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비밀 결사조직 의열단을 이끈 약산 김원봉

항일비밀 결사조직 의열단을 이끈 약산 김원봉

 

 

항일비밀 결사조직 <의열단>을 이끈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은 1938년 조직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위해 <조선의용대>를 창설합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이며 192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의용대는 1938년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로, 항일운동에 거대한 공적을 쌓았습니다. 

 

2018년 8월 15일 제73주년 815 광복절을 맞아 EBS [지식채널e]를 바탕으로 항일운동에 온몸을 바쳤으나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배척당한 김원봉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은 연설에서 "조선 의용대는 조선민족해방의 선봉대로서 천백만 동포를 환기해서 조선민족 해방을 쟁취하려는 것이요. 이 동아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완전히 구축하자는 것입니다"라며 "침략의 피로 더럽혀지는 칼이 되려는가? 침략전쟁에 반대하라!"고 외쳤다.

 

 

그 일환으로 수많은 일본군과 맞선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김지섭의 <도쿄 일본왕궁 폭탄 투척>,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폭탄 투척> 등 일제를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한 23번의 폭탄 의거가 있었다. 

 

 

김원봉은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의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백범 김구와 약산 김원봉의 공동명의로 보내는 공개편지를 통해  '좌우에 상관 없이 해외 모든 독립운동 단체들이 통일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가장 열렬하게, 가장 타협 없이 무장 독립운동을 한 김원봉은 1945년 광복을 맞은 지 2년 후인 1947년 미군정 소속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돼 구타와 온갖 고문을 당한다. 

 

고통을 받던 그는 임시정부 군무부장 시절의 비서였던 시마오에게 "북조선을 그리 가고 싶지는 않지만 남한의 정세가 너무나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구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1948년 남북 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입북했던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월북 '김원봉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군경에 의해 학살당하고 유일한 살아남은 사람은 막내여동생뿐이었다. 막막한 생계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빨갱이"라는 낙인이었다. 

 

 

유일한 생존자 막내 여동생의 아들로 김원봉의 조카인 김태영 박사는 "빨갱이 소리를 하도 들어서... 심지어는 내 결혼식날에도 결혼식 마치고 나오는데 '누군가 했더니 빨갱이 집안이네'라더군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예전에는 개인적으로 약산 선생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약산 형제들 입장에서 보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가정을, 집안을 다 부숴놓은 셈이니 말이다.  

 

"우리 집안뿐만 그런 게 아니고 많은 (독립운동) 집안이 그렇지 않겠어요? 대체로 못사는 게 마음아프죠. 악인이 더 잘살고 더 많이 배우고, 세상이 공평치 않았죠. 그런 생각은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라는 그의 말에서 그들이 받아온 심적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느껴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군사령관, 국무위원이었던 약산 김원봉. 하지만 북한에서는 숙청, 남한에서는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지워지고 있는 그의 역사를 후손들을 직접 찾아나서기로 했다고 한다. 

 

 

내년 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도 전에 대한민국 광복을 위해 온몸을 던졌던 수많은 분들의 넋을 향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을 바친다.  

 

이상, 항일비밀 결사조직 의열단을 이끈 약산 김원봉입니다. 약산 김원봉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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