 무산되었고, 그 와중에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엔 절대로

아내를 맞아 한 여자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막말까지 오갔다고 한다.

어르신은 어르신대로 "저놈이 나 죽기만 기다리는 모양"이라며 눈물을 쏟고 말이다.

 

90을 넘긴 연세이니 어쨌든 돌아가시긴 하겠지만, 이번에도 아들이 어머니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면,

<세 번 결혼하는 여자>가 아닌 <세 번 결혼하는 남자>가 됐을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주변에는 이와 유사한 일들이 주변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이런 경우 문제는 아내가 결혼생활을 하기에 부적합한 무슨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 한, 여자에게 있기보다는 <착한아들콤플렉스>에 걸린 남자에게 있기 십상이다.

위에서 말한 친척어르신의 아들도 늘 어머니가 입에 달고 살던 “말할 수 없이 착한 아들”이라는

족쇄를 끝내 벗어던지지 못한 희생양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만나 서로 결혼이라는 선택을 한 이상, '부부갈등'이 아닌

'고부갈등'으로 이혼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아무리 결혼이 단지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 가족과 가족간의 결합이라 한들, 

두 사람의 소중한 삶을 다른 사람(부모라 할지라도)의 손에

좌지우지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두 사람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특히 어머니의 지나친 개입을 막지 못해  아내를 떠나게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남자의 책임이다.

이런 남자들도 대부분 <착한아들콤플렉스>에 걸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착한아들콤플렉스>는 어린시절 <착한아이콤플렉스>에서부터 시작되기 십상이다.
특히 억압적이고 드센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착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며, 어른으로 성장한 후에도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떤 갈등상황이든

일단 피하기부터 하려 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주장하기보다는 타인의 요구에 순종적으로 따르게 된다.
이런 사람이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은 자신의 느낌이나 욕구를 늘 깊숙이 숨기거나 무시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내면이 항상 위축되어 있고 우울한 감정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것이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의 태원(송창의)이 늘 굳은 표정을 한 채 밝아보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착한아들콤플렉스>에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결혼을 했다면 자신의 가족을 지키는 것은 남자에게 있어 절체절명의 과제다.

따라서 아무리 드센 어머니가 무섭게 느껴지는 존재라 한들, 그리고 아무리 어머니에게

착한 아들, 효자이고 싶다 한들, 어머니의 지나친 애정과 간섭이 자신의 가정을

파괴할 정도의 위력으로 다가온다면, 단연코 거부를 해야 한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서도 <착한아들콤플렉스>에 얽매여 어머니를 선택함으로써 

소중한 아내와 딸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태원은 은수(이지아)와 슬기(김지영)에겐

그저 무능한 남편이자 무책임하기 그지 없는 아빠일 뿐이다.

자신의 가족과 가정에 관한 한, 마지막 결정권자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이다.
그러니 사실은 온전하고 정상적인 남자의 사고라면 어머니 때문에, 혹은 고부갈등 때문에

아내와 이혼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수치심을 느껴야 마땅하다.

 

 

 

 

준구(하석진), 이 남자 역시 <유사 착한아들콤플렉스>에 걸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나이 먹도록 부모가 거들어주지 못하면 스스로의 의지로는 어떤 어려운 일도 해결하지 못하니,

외면은 어른으로 성장했어도 내면은 아직 코흘리개 수준을 못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불륜을 저질러도 어머니나 아내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고,

결혼도 이혼도다 어머니에게 떠넘긴 채 매듭을 지어주길 바란다. 

그리고는 아내가 아닌 부모에게 버림받을까봐 벌벌 떠는 모습이 참으로 유아틱하다. 

이건 마치 어린시절 친구와 싸우다가 크게 다치게 하거나, 혹은 본의 아니게 

무슨 사고를 치고는 엄마 뒤에 숨어서 벌벌 떨던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런 수준으로 어찌 아내와 자식을 지키는 남편 혹은 아빠 노릇을 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된다. 

아니, 과연 남편 노릇, 아빠 노릇을 해내기는 할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럽다.

비록 아버지 덕분이라 한들, 적어도 한 회사의 대표로서 직원들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전 인생이 걸린 결혼생활이라는 마차를 끌고 가는 일에는

그토록 무능하고 무책임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여담이지만, <세 번 결혼하는 여자> 중 이 남자, 광모(조한선)만이 <착한아들콤플렉스>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하는 태평스러운 표정으로 재미나게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물론 그 나이에 철딱서니도 없고 제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조금은 한심스러운 남자로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그 점은 논외로 치고 남편감이나 아빠로서의 면모에만 잣대를 들이댄다면,  

어리버리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아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인 현수(엄지원)를 지키기 위해

어머니로부터 별별 악다구니를 다 듣고 구타(?)를 당하면서까지 철저하게 방패막이가 되어준다.

게다가 어머니 앞에서 현수의 반려견들까지도 서슴없이 자기 딸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씀이 가상하다.

 

어머니 입장에서만 본다면 그런 아들이 철부지 같고, 죽을 둥 살 둥 고생해서 키워놨더니

자기 여자만 챙기는 서운한 아들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는 자식이 결혼해서 아내와 자식들 잘 키우면서 행복하게 알콩달콩

잘 살아주는 것이 모든 부모들의 소망일 터이기 때문이다.

 


 

 

글을 써나가다 보니 왠지 결혼한 남자라면 부모라는 존재는 무시하고 아내나

자기 가족만 지키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결코 그런 의도에서 하는 말은 아니다.

실상은 부모나 자식이나 다들 지혜롭게 넘어도 될 선과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될 선들을 잘 지키면서 살고 있으며, 사소한 일들은 그때그때 현명하게

해결해 가면서 무리없이 지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부모로 인해 부부간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그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부모가 아닌 부부 당사자에게 있다는 것을 

부모에게도 확실히 짚어줘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뿐이다.

그리고 부모 쪽에서도 기본적으로 자식들 일은 자식들이 알아서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것이 부모 자신을 위해서나 자식을 위해서나 올바른 삶의 태도가 아닐까.

 

그건 그렇고, 드라마를 보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우리나라는

왜 그리 부모들이 자식들 일에 지나칠 만큼 개입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될 때가 참 많다.

물론 갈등구조를 만들어 자극적인 장면을 많이 연출함으로써 시청률을 올려보겠다는 

방송사의 절대의지에서 나온 일이라는 것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그 점을 감안한다 해도

심지어 나이가 4,50 되는 자식들 일에까지 부모도 모자라 이모에 고모에 작은엄마에

심지어 새엄마까지 등장해서 따따부따해 대는 것은 좀 너무 심하지 않나 싶다.

 

게다가 이런 장면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게 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그래서 막장드라마라는 말도 나오는 것이리라.

하지만 흔히 욕하면서 보는 것이 막장드라마라고는 해도,
“흉보면서 닮는다”는 속담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될 시점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